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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산울림고전극장 - 극단 맨씨어터 <아이, 아이, 아이>

휴, 인간이란!

김태희_평론가
111호 2017.03.09
그리스 고전은 어렵다. 숫자가 나타내는 시간의 격차만큼이나 그리스 사회는 우리에게 낯설다. 게다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영웅들이고 그들이 내뱉는 함축적인 대사들의 행간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흘러간다. 덕분에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들은 우리 연극 무대의 단골소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텍스트로 인식되어 왔다. 올해 산울림소극장의 고전...

그리스 고전은 어렵다. 숫자가 나타내는 시간의 격차만큼이나 그리스 사회는 우리에게 낯설다. 게다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인물들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영웅들이고 그들이 내뱉는 함축적인 대사들의 행간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흘러간다. 덕분에 그리스 작가들의 작품들은 우리 연극 무대의 단골소재이면서 동시에 가장 어려운 텍스트로 인식되어 왔다. 올해 산울림소극장의 고전극장은 바로 이 난해한 그리스의 고전들을 중심으로 기획되었다.
극단 맨씨어터가 선보인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아이아스」를 각색한 <아이, 아이, 아이>다. 탄탄한 연기력을 갖춘 배우들을 중심으로 활동하는 극단 맨씨어터는, 다양한 번역극을 위주로 활동을 하다가 최근 창작극에 대한 관심을 내비치고 있다. 여기에 젊은 연출가 한상웅이 함께 하면서 본격적인 영역의 확장으로 나아가고 있다. 다채로운 경력을 갖춘 배우들과 젊은 언어로 무장한 연출가가 선보이는 그리스 비극의 세계는 어떤 모습일까. 이들은 과연 고전의 난해함 속에서 생생한 현재성을 길어 올릴 수 있을까.

그리스 영웅 아이아스에서 인간 아이아스로

김태희
사실 소포클레스의 다른 작품들에 비해서 <아이아스>는 공연이 자주 되지 않는 작품인데요. 이 작품의 어떤 부분이 끌려서 선택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요.
한상웅
원래는 메난드로스로 <사모스 여인>이라는 작품을 하려고 했었는데 중간에 바꾸게 되었어요. 그런 생각 많이 하잖아요. “나는 누구지,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지?” 내가 무언가를 비판하려고 했을 때 계속 나에 대한 질문을 던지게 되는데 이 작품이 그런 질문을 많이 하게 하는 작품이었던 것 같아요.
김태희
특히 어떤 면에서 그랬을까요?
한상웅
이 작품이 끝나고 나서, 딱 다섯 글자 ‘휴, 인간이란!’ 이게 남을 거란 생각을 했고 또 그러길 원했어요. 등장인물들의 대사를 잘 살펴보면 결국 명예, 권력, 금전적인 것들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 차 있거든요. 그게 정말 가치를 두어야 할 것인가? 그런 의문이 많이 들었어요. 반면 코러스의 노래는 사는 것 자체가 힘들어 죽겠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는 거예요. 정말 소포클레스가 탁월하다고 느낀 게 그런 부분이었어요. 코러스의 노래로 일종의 소격효과를 주는 거죠. 덕분에 나는 어떻게 살고 있지, 나는 어떤 걸 쫓아가고 있지, 나도 이들처럼 살고 있진 않은가. 그런 질문을 하게 됐어요.
김태희
그럼 작품의 각색에 관한 이야기로 넘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원작은 아테나 여신의 대사로 시작되잖아요. 그런데 이 작품은 무구를 둘러싼 인물들의 갈등, 전사를 전면으로 부각시키고 있어요. 어떤 의도에서 첫 장면을 추가하게 되었나요?
한상웅
각색 전에 배우들과 원본을 읽고 인물들에 대해 연구하는 시간을 가졌어요. 그런데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른 부분이 눈에 띄기 시작하는 거예요. 일반적으로 오디세우스는 몇 년에 걸쳐 거친 바다를 떠도는 영웅으로 기억하는데 이 작품의 전사에서는 굉장히 비열한 사기꾼으로 표현이 되는 거죠. 근데 그게 전사에만 존재하는 부분이라 잘 드러나지 않잖아요. 이런 캐릭터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또 이들의 운명이 신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게 아니라 결국 인간의 선택과 욕망에 의해서 스스로 파멸해가는 과정으로 부각되길 원해서 아테나 신을 뺐어요.

말하지 못했던 자들을 위하여

김태희
원작 <아이아스>는 아이아스의 죽음을 기점으로 두 부분으로 나뉘어요. 이 작품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는데 뒷부분의 경우 원작과 달리 테크메사가 부각되는 방식으로 바뀐 것 같아요.
한상웅
사실 원작은 테크메사가 주를 이루는 이야기가 아니죠. 테오크로스가 등장하고 코러스들도 다 남자잖아요. 이걸 바꾼 의도가 있었어요. 앞부분이 욕망에 눈이 먼 사람들에 대한 조롱과 비웃음에 포커스를 두었다면 뒷부분은 남성들의 영웅주의를 비판하고 싶었어요. 이 작품의 인물들은 영웅으로서의 위상과는 어울리지 않게 별 것도 아닌 것에 굉장히 목숨을 걸어요. 오히려 정작 일을 해결하는 건 여자들이죠. 그런 식으로 각색을 하다보니까 테크메사가 자연스럽게 끌고 갈 수 있는 힘이 생기더라고요.
김태희
물론 남성영웅주의에 대한 비판도 느껴졌지만, 저는 테크메사에게서 자기와 자기 아들이 살아남아야 할 때 나타날 수밖에 없는 히스테릭한 반응도 느껴졌거든요. 그래서 연출님 말씀처럼 휴, 결국 너도 인간이구나, 싶었어요.
한상웅
그렇죠. 휴 인간이란. 그렇기 때문에 코러스장까지 여자로 바꾼 거예요. 백성들의 목소리도 여자로 대변을 해야겠다고 생각을 했어요. 코러스의 노래가 사실 굉장히 길잖아요. 그런데 흥미로웠던 건 앞의 내용은 전쟁으로 인한 고통을 이야기하다가 또 통치자들을 불쌍하다고 노래해요. 그리고 또 얼마 안가서 어떻게 살아야하나 한탄하죠. 이걸 보면서 그때나 지금이나 참 자기 신세가 힘든데 남 걱정하고 있구나 싶었죠. 아마 눈치를 많이 못 챌 것 같지만 처음에 몽타주 식으로 배열된 코러스의 노래와 마지막 아이아스가 죽을 때의 코러스 노래가 같아요. 백성들은 울부짖고 있고, 영웅들의 싸움으로 인해서 트로이성은 함락되었다는 내용의 대사죠. 작품이 다 끝나고 이 작품이 현재를 사는 우리들의 이야기로 다가왔을 때, 똑같은 대사가 다르게 느껴지길 바랐어요.
김태근
코러스에 대해서 조금 덧붙이면요. 코러스들은 영웅으로 군림하지만 실상은 너무나 조악하게 살아가는 통치자들 때문에 피해를 보는 사람들이죠. 그런데 거기서 더 확장해서 그걸 알면서도 저 사람들과 함께 기대서 살아가야하는 인생의 비애감까지 관객들이 가져 갈 수 있다면 좋을 것 같아요.

현실적인 무대, 투영되는 현재

김태근 배우

김태희
무대 콘셉트는 어떻게 정하게 되었나요?
한상웅
선배가 단서를 던져줘서 이루어졌어요. 아테나 신이 아니라면, 이 인물이 왜 미칠 것 같냐고 제가 질문을 던졌거든요.
김태근
그래서 마약을 하는 게 어떻겠냐는 의견을 냈어요. 등장인물들이 일종의 업클래스의 사람들, 어쩌면 은밀한 공간에서 마약파티 같은 것을 즐기는 사람들이 아닐까. 그래서 파티장으로 콘셉트를 잡게 된 거였어요.
한상웅
이런 식으로 각색 과정, 무대의 설정 과정에서 배우 분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처음 무대는 굉장히 어둡고 건조했어요. 그런데 어느 날 관객의 입장에서 작품을 보니까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첫 장면에 대해 배우분들에게 조언을 구했죠.
김태근
저는 우선 연출의 의도가 있으니까 그 의도에 맞춰서 소화를 하는데 초점을 두고 연기를 해요. 그런데 솔직히 대본을 보면 복싱이나 UFC할 때 양쪽으로 나눠서 프레스 컴퍼런스(press conference)하는 게 생각난다고 했더니 다들 좋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다른 배우들이 마이크를 가운데 갖다놓자, 아예 무구로 만드는 게 어떠냐. 이런 의견들을 내면서 나온 장면이에요.
김태희
정말 많은 사람들의 아이디어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장면이네요. 저는 시종일관 무대 중앙에 위치해있는 식탁이 마치 제단처럼 보여서 인상 깊었어요.
한상웅
수정된 대본을 읽자마자 떠올랐던 이미지였어요. 의도자체는 제단이 맞죠. 제본에 받쳐진 것이 있었어요. 그래서 식탁이 보통 식탁보다 높아요. 테크메사가 여왕으로서 연설하고 이야기를 할 때는 윗부분을 쓰고 자기 얘기를 할 때는 아래 공간을 사용해요. 코러스장 같은 경우에도 주로 식탁 아래 동선을 구현해요. 그런 식으로 공간을 구성하고 있어요.

한상웅 연출가

찌질하게, 우스꽝스럽게

김태희
연기를 할 때 가장 고민되었던 건 뭘까요?
김태근
아마 많은 배우들이 비슷했을 텐데요. 어떻게 하면 좀 더 찌질하고 우스꽝스럽게 보일 수 있지, 우리의 모든 고민이 거기 있었어요.
한상웅
윗사람들의 찌질함, 그것을 넘어서서 인간으로서의 찌질함이 포커스였으니까요. 마지막 코러스장의 대사가 그런 거잖아요. 자기가 직접 경험하고 보기 전까지는 그것이 뭔지 알 수 없다고요. 어떤 메시지를 강요하기보다 편하게 보다가 자연스럽게 으이구, 하길 바랐던 것 같아요. 테크메사와 아이아스가 격렬하게 싸우는 장면도 사실 막장드라마 같잖아요. 그런데 그리스비극이라고 해서 괜히 무게 잡고 싶지는 않았어요. 우리 실제로 안 그러잖아요. 머리 쥐어뜯고 싸우고 이런 사람들도 있고. 그런 게 좋았어요.
김태희
그럼 아이아스 역할을 할 때 어려웠던 부분은요?
김태근
엄청난 살생 후 제 정신이 돌아오고 나서 아이아스가 자기가 저지른 일들을 보고 살아야되, 죽어야되 이걸 가지고 아내와 논쟁을 하잖아요. 사실은 자신이 저지른 상황을 못 이기는 건데 그게 대사로만 보면 굉장한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해요. 근데 이 타당성이 있는 상황과 말을 가지고 어떻게 하면 인간의 찌질함과 우스꽝스러움을 보여줄 수 있을까. 그 부분이 제일 어렵더라고요.
김태희
다른 인물들의 대사는 많이 잘라낸 것에 비해 아이아스는 유난히 대사가 길었어요. 그리고 이 안에서 감정이 많이 변하기도 하고요.
김태근
아이아스는 파더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인물이기도 해요. 결국 아버지한테 받은 걸 고스란히 되물림하는 가부장제 사회에 살고 있잖아요. 아버지를 생각할 때의 공포 정도를 조미료처럼 가하고 있는데 아직 어려워요.
한상웅
미안하지만 고마운 부분이었어요. 애초의 의도가 언어는 고전 그대로 가고 다른 것들을 현대로 가져옴으로써 고전과 현대가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던 거거든요. 이 시적인 대사가 너무 좋으니 살려줬으면 좋겠다고 했을 때 단어 선택도 잘 해주셨고 대사를 잘 소화해주셨죠.

이 작품의 연출을 맡은 연출가 한상웅은 단어에 예민한 감각을 가졌다. 덕분에 그는 그리스 비극이 가지고 있는 힘이 시적이고 아름다운 대사에서 나오는 통찰력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원작 <아이아스>에서 <아이, 아이, 아이>로 각색되는 과정에서 원전의 언어들은 섬세하게 다루어졌다. 신들이 후경화된 세계, 인간의 욕망만이 그들을 추동하고 비극을 불러오는 세계에서 관객들은 오늘날의 우리를 만난다. 그러나 이 만남이 찰나적인 조우에 그치지 않는 이유는 결국 원전의 언어들이 곳곳에서 이 작품을 지탱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