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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에이티브 VaQi <워킹 홀리데이>

어느 산책자들의 발걸음을 뒤따르며

김태희_연극평론가
128호 2017.11.23
올바른 자세로 걷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한다. 먼저 적당한 거리에 시선을 두고 턱은 살짝 당긴 채 어깨와 허리를 비롯한 전신을 꼿꼿이 세워야 한다. 이 때 두 발은 교차되도록 번갈아 내딛으면서 팔을 적당한 각도로 흔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신에 약간의 긴장을 주되 이 모든 것이 리드믹컬하게 움직이는 상태, 그것이 이상적인 ...

올바른 자세로 걷기 위해서는 생각보다 많은 것들에 신경을 써야 한다. 먼저 적당한 거리에 시선을 두고 턱은 살짝 당긴 채 어깨와 허리를 비롯한 전신을 꼿꼿이 세워야 한다. 이 때 두 발은 교차되도록 번갈아 내딛으면서 팔을 적당한 각도로 흔들어 주는 것이 중요하다. 전신에 약간의 긴장을 주되 이 모든 것이 리드믹컬하게 움직이는 상태, 그것이 이상적인 걷기다. 물론 이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 쉽지 않기 때문에 처음에는 온 신경이 걷는 동작에 집중되지만, 차츰 동작이 익숙해지면 주변의 것들이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가게의 간판, 지나가는 자동차, 움직이는 사람들, 급기야 거리의 모든 풍경이 내 안으로 들어온다. 이렇듯 걷기는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를 통틀어 가장 역설적이다. 그것은 가장 부단한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가장 여유로운 사색의 시간을 제공한다.
크리에이티브 바키(VaQi)가 주목한 것도 바로 이 ‘걷기’다. 그들은 지난 봄, 여름, 가을 무려 세 계절에 걸쳐 남과 북을 가르는 경계를 따라 걸었다. 처음에는 무턱대고 시작된 걸음이었지만 발걸음이 쌓이면서 그들은 스스로 변해가고 있음을 느꼈다. 내 앞을 걷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고 나를 구성하고 있는 정체성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었다. 그 사이 분단국가의 국민이라는 새삼스러운 사실의 확인이 있었고 더 새삼스럽게 변하지 않은 것들을 목격하기도 했다. <워킹 홀리데이>는 바로 이 여정 속에서 그들이 보고 느꼈던 것들에 대한, 아주 사적이면서도 울림이 있는 보고다.

근원의 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김태희
작품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좀 듣고 싶어요. 파주에서 고성까지 약 300KM를 걷는 엄청난 기획이잖아요. 어떻게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시작하게 되신 건가요?
나경민
작년부터 세월호 이후에 어떤 문제를 다룰 것인지 고민을 하게 된 것 같아요. 그러다가 자연스럽게 지금 우리 사회가 갖고 있는 여러 문제들이 역사적 맥락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그 근원적인 문제들을 다뤄보면 어떨까, 이렇게 분단 문제로 의견이 좁혀진 거죠. 팀 내에 전쟁을 체험해본 사람이 없다보니 분단을 체험하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DMZ를 따라 걷게 된 것 같아요.
김신록
저는 바키 작업은 이번이 처음이었어요. 전화로 연출님이 저를 섭외할 때 기획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셨거든요. 그때 제가 왜 하필 DMZ인지 물어봤더니 작년에 사회적으로 너무 많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현안을 대응하기가 너무 지치더라는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그래서 이 모든 문제들이 왜 발생하지, 거슬러 올라가 봤더니 지금 한국사회의 문제가 분단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는 생각이 드셨다고 해요. 저도 일견 맞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참여하게 되었었죠.
성수연
선거 때 그런 걸 많이 느꼈는데요, 생각이 다르면 빨갱이라고 몰고 가는 상황들이 이상하게 느껴지는 순간이 있었어요. 또 마치 전쟁이 당장이라도 일어날 것처럼 겁을 주기도 하고요. 일각에서 세력 유지를 위해 분단을 이용한다는 느낌을 받고 나니까 결국 우리는 분단이라는 카테고리에 갇혀서 다음 걸음을 나아가지 못하고 있구나, 조금 더 발전된 논의로 나아갈 여지가 없구나, 그런 갑갑함이 생겼어요. 그러다보니 처음에 분단에 대해 다뤄보자는 기획이 나왔을 때 매우 반가웠죠. 그리고 일단 걸으면서 시작하자는 것도 좋았어요. 여행 갔을 때 차타고 가면서 본 건 기억이 잘 안나는데 걸으면서 본 것들이 더 기억에 남고 그래서 걸으면서 체험한다는 건 굉장히 좋은 시작이 아닐까 싶었어요.
김태희
요즘에 해방이랄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작품들이 많은 것 같아요. 마치 약속이나 한 듯이요. 그런 걸 보면 다들 아마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장성익
분단이라는 것이 어쩌면 냉철하게 봐야할 문제이기도 하지만 또 그것 때문에 지금의 문제들이 소홀히 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시대는 그 당시의 이념들이 중요한 시기가 아니잖아요. 민족이니 공산주의니. 오히려 이주 노동자들이 수십만이 와있는, 그야말로 세계시민으로 만나야 할 시기에 계속 민족, 이념 타령이나 하는 것도 조금 문제가 있다고 봐요. 오히려 국제사회 질서 속에서 신자유주의 문제들을 다루듯이, 그 시각으로 우리의 분단과 민족을 바라봐야 하지 않나 싶어요. 그래서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한민족의 역사니 한국 전쟁이니 그런 식으로 이야기해버리면 재미 없는 것 같아요.

분단의 감각, 경계가 규정하는 공간들

김태희
차를 타고 걸을 때와 걸어가면서 볼 때가 다르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저도 동의해요. 확실히 걸어가면서 볼 때 다른 시야가 생기는 것 같아요.
나경민
저희가 걸었던 길은 자연 풍광이 굉장히 좋았거든요. 그런데 자세히 보면, 그 속에 살상용 무기나 탐지용 군사시설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어요.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을 정도로 정밀하게요. 처음에는 그런 걸 찾으면서 되게 재밌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묘한 답답함이 생기더라고요. 그 길을 걷지 않으면 알 수 없었을 감정인 것 같아요.
김태희
극 중 범진 배우님이 강 건너가는 장면 있었잖아요. 그 앞에 내용이 목함지뢰가 강 바닥 밑에 아직도 많다고 그랬는데 진짜 지뢰가 있는 곳을 지나가신 거예요?
나경민
범진이는 모르고 건넜어요. 범진이가 즐거워하면서 한참 건너는 중에 목함지뢰 유실 지역이니까 건너지 말라는 표지판을 뒤늦게 본거에요. 그리고 나서 저희는 다리를 건너서 범진이를 만나러 가는데 계속 섬뜩하더라고요. 만약에 사고라도 났으면 어쩔 뻔했어요. 그 때 찍힌 영상은 너무 즐거워 보이지만 그 후에 저희에게 남은 감각은 사실 끔찍함, 섬뜩함이죠.
성수연
더 섬뜩한 건 그리고 나서 돌아올 때쯤에 민간인이 지뢰를 밟았다는 사고 기사가 났어요. 그게 우리일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김신록
그 장면에서는 그런 지점도 있었어요. 그 때 범진이가 강을 건너갈 때 중간까지 갔다가 한 번 포기하고 돌아왔다가 다시 건넜어요. 사람들이 가지말라니까 “다리가 코앞인데, 한걸음 남았는데” 그러면서 돌아왔거든요. 순간 실향민도 저랬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한 걸음 차이로 누구는 저편에 가 있고 누구는 여기 와있고 그렇게 서로 바라만 보고 있고. 그런 마음으로 만든 장면이기도 해요.
우범진
다들 가보기 전에는 지뢰를 밟으면 어떡하나, 안전할까 그런 것들을 걱정했어요. 그런데 막상 가서 걸어보니까 눈에 들어오는 건 논밭이고 또 우리는 일상적인 차도를 따라 걷게 됐어요. 그러다보니 불과 며칠 사이에 그런 위험에 대한 걱정들이 사라졌던 것 같아요. 분단이라는 문제도 그렇게 내재되어 있는 것 같아요. 불현 듯 기사 하나, 사고 하나에 갑자기 우리 일이 되고 근데 또 금방 잊어버리고요.
김신록
철원에서 화천 넘어갈 때 그 경계를 통과하는 길이 일차로인 거예요. 양쪽 일차로가 아니라 차도 하나에요. 이상하다 싶었는데 경민이가 그러더라고요. 탱크를 막기 위해서 그렇게 만들어 놓은 거라고요. 일차선으로 좁게 만들어 놓으면, 이 길만 막으면 도시로 못 넘어오니까요. 그러니까 원래 살고 있는 공간에 분단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 그 도시 자체가 사실은 분단을 위해서 조성된 거예요.
김태희
제가 상계동에 오래 살았거든요. 그 동네는 자로 잰 듯 반듯하게 똑같이 생긴 아파트들이 엄청 늘어서 있어요. 그걸 보고 어렸을 때 누군가가 북한이 쳐들어오면 아파트를 부숴서 길을 막으려고 이렇게 만들었다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그게 생각이 나네요. (웃음)
장성익
전쟁나면 고속도로는 비행기 이착륙장으로 쓰이잖아요.
김태희
사실 아파트 이야기는 우스갯소리지만 고속도로의 경우에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행기 이착륙 표시가 되어 있기도 했었잖아요. 그런 걸 보면 우리 일상 속에 꽤 넓은 공간들이 분단 때문에 조성된 공간들이기도 하네요.

진공의 시간들, 현실성의 실각

김태희
저는 DMZ 세계평화공원 갔을 때 인상 깊었던 게 옛날 전망대 옆에 새로 세워지고 있는, 굉장히 화려한 새 전망대였어요. 이건 진짜 관광을 위한 거잖아요. 분단의 현장이 관광 상품이 될 수 있는 건지 순간 헷갈렸어요.
성수연
임진강 옆에도 평화랜드라는 놀이공원이 있어요. 그곳도 이상한 괴리감이 느껴져요.
신선우
그런 데 가면 기념품 가게가 꼭 있어요. 거기 상품들 중에 가장 충격적인 게 삼팔선이 그려져 있는 녹슨 철조망을 15센티 정도 잘라서 파는 거예요. 가격이 3만 원 정도인데 순간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동에서 서까지 철조망이 몇 백 킬로미터일 텐데, 그걸 잘라서 팔면 진짜 몇 억이 나오겠구나 그런 계산이 되더라고요. (웃음) 죄다 그냥 돈이에요. 태극기 하나 그려서 자석 붙여서 팔고 있고요.
김신록
처음 다녀왔을 때 분단이 산업이다, 통일이 브랜드다 이런 이야기를 많이 했어요. 희한하게 부동산이 되게 많았어요. 통일 부동산, 땅 끝 부동산 같은 상호로요.
김태희
한 쪽에서는 분단을 상품화하고 한쪽에서는 안보교육을 하고 있는 셈이네요.
신선우
그 집약체가 저희 공연에서는 안보극장이라고 부르는 장면인 것 같아요. 저희가 여정 중에 총 3번 정도 1인당 2,3만 원을 내고 안보관광을 했거든요. 제 3땅굴, 노동당사도 갔다가 민통선 안에서 밥도 한 끼 먹고 코스가 되게 재밌는데 계속되면 될수록 허무함이 많아지더라고요. 땅굴이라고 들어가도 아무것도 없고 설명해주는 분의 타성적인 목소리까지. 비현실적이라는 느낌이 컸던 것 같아요. 그 때의 감정을 구현해보고 싶어서 그 장면이 들어가게 되었죠.
나경민
저희가 DMZ 안보관광, 안보교육, 안보극장이라는 말을 혼용해서 써요. 실제로는 관광이지만 가면 교육을 받게 되고요, 교육 받을 때 교육관님이 우리가 서북청년단출신군부대다, 자랑스럽게 말해서 놀랐어요. 2017년인데 이 정도 수준 밖에 안되나 싶기도 했고요. 그런 안보 교육은 대부분 두 가지 레퍼토리로 요약이 돼요. 첫째 우리는 잘 싸울 준비 되어 있으니까 걱정마라, 둘째 저들은 진짜 무서우니까 우리가 경계심을 가져야한다. 그리고 그 멘트도 굉장히 끔찍해요.
장성익
저는 그런 안보교육, 관광은 민간인이 주도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공공기관에서 하기 때문에 민중의 시각에서 바라보는 전쟁의 참상은 빠져있고요. 평화를 위한 발돋움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게 아니라 구식 반공교육을 해요. 돈 받아가면서요. 그래서 시민단체라든가 지자체에서 새로운 투어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성수연
확실히 통일을 바라는 시각의 교육은 아니었어요. 예를 들면 ‘북괴군의 가슴에 총칼을 박자, 박자’ 이런 구호를 외치는 사람들이 우리를 지켜주고 있다고 알려주는 관광이 어떻게 통일을 위한 거라고 볼 수 있겠어요. 어쩌면 아무도 통일을 바라고 있지 않다는 느낌도 들었어요. 백골부대 홍보영상에서 등장하는 군인들 중에 누가 서북청년단 출신인 게 자랑스럽고 진심으로 북괴의 가슴에 총칼을 겨누고 싶겠어요? 그건 다 내레이션이고 액션일 뿐인 거예요. 심지어 땅굴의 끝에 가서 가이드 분이 이 벽 뒤는 DMZ 북한 구역이어서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얘기했을 때, 저는 조금만 더 열차를 타고 들어가면 놀이기구처럼 피에로가 튀어나올 것 같은 느낌도 들었어요. 그 정도로 비현실적이었어요.
김태희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의 집약체가 안보관광이었군요.
나경민
그런 경험을 하고 나니 공연 막판에는 평화가 무엇인지 고민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각자가 평화가 무엇인지 적어봤는데 아주 사소한 이미지들이었어요. 어떤 때 누구와 함께 있을 때, 이런 거였거든요. 한번은 파주 평화 도서관에 갔더니 평화의 책이라고 어린이들에게 읽어주는 책이 있었어요. 완전 어린 아이들을 위한 동화에요. 그런데 그 책에서 평화는 어떤 느낌이나 사소한 이미지가 아니라 동사더라고요. 실천하는 거, 예를 들면 친구에게 뭘 주는 거야, 하는 거야 처럼요. 실천하는 행동을 하는 거더라고요. 그게 인상 깊었지만 공연에 가지고 오기엔 결론을 모아서 이야기하는 것 같아서 좀 덜어내기도 했어요.

작을수록 커지는

김태희
무대도 인상 깊었어요. 객석을 길이 둘러싸고 있고 배우님들이 시종일관 그 길을 걸어 다니시죠. 무엇보다 무대 중앙에 있는 모래판이 좋았어요. 그 모래판을 이용해서 우리 국토를 연출하시기도 하고 전쟁, 분단, 지뢰의 유실 등 다양한 내용들을 표현하시잖아요. 정말 기발하다는 감탄을 하면서 봤던 것 같아요. 모래와 미니어처 소품들로 장면을 만드는 아이디어는 어떻게 나오게 된 거에요?
김신록
공연 2주 전 쯤 성익 선배가 툭 던진 말이 가시화된 거였어요.
나경민
민간인이 들어갈 수 있는 안보관광 코스에 가보면 구조가 다 비슷한데요. 커튼을 걷으면 북녘 땅이 펼쳐지고 지형지물에 대한 설명은 미니어처 판으로 해요. 버튼 누르면 국방한계선 보이고 또 다른 버튼을 누르면 초소에 불이 들어오는 식이죠. 그것도 사실 땅 자체를 미니어처로 설명하는 셈이죠. 보다 직접적인 계기는, 워크숍 발표를 할 때 한 번은 흙을 가지고 와서 발표를 한 적이 있었어요. 그 때 성익 선배님이 마지막에 구조를 탄탄히 만드는 과정에서 “흙도 들어오고 무대가 전쟁터가 되는 거야” 그랬는데 실현되어 버렸죠. (웃음)
신선우
그 전에 극을 지배하는 힘은 걷기였어요. 배우들 전부 멈추지 않고 계속 걸었어요. 한 명의 배우가 뭘 하면 나머지는 무대에서 모두 걷고 있는 식이었죠.
나경민
구조나 형식 측면에서 제일 많이 고민했던 게 관객 분들을 어떻게 배치해야 우리의 걷기가 관객들과 분리되지 않고 함께 체험할 수 있을까였어요. 덕분에 무대 디자이너 분이 힘들었죠. 객석을 양면으로 배치했다가, 원형으로도 했다가 지하철처럼 앉았다가 계속 바뀌었어요. 배우들이 걷는 건 늘 똑같았지만요. 형식 실험을 엄청 많이 했던 것 같아요.
김태희
말씀하신 것처럼 배우들이 걷는 모습을 보면서 ‘걷기’ 자체에 대해 많이 생각했던 것 같아요. 발자국 소리의 종류에 따라, 크기에 따라 참 다양한 걷기가 있구나 싶었어요. 하지만 애초의 형식처럼 오롯이 걷기만이 극을 지배하는 힘이었다면 역시 부족했을 것 같아요. 성익 배우님, “흙도 들어오고 전쟁터여야 해”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있었을까요?
장성익
생각을 해보면, 여러 가지 형식을 실험하다가 원형으로 모여 앉아서 작게 장면을 만들어봤을 때가 제일 좋더라고요. 넓은 땅을 걸어왔는데 이걸 넓게 표현하면 잘 안보인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무대 위에서 탁자는 건너가는 게 표현이 되는데, 넓은 땅, 강을 건너가는 건 잘 표현이 안되는 것 같았어요. 그냥 무대를 걷고 있는 느낌 밖에는 전달이 안되는 것 같더라고요. 그리고 경민이 말처럼 안보관광 중에 곳곳에서 미니어처들이 있었던 걸 보았기 때문에 그것하고도 연결이 되는 것 같더라고요. 작으면 작을수록 커진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김태희
발상자체가 정말 재밌었던 것 같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엄청난 여정이고, 거대한 부피의 경험인건데 오히려 작게 표현 되었을 때 더 체감이 되는 부분이 있어서 참 좋았어요.
성수연
모래를 이용해서 여러 땅을 보여줄 수 있어서 좋았던 것 같아요. 우리가 걸었던 땅이 되기도 하고 총이 놓이면 갈라진 땅, 전쟁터가 되기도 하고요. 우리가 여행 중에 본 것들을 그 땅에 다 담아 놓은 것 같아요.
나경민
연출님은 놀이터라고 부르고, 어떤 관객은 텃밭이라고 표현하시기도 하더라고요.
성수연
군인도 하필 다 초록색이어서 식물을 심어 놓은 것 같기도 하네요. (웃음)

파주에서 화천을 지나 고성에 이르는 동안 이들은 국토의 경계를 목격했고 그 경계를 둘러싼 과거의 잔여물들을 체감했다. 경계가 구축한 공간들은 하나같이 시간이 멈춰버린, 텅 빈 진공의 공간들이었다. 최초의 의심처럼 분단이 정말 근본적인 문제였던 것일까? 사실 아직은 뭔가를 뚜렷이 말할 수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그 경계를 걸어보기 전과 후는 다르다는 점이다. 이제 이들의 발걸음은 어디로 향할 것인가. 모니터 속 가보지 않은 땅을 향해 발을 내딛는 마지막 장면이 인상 깊다. 이들의 발걸음이 어디로 향하든, 그곳은 분명 지금과는 다른 우리를 발견하는 길이 아닐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