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노마드 <보이체크 신드롬>
아름답지만은 않은 자화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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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의 시작과 함께 ‘보이체크’는 무대 위에 쌓인 엄청난 양의 박스들을 바삐 옮기기 시작한다.박스들이 하나 둘 사라지며 드러난 무대의 이면에서는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양복을 입은 회사원,콜센터 상담원이 메트로놈 소리에 맞춰 바삐 몸을 움직인다.자칫 긴장의 끈을 놓아버리면 ‘박자’를 놓치게 되는 이 무대. 이 와중에 국회의원은 ‘천천히’와 여유를 또 인간적인 도덕을 강조하고, 박사는 이 ‘박자’에 효율적으로 맞추는 새로운 인간상을 꿈꾸며 온갖 영양소들로(만) 이루어진 ‘사료’를 개발한다. 뒤틀리고 어그러진 박스들이 켜켜이 쌓인 듯 어딘가 들어맞지 않고 불안한 세계, 하지만 이 뒤틀림이 지극히도 현실과 닮아있어 마음 한 켠이 묵직해지는 작품 <보이체크 신드롬>, 극단 노마드를 만났다.

- 송이원
- 2017년 ‘권리장전 국가본색’ 페스티벌의 마지막 주자로 공연을 올리며 한 해를 마무리하셨어요. <보이체크 신드롬> 작품을 통해 대한민국이란 국가의 어떤 면을 다루고 싶으셨는지 궁금합니다.
- 김민경
- 정말 어려운 질문이네요. 국가라는 걸 어떻게 짧은 말로 규정하겠어요. 저희는 일단 <보이체크 신드롬>이라는 작품을 통해 이 사회의 시스템에 대해 이야기해보고 싶었어요. ‘보이체크’란 인물이 파국으로 치닫는 결말에 대해 이게 과연 개인의 문제인지, 어쩌면 그가 처한 환경 또 그를 괴롭히는 그 ‘위’의 존재들이 문제가 아닌지 질문을 던져보고 싶었죠. 그래서 이 시스템의 유지와 존속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 ‘보이체크’와 세 명의 乙들을 배치하였고, 이 乙의 존재들을 짓누르는 시스템으로서의 甲을 국회의원과 박사라는 인물들로 표현해 보았어요.또 乙의 위치에서 다시금 상대적으로 甲의 위치에 처하게 되는 사회적인 관계들을 통해 끊임없이 부리고 부려지는, 소비하고 소비되는, 또 그렇게 서로가 소모되곤 하는 사회의 망을 보여주고자 노력하였어요.
- 송이원
- 시스템에 대해 다양한 차원으로부터 접근을 할 수 있을 텐데, 시스템을 촘촘하게 이루고 있는 노동자들, 즉 乙들의 이야기를 통해 이 주제에 접근했다는 점이 인상적이에요.
- 구자환
- 원작 <보이체크>는 군대가 배경이고 군대라는 공간은 철저히 선임과 부대라는 ‘위를 위해 일을 하는 곳이기 때문에 그 강제성이 눈에 잘 보이는 것 같아요. 그런데 군대뿐만 아니라 이 사회에도 그 강제성은 만연하거든요. 실상 자신을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잘 없잖아요. 막상 눈앞에서 일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지만 모든 분위기가 그렇게 조성되어 있는 것 같아요. 그러니까 먹고 살기 위해, 살아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죠.

乙들의 시간
- 송이원
- 원작에서는 ‘보이체크’가 이발사로 등장했는데, <보이체크 신드롬>에서는 택배기사로 각색을 하셨어요.
- 김민경
- ‘보이체크’의 직업군에 대해 많이 고민을 했는데, 택배기사라는 직업이 누구에게나 乙이 되는 입장이더라고요. 사실 작품에 등장하는 다른 乙들은 택배를 시키는 순간 甲이 될 수가 있거든요. 요즘은 택배가 오고 가지 않으면 소비라는 게 거의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다 보니 그 소비의 축에 언제나 끼어 있을 수밖에 없는 택배기사라는 직업군으로 결정하게 되었어요. 그리고 박스라는 것이 자본주의를 나타내는 상징물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했고요.
- 송이원
- ‘보이체크’ 역의 이상은 배우님께서는 박스를 되게 많이 옮기셨는데 그 박스에서 모두 다른 무게감이 느껴졌다는 리뷰가 있었어요. 특별히 신경 쓰신 부분이었나요?
- 이상은
- 사실 그 무게를 다 다르게 보여줘야겠다는 생각을 한 건 아니었어요. 택배기사님들이 어떻게 물건을 옮길까 고민하고 풀어갈 땐, 일단 짧은 시간 안에 빨리 옮겨야 하잖아요. 작품에서도 최대 2분이라는 시간 제한을 두기도 했고요. 그래서 바쁜 와중에 박스가 떨어지지 않게 턱으로 받쳐서 옮기려고 한 부분이라든가, 어깨에 메고 다닌다든가, 배에 걸쳐서 고정을 시킨다든가, 몸의 여러 부위를 함께 활용하여 박스를 옮기려고 많이 시도해봤어요.
- 송이원
- 그리고 택배기사 외에도 이 사회의 다양한 乙들을 작품 내에 배치하셨는데 각각의 캐릭터는 어떻게 구상하셨고 어떻게 접근을 하셨을지도 궁금해요.
- 김민경
- 乙을 대변할 수 있는 직업군이 무엇이 있을까 배우들과 많이 대화를 나누었어요. 그렇게 만년 대리 ‘곽대리’, 공무원을 꿈꾸지만 계속 아르바이트로 돈을 벌 수밖에 없는 ‘공시생’, 그리고 감정노동의 현장 한 가운데 있는 텔레마케터 ‘조옥허’라는 인물들을 배치하게 되었죠. 사실 ‘보이체크’의 와이프 ‘마리’도 처음에는 육아 스트레스에 힘겨워하는 乙로 배치를 하였는데, 이야기를 구성하다 보니 마리가 워낙 ‘보이체크’와 맞닿아 있어서 분리를 시킬 수밖에 없었어요.
- 김수민
- 제가 사실 사회의 여러 현상들에 그렇게 익숙한 사람은 아니에요. 그래서 이 작품을 하면서는 텔레마케터 관련 기사를 많이 찾아봤어요. 감정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상담원들에 대한 기사가 정말 많더라고요. 실적을 쌓아야 한다는 업무 스트레스부터 시작해서 고객들의 언어폭력까지, 그 사례들을 접하면서 연기에 많은 도움을 받은 것 같아요.
- 정성진
- 저 같은 경우는 여자친구가 노량진에 살아서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는 고시생들을 관찰할 기회가 많았어요. 또 노량진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들이 대부분 공무원 고시를 준비하는 분들이더라고요. 사실 저는 배우로서 워낙 다른 삶의 환경에 처한 사람이다 보니 시험에 합격해 안정적인 삶을 산다는 게 만족스러울까 하는 의문이 들곤 했었는데, 늘 단어장을 들고 다니고, 자료 복사에 드는 1분 1초를 아까워하는 모습들을 직접 접하며 그 절박함을 체감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 이정모
- 저는 여자친구가 다니는 회사에서 실제로 한 대리님이 일을 그만 두게 되었는데, 그 이야기로부터 많은 도움을 받았어요. 일도 열심히 하시고 시안도 잘 만드시는데, 아무리 노력해도 어쩐지 윗사람들의 마음에 안 들고 인정을 받지 못하는 거죠. 자신의 입장만 챙기는 상사들 사이에 끼어있는 만년 대리님이 결국 퇴사까지 하시게 되는 안타까운 현실을 들으며 그 상황들을 저의 연기와 맞붙이려는 시도를 해보았어요.
- 김민경
- 乙 역할의 배우들과는 템포와 리듬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나누고 고민했어요. 또 시계의 초침 소리 같기도 한 메트로놈 소리와 파블로프의 개를 연상시키는 콜벨이 장면의 템포나 리듬을 많이 잡고 가더라고요.
- 김수민
- 사실 저희 배우들은 乙의 입장을 많이 겪으며 사는 사람들은 아니잖아요. 그런데 그 메트로놈과 벨소리가 굉장히 억압적으로 다가와서 계속 제가 속박이 되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원래 리듬이 굉장히 느린 사람인데 콜센터 직원은 말을 빨리 할 수밖에 없어서 이 부분이 많이 힘들었는데, 메트로놈 소리가 워낙 리듬이 규정되어 있다 보니 乙의 상황을 표현하는 데 있어 도움을 많이 받았어요.
- 김민경
- 乙들의 장면을 만들 때는 연기의 방식에 대해 약간 충돌이 있기도 했어요. 배우들은 어떤 자극이 들어오고 이에 따라 감정이 촉발되어야 연기가 나오는 게 일반적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이번에 그 부분들을 많이 자제해주길 요구했어요. 작품이 사실주의적인 리듬이 아닌 인위적인 템포 안에서 움직이는 작품이니까요. 배우들은 움직일 수 없는데 움직여 달라고 하니 많이 힘들었을 것 같아요.
- 김수민
- 그런데 작업 과정 중에 변화를 느끼게 된 것 같아요. 감정에 따라 몸이 만들어지는 연기도 있지만 몸과 상황이 먼저 만들어지고 감정이 생겨나는 경우를 느꼈던 것 같아요.
- 송이원
- 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乙의 상황들을 만들어 주신 느낌이네요.
- 김민경
- 술자리에서 우스갯소리로 스타니슬랍스키를 많이 욕하기도 했어요. 사실주의적인 연기로는 비약되고 끊기는 호흡의 장면들을 표현하기가 참 힘들더라고요. 모든 것이 논리로 해결되는 것도 아니고요.
- 김수민
- 솔직히 배우 입장에선 이런 작업이 엄청 재미있게 다가오진 않아요.
(일동 웃음)

고전의 현대화
- 구자환
- 乙들의 경우는 몸의 어디는 속박되어 있고 어디는 연기를 하는 식으로 몸에 제약을 거는 식이었어요. 그런데 ‘보이체크’와 저(국회의원) 같은 경우는 사실주의적인 감정과 호흡을 주고받는 연기를 해야 하는데 대사가 원작에서 인용해온 것이 많아서 일상적이지 않은 말들이 많았어요.
- 이상은
- 맞아요. 乙들이 몸을 만들어내기가 힘들었다면 저는 말을 만들어내기가 쉽지 않았던 것 같아요. “이 세상은 지옥처럼 뜨겁지만 저에게는 얼음처럼 차갑군요. 얼음처럼” 이런 말들이 일상에서 쓰이진 않잖아요. 말이 지니고 있는 시성(詩性)을 관객들에게 어떻게 전달해야 할까, 말들이 어떻게 힘을 지닐 수 있을까 많이 고민하였어요.
- 김민경
- 저는 이게 고전을 현대화하는 작업의 묘미라고 생각해요. 200년 전에 쓰인 말이 오늘날 현대적으로 풀린 작품에 그대로 쓰였을 때 관객들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궁금하기도 했고요. 저에겐 크게 부대끼지 않았어요. 시적이고 철학적인 것이 지극히 현실과 맞닿아 있을 수도 있는 거니까요. 의원 대사에도 정말 말도 안 되는 대사들이 참 많은데 이걸 잘 풀어주었어요.
- 구자환
- 제가 평생 쓰지 않을 말들이었어요.
- 김민경
- 의원은 논리가 계속 비틀어지면서 말이 안 되는 말들을 계속 해야 했어요. 저는 이질적인 질감들이 부딪히는 지점들이 재밌더라고요. 그 충돌들을 가리거나 완화시키지 않고 그대로 관객들에게 드러내는 것들이요. 예를 들어 ‘보이체크’의 이름을 2017년의 한국사회라고 굳이 ‘김복책’으로 이름을 바꾼다고 해서 오늘날 한국사회에 더 맞닿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어떤 이질적임을 계속 보여주면서 이게 한 편의 극이라는 걸 숨기지 않는 게 저는 좋은 것 같아요.
- 송이원
- 짧은 호흡의 장면들이 각기 다른 정서를 담고 속도감 있게 연출되는데 그것들이 계속 쌓이고 쌓여서 설명할 수 없는 갑갑함을 안겨주는 기분이었어요.
- 이상은
- <보이체크> 원작도 그렇고 장면들이 전반적으로 감정선들이 많이 끊어져요. 연출이 새로운 장면은 새로운 감정선과 호흡으로 시작을 해야 한다고 많이 주문을 하였는데, 앞 장면의 여운이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넘어가야 하다 보니 그 지점들이 쉽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 김민경
- 작품이 워낙 하나의 스토리로 연결되는 게 아니고 단절되어 진행되다 보니 그 끊어짐과 단절을 오히려 분명히 해야겠다 싶더라고요.
- 송이원
- 중간중간 끊어지는 지점에선 텔레비전을 중요하게 사용하셨어요.
- 김민경
- 이번에 팝송을 많이 사용하였는데 그 가사와 분위기가 작품의 메시지와 맞닿는 부분들이 많았어요. 직관적으로 가사나 메시지가 들어오지는 않으니 그걸 전달해야겠단 생각에 사용하게 되었죠. 자막 형식으로 가사를 전달하기도 했고 장면과 장면 사이에 전하고 싶은 메시지들을 넣기도 하였고요. 관객에게 너무 정답을 알려주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반문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연출 입장에서는 정치극을 하며 국가본색이란 주제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없었어요. 그래서 스크린으로 메시지 전달에 주안점을 두었죠.

씁쓸한 자화상
- 송이원
- 특히 TV 프로 장면들도 그렇고, 작품이 중간중간 참으로 재치 있고 유쾌하면서도 오히려 그 우스움이 지극히도 현실이라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난감하더라고요. 작품에 직접 참여하신 여러분은 이 과정에서 어떤 걸 많이 느끼셨을지 궁금해요.
- 정성진
- 제게 가장 크게 다가온 건 이 현실이에요. 한없이 乙이기만 한 게 아니라 제가 어느 순간 甲이 되기도 하는 거니까요. 공연 장면 중에 ‘보이체크’와 무례하게 통화하는 장면에서 저 역시도 이런 모습을 가지고 있단 생각을 하게 됐어요. 잘 살아야겠다 싶더라고요. 작품을 계기로 자기반성과 성찰을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 이상은
- 연기를 너무 잘 했어요. 성진이는 잘 모르겠지만 저는 울음을 굉장히 많이 참았어요. 아무튼 제가 개인적으로 목표했던 지점 중의 하나는 잘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보통 그렇잖아요, 살면서 어떤 억압과 억울함을 맞닥뜨렸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살아보려고 하는 사람을 봤을 때 더 애잔하기도 하고요. 더 열심히 잘 살아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을 만들어 보고 싶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지점까지 도달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쉽기도 해요.
- 송이원
- 연출님의 경우 <보이체크 신드롬> 작품을 통해 꼭 달성하고 싶었던 목표가 있으셨나요? 예를 들어 현실을 보여주겠다, 질문을 던지겠다, 혹은 이 현실에 대해서 관객들과 함께 위로의 시간을 가지겠다 등 여러 가지가 있을 텐데 어떤 큰 목표로 이 작품에 접근하셨을지 궁금해요.
- 김민경
-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은 전혀 없었고, 우리가 처한 현실을 그저 펼쳐 놓아 보고 싶었어요. 희망적이지 않은 삶에 대해 희망을 이야기하는 것만큼 폭력적인 것도 없잖아요.현대 사회엔 더 이상 정답이란 개념도 없는 것 같고요. 살다 보면 乙이 甲이 되는 순간들이 있잖아요. 누군들 안 그러겠어요. 더 우위를 선점하려 하고 그 약간의 권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점에서 이 시스템 안에서 지지고 볶는 우리의 자화상을 그려보고 싶었어요.
이게 정말 삶이고 현실인 걸까? 그저 환상이 아닐까?
마치 산사태에 파묻히기라도 한 것처럼, 이 현실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어.
Queen, ‘Bohemian Rhapsody’ 가사 中
파국으로 치닫는 공연은 Queen의 Bohemian Rhapsody와 함께 끝이 나며 극장과 무대라는 공간이 더없이 ‘폐쇄적인’ 공간으로 느껴질 만큼 쉽게 해소되지 않는 답답함을 안겨주었다. 신드롬, 증후군이란 뜻을 지닌 단어로 공통적인 질환이나 증상을 통틀어 칭할 때 사용되거나 한 사회를 휩쓰는 현상을 설명할 때 사용된다. <보이체크 신드롬>에 등장한 인물들은 모두 그 시스템 속에서 고통 받는 인물이자 동시에 타인에게 고통을 주는 인물로 그려졌고, 이 무대 위 인물들은 김민경 연출의 말처럼 더없이 우리 자신이었다. 벗어날 수 없는 현실이기에 어떤 이상향을 제시하기 보다 그 현실을 바로 보는 것, 일단 그 증상을 낱낱이 살피는 것이 이 현실 ‘안’에 다르게 머물기 위한 첫 걸음이 아닐까.
[사진: 김지성 jasonk17@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