극단 미인 <검열관과 털>
극장, 이어달리기의 바통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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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우(蓮友)
1987년에 개관한 극장 이름이다. 나도 그렇게 고유명사로 처음 접했다. 하지만 연극을 하면서 선배의 입을 통해 이 말을 들을 때면(이를테면, “우리 진정한 연우가 되자.”) 움찔하곤 했다. 다소 낯간지럽게 느껴질 때도 있었고, 술 때문이었겠지만 그 단어 자체에 잠시 취했던 기억도 있다. 이제 막바지에 이른 <권리장전2016_검열각하>(이하 <권리장전>)를 보러 갈 때마다, 극장의 현판을 뚫어지게 보게 된다. 공연기간만 5개월, 21개 팀이 바통을 이어받는 기획. 무모하다 싶었고, 분명히 포기하는 팀이 있을 거라 예상하기도 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부르르 떨며 시작했대도, 주먹을 불끈 쥐고 시작했대도, 이 길고 긴 이어달리기가 쉬운 일은 아니다.
불온(不穩)
1. 온당하지 않음.
2. 사상이나 태도 따위가 통치 권력이나 체제에 순응하지 않고 맞서는 성질이 있음
국어사전의 이 정의에 따르면, <권리장전>은 불온함을 자처하고, 불온한 행위를 무대에 펼쳐 보이는 연극이다. 그런데 사전의 정의 ‘1’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판단의 주체가 누구냐에 따라 ‘불온함’은 언제나 상대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너도 그럴 수 있고, 나도 그럴 수 있다. 하지만 두 번째 정의에서는 이미 주체가 정해져 있다. 그래서 누군가는 ‘불온의 대상’을 규정하기에 바쁘고, 누군가는 ‘불온한 상상력’을 통해 한 치라도 더 나은 인간과 세계를 꿈꾼다. 그리고 행동한다. 물론 공연이 홍보수단은 아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권리장전>의 개별 작품들을 보면서 때로는 빈곤한 상상력에 대해 아쉬워하기도 하고, 우리의 시선을 섬세하게 확장시켜주는 상상력을 발견할 때는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는 것이다.
불온한 연우들의 이어달리기를 기획하고 함께 달려온 예술감독 김수희 연출가와 임현진 피디를 만났다.
김수희 연출(좌)과 임현진 피디(우)
출발선을 돌아보며 : 앗, 늦었다!
- 한현주
- 언제 처음 작전을 꾸리기 시작했나요?
- 김수희
- 2월에 처음 만났어요. 윤한솔, 이양구 선배와 얘기 나누면서 일단 해보자고 저지른 거죠. 그때 당시도 이미 많이 늦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팝업 씨어터’ 사태가 발생한 지, 벌써 일 년이 다 되어가잖아요. 공연을 통해서 행동해야한다는 강박이 많았죠. 어쨌든 뜻을 같이하는 연출들이 하나 둘 모이기 시작했고 21개 팀이 됐어요. 그 2월에 전체 스케줄까지 다 정해버렸죠.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거 같았어요.
- 임현진
- 돌아보면 각 작품의 형식과 내용을 고려해서 시기를 안배했으면 좋았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애초에 그렇게 할 수가 없는 기획이었죠.
- 한현주
- 우연이겠지만, 9월에 올린 작품은 다 드라마네요. 이번 작품 <검열관과 털>까지 포함해서.
- 임현진
- 말 그대로 우연이지만 풍자와 위트, 검열관의 심리 등으로 키워드가 엮여졌어요. 8월에도 검열을 통한 시선의 확장이라는 측면에서 작품의 연결고리가 생기기도 했죠.
- 한현주
- 벌써 가을이에요.
- 김수희
- 늦었다고, 늦었다고 외치면서 여기까지 온 거 같아요. 지난여름 안산에서 열린 ‘극작가 리서치 워크숍’에서 성수정 번역가가 영국의 ‘버바팀’연극에 대해서 소개를 했는데요. 그걸 듣고 나니까 늦었다는 생각이 더 들더라니까요.
‘문자 그대로’라는 뜻의 ‘버바팀(Verbatim)’. 시사적인 이슈가 터질 때 배우와 연출, 작가 등이 바로 사건을 취재하여 만드는 연극이다. 청문회나 판결문 등의 실제 기록물들을 토대로 하기 때문에, ‘증언의 연극’ 혹은 ‘증인의 연극’이라 불리기도 한다.

- 한현주
- 어쨌든 21개팀 저마다의 색깔과 생각이 있으니, 중간에 삐거덕거리기도 했을 거 같은데요.
- 김수희
- 중간에 공연을 미루고 싶어 하는 팀도 있었어요. 작품의 완성도에 대한 문제 때문이었죠. 당연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죠. 그러면 저는... 팀의 의지가 가장 중요한 거니까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잖아요. 그랬더니 바로 다시 전화가 와요. “할게요~”라고.
- 임현진
- 펀딩을 했지만, 그 돈은 대관료로 쓰기에도 빠듯해요. 당연히 제작비가 없으니 모두 개런티도 없이 참여했죠. 두 명의 무대감독이 전체 공연을 번갈아가며 다 맡고 있을 정도로 인력도 부족하죠. 하지만 누군가가 우리를 응원하고 지원해주었다는 것 자체가 책임감을 나누는 동력이 된 거 같아요. 일반 축제 프로그램과도 다를 수밖에 없어요. 완벽하게 자발적으로 모인 공동의 프로젝트니까요.
- 한현주
- 작품도 올리고 전체를 총괄하기도 해야 했으니 여러모로 힘들었겠어요.
- 김수희
- 저는 이렇게 수장 같은 거 할 타입이 못돼요. 그나마 혜화동1번지 동인으로 활동한 게 이번에 큰 도움이 됐죠. 작품 연출하는 게 제일 힐링이 돼요.
- 한현주
- 그럼, 이제 작품 얘기로?
- 김수희
- 아, 집에 가고 싶다... (웃음)
<검열관과 털>
세월호 이후의 연극
- 한현주
- <바보들의 행진>부터 <괴벨스 극장>, 그리고 이번 작품까지 세 작품 모두 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생각하게 만드는 목적이었어요. 어떻게 70년대의 검열관 이야기를 하게 되었나요?
- 김수희
- 대학 선배가 쓴 작품인데, 원래는 단편 시나리오였어요. 거기다가 배우들과 제가 조사한 내용들을 추가하고, 작가가 고치고 하는 방식으로 대본이 완성됐죠. 블랙 코미디를 축으로 해서, ‘털’의 상징을 드러내려고 했어요. 보이는 이미지 그 자체에만 매달리는 우매함이죠. 근데 저도 작품을 만들다 보니까 주제가 자꾸 숙제처럼 다가오더라구요. 포스터 컨셉에서도 알 수 있듯이, B급을 철저히 지향해야하는데 연출로서 너무 정리하려고 들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요. 배우들이 애드리브를 하면, 이건 이래서 안 돼, 저건 저래서 안 돼, 하는 식으로.
- 한현주
- 검열 너무 하셨네요. (웃음) 근데, 주인공의 내적 갈등이 너무 늦게 촉발된 거 같아요. 이야기가 시작되려는 지점에서 끝난 거 같은 느낌?
- 김수희
- 그런 면이 있죠. 아무래도 단편 시나리오에서 시작했기 때문에 장편으로 확장해나가는 데 무리가 있었던 거 같아요.
- 한현주
-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시대적 장치들은 흥미로웠는데, 결국 문제적 인간이 중요한 거잖아요. 사실 국가권력에 의해 야기된 문제인데 그들이 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개인의 내적 갈등으로, 혹은 개인과 개인의 갈등으로 치환해버리는 거죠. 어찌 보면 연극의 검열 문제도 그렇게 되어버린 과정이 있구요.
- 김수희
- 맞아요. 문제의 근원에 다가가는 것을 흐리게 만드는 가장 폭력적인 방법이죠. 저도 연습하면서, 또 프로젝트를 끌고 가면서 그 폭력과 상처들에 대해 많이 생각하게 되더라구요. 그런 면에서 저한테는 <권리장전>이 새로운 연대를 경험할 수 있는 기회였어요. 텔레그램 창을 통해서 서로 격려하고, 장비나 연습실까지 도움을 주고받고 했죠. 공연 전에 대본도 미리 공유했구요. 전에는 해본 적 없는 경험이었어요.

관객에게 바통 이어주기
- 한현주
- 연극의 검열에 대해 홍보하려는 게 이 프로젝트의 궁극적인 목적이 아니라는 말씀을 여러 번 강조하셨는데요.
- 김수희
- 네. 관객에게 작품들이 어떻게 읽히고 있는지를 바라보자고, 그게 바통을 이어받는 의미 아니겠냐고 창작자들과 얘기를 나누곤 했어요. 우리 밥그릇 얘기 같지만 떠먹는 사람은 관객이고, 결국 관객이 유지되어야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런 면에서 기획팀의 역할이 매우 컸죠.
- 임현진
- 매달 한 번씩 ‘관객 수다 모임’을 가졌는데요. 담론이 이어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요. 비평단도 고민을 했지만, 그보다는 관객들의 얘기를 듣는 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어요. 우리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니까요. 9월 29일부터는 특별기획프로그램도 열려요. 수다 모임에 함께한 분들이 창작팀을 꾸렸어요. 그들의 시선으로 작품을 올리는 거죠. ‘뉴스타파’에서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 <자백>도 상영될 예정이구요.
- 김수희
- 개인적으로는 더 다양한 양식의 공연이 부족했던 게 아쉬웠는데요. 예를 들면 이경성 연출의 <삐끼ing>같은 거리 공연이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 싶은 거죠. 관객들을 좀 더 적극적으로 만나는 방식이니까요. 그런 점에서 특별프로그램을 통해서 관객에게 바통을 이어준다는 게 큰 의미로 다가와요. 기대도 되구요.
- 임현진
- 아카이빙북 제작도 준비하고 있어요. 이 프로젝트가 끝은 아니니까요.
- 김수희
- 우리 스스로 생각이 게을러지기 시작하면, 언제든 다시 돌아와야죠.
계절이 세 번 바뀌었다. 김수희 예술감독은 펀딩을 위해 이리저리 전화를 돌리던 시간이 벌써 까마득하게 느껴진다고 했다. 한 팀이 나섰으면 절대 이루지 못했을 작업, 서로의 관점과 양식을 인정하는 과정이었기에 가능했던 작업이다. 열심히 밟고 뛰느라 하얀 분노의 트랙은 지워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극장 밖에서 이 사회를 들여다보는 또 하나의 눈으로 작동할 담론의 트랙이 선명하게 이어지기를 바란다. 참, 아직 공연이 남았다.
[사진: 장우제 woojejang@gmail.com, 극단 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