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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다리움직임연구소 <카프카의 소송>

‘법 앞에서’ 우리는 모두 유죄?

한현주_극작가
112호 2017.03.23
카프카의 장편 소설 『소송』이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 제작된 예로는 극단 ‘실험극장’의 <심판>(오랫동안 소설 자체가 이 제목으로 출판되었음)이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대문호인 앙드레 지드와 배우이자 연출가인 장 루이 바로가 공동으로 각색한 희곡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1974년에 초연된 후 여러 차례 재연되었다. 필자는 안타깝게도 ...

카프카의 장편 소설 『소송』이 우리나라에서 연극으로 제작된 예로는 극단 ‘실험극장’의 <심판>(오랫동안 소설 자체가 이 제목으로 출판되었음)이 있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대문호인 앙드레 지드와 배우이자 연출가인 장 루이 바로가 공동으로 각색한 희곡을 바탕으로 한 것으로, 1974년에 초연된 후 여러 차례 재연되었다. 필자는 안타깝게도 이외에 다른 작품을 알지 못한다. 이는 원작 소설이 무대화하기가 쉽지 않은 작품이라는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생일 날 주인공 '요제프 K'는 느닷없이 나타난 사내들에게 체포된다. 명확한 이유도 모른 채. 소송에 임하기 위해 애쓰지만 결국 1년 후, 그는 처형당한다. 카프카는 이 소설의 처음과 끝부분을 써놓고 나서, 다소 느슨하게 에피소드식으로 중간 부분을 써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여러 인물들을 만나기 위해 찾아가는 공간들은 느닷없이 연결되어 그로테스크하기까지 하다. 극단 ‘사다리움직임연구소’는 이 같은 소설의 난해한 지점들에 움직임으로 살을 붙인다. 그리고 의자와 책상을 활용하여 공간과 인물의 상징성을 부각시킨다. 도저히 들어갈 수 없는 법 안에 선 ‘K’처럼, 묵직한 원작 앞에 서서 수없이 다른 방법으로 문을 두드렸을 창작자들을 만나보았다. 임도완 연출, ‘K’역의 이호철 배우, ‘레니’ 역의 노은정 배우의 얘기를 들어본다.

작품의 설계 과정

임도완 연출가

한현주
이 소설을 선택한 이유가 궁금해요.
임도완
우리 극단은 작품을 택할 때 함께 의견을 내요. 당시에 고골의 『검찰관』과 『소송』이 후보에 올랐죠. 기본적으로 사회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던 겁니다. 근데 아무래도 『검찰관』은 작품이 너무 루틴하게 진행되는 것 같았어요. 무엇보다 우리 극단의 가장 큰 특색인 움직임을 잘 드러내기에는 『소송』이 더 적합하다고 판단했죠. 원작의 중첩된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구요.
한현주
구성 작업도 배우분들과 함께 하시나요?
임도완
네. 당연히요. 배우들이 뽑아놓은 신에서 대사를 추려서 쓰죠. 공동연출을 맡은 이수연씨와 함께 그 작업을 해요. 때로는 원작에 없는 대사도 만들죠.
한현주
움직임을 만들기 위한 과정을 좀 전해주세요.
임도완
작품의 주제와 관련해서 한 사람을 궤멸시켜가는 폭력의 동사들을 우선 나열해보죠. ‘친다’, ‘박치기 한다’ 등등. 그러면 배우들이 그 동사들을 다양한 움직임의 표현으로 시도하죠. 연출은 선택의 역할을 하구요. 이후에 음악이 정해지면 움직임과 음악을 섞어서 발전시켜가죠. 이렇게 말하면 굉장히 쉬운 과정 같지만 참 지난해요. 움직임의 질감과 의미를 잡아가고, 또 그 움직임을 언제 어떻게 사용하느냐를 끊임없이 시도해봐야 하니까요. 배우들의 몫이 클 수밖에 없죠.

극단은 일종의 강령을 통해, 배우는 ‘건축적 연극 형태를 세우는 공간으로서의 무대’를 창조해나가는 자임을 강조한다. 이번 작품에도 이러한 바가 잘 드러난다. 오브제와 배우의 움직임으로 공간을 창조하고, 궁지에 몰려가는 주인공의 심리를 모든 배우들이 입체적으로 표현한다.

‘레니’와 ‘K’ 되기

노은정 배우

한현주
원작의 인물들을 어떻게 수용하고 변화시켰는지가 궁금한데요. 특히 원작의 여성들을 보면, 각기 다른 공간과 상황에 놓여 있는 인물들인데도 비슷하게 그려지고 있잖아요. 적극성의 차이는 있지만 남자들을 유혹하거나, 쉽게 자신을 내어주는 모습으로 말이죠. 궁극적으로는 본질을 흐리게 만드는 존재들이죠. 그런데 공연에서는 이 인물들을 변호사의 하녀인 ‘레니’로 통칭해서 그려내고 있는데요.
노은정
연습 초반에는 각각의 인물들을 캐스팅해서 진행했어요. 저 말고 두 명의 배우가 각각 역할을 맡아했죠.
임도완
그런데 연습을 하다보니까 뭔가 자꾸 겹치는 느낌이 들어서 개별적인 인물들이 불필요하다고 판단이 된 거죠. 결국 장면 자체도 삭제가 됐어요.
노은정
대표적인 캐릭터로 ‘레니’를 잡으면서, 강렬한 여성성을 담아 주인공의 파국을 이끌어내는 인물로 만들어간 겁니다. 본격적인 연습에 들어가기 전에 두 달 동안 세미나를 했었는데요. 7가지의 번역본을 읽으면서 ‘K’가 거쳐 가는 과정을 따라서 경험해보려고 노력했어요. 그러고 나니까 주인공의 경험이, 인간이라면 누구나 겪는 삶의 과정이라는 생각이 들더군요.

‘K'의 변호를 맡은 변호사는 이렇게 말한다. ‘피고인들은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사람들’이라고. 그런데 그들을 매력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들의 죄 때문만이 아니라 소송, 즉 그들에게 제기되어 계속 따라다니는, 그래서 도저히 벗어날 수 없는 소송’때문이라고. (원작과 공연에서의 대사는 차이가 있음) 그러니까 인간이 지닌 원죄뿐만 아니라, 그 죄의 굴레에서 쉬이 벗어날 수 없게 만드는 구조까지 포함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노은정
저는 진심으로 피고인들이 매력적이고 아름답다고 생각하면서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그래서 진심을 다해 “다음에는 꼭 자백을 해”라고 말하죠. 그래야 그의 몰락에 관극의 초점이 맞춰질 테니까요.
한현주
‘K’의 캐릭터 작업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이호철 배우

이호철
우리 극단은 보통 내부 오디션을 하는데요. 이번에는 "‘요제프 K' 누가 할래?", 하고 연출님이 말하자 한 선배가 "호철이 추천합니다", 라고 하면서 결정된 거죠. (웃음) 저 스스로도 하고 싶은 생각이 있었어요. 근데 막상 인물에 접근하려니 쉽지가 않았죠. 소설의 이미지만으로는 연기할 수 없다고 생각했어요. 무슨 죄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계속 소송에 끌려가야 하니까, 어디론가 나가고 싶고 벗어나고 싶다는 인물의 심리가 크게 느껴졌어요. 초연 때는 잘 몰랐는데 공연을 거듭하다보니까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극 속에 나오는 여러 피고인들 중의 한 명일뿐인 ’K'가 되어가는 것이 맞지 않을까 하고... 실제로 연기하면서 그렇게 느껴지기도 했구요. 무엇보다 관객 분들이 제가 보고 있는 환상을 같이 보고 경험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으로 무대에 섰죠. 제가 보는 재판관과 제가 보는 법정을 함께 보셨기를...

작품의 시작과 끝

한현주
원작에서 중요한 에피소드로 나올 뿐만 아니라, 나중에 작가가 단편으로 따로 출판하기도 했죠. 「법 앞에서」 말인데요. 주인공은 법 안으로 들어가려고 애쓰면서 동시에 그를 돕겠다고 하는 사람들이 속한 공간에서는 계속 답답해하면서 출구를 찾잖아요.
임도완
네. 끊임없는 입구와 출구 찾기죠. 음... 국정원이 서울시 공무원을 간첩으로 엮은 사건이 있었잖아요. 이러한 사건은 권력과 이데올로기로 한 인간을 몰아세우는 거죠. 하지만 이 작품은 보다 보편적인 실존에 대한 질문이에요. 어쩌면 이건 내가 나에게 거는 소송인 겁니다. 관객들은 다소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많이 설명해주지 않는 불친절함을 낯설어할 수 있죠. 하지만 관객이 우리 공연을 보고 나서 뭔가 찜찜해하고, 머리를 한 대 맞은 것 같은 느낌이었으면 좋겠어요.
한현주
작품의 첫 장면을 「법 앞에서」를 읽는 것으로 구성하셨어요.
임도완
당연히 그렇게 되더라구요. 작품의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니까요. 나중에 오손 웰즈가 만든 영화를 보니깐 역시나 첫 장면이 그것이더군요. 주인공이 법 앞에서 끊임없이 겪는 폭력적인 상황을 잘 전달하기 위해 작년 공연에서는 형광등을 조명으로 쓰기도 했는데, 이번에는 소극장의 여건상 시도를 접어야했죠.
한현주
주인공이 처형당하러 끌려가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경쾌한 리듬으로 풀어내셨잖아요.
임도완
저한테는 끌고 가고 끌려가는 원작의 상황이 희극적으로 보였어요. 모두가 광대 같았죠. 그래서 원작에서는 작품의 시작과 마찬가지로 두 사람이 주인공을 끌고 가지만, 우리 작품에서는 주인공이 모든 인물들을 거치게 만들어서 그들 모두가 주인공을 데리고 가는 것으로 설정한 겁니다. 이런 식의 희화화를 통해 실존에 대한 질문을 더 적극적으로 담아내고 싶었던 거죠.

카프카는 자신의 잠언집을 통해 “우리의 책임과는 상관없이 인간이 처해 있는 상태가 유죄”라고 했다. 그러니까 ‘K’가 겪고 있는 소송은 인간 실존에 대한 하나의 비유인 셈이다. 결국 실패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스스로를 변호하기 위해 끝까지 시도할 수밖에 없는 것이 삶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