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다랑어 씨어터 <폴라 목>
[작품리뷰] 상실, 상실됨이라는 존재의 비참
리봄
159호
2019.05.15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2019년 4월 18~27일, 신촌극장에서 공연한 가다랑어 씨어터의 연극 <폴라 목>(김연재 작, 김민주 출연)은 우리의 존재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우리는 “세계에 던져진 존재”여서, 우리의 존재가 비롯된 명백한 근원은 없으며 또한 우리가 존재하게 된 데에는 어떤 합당한 이유도 없다는 것. 연극은 그런...

분절된 인물과 서사, 1인극
무대 공간 가운데에는 중간키의 양문형 캐비넷 하나가 놓여있다. 배우가 등장하며 연극이 시작되면, 캐비넷은 누군가가 갇혀 있는 방이 되고 상자가 되고 입안의 목구멍이 된다. 배우는 옷걸이에 걸린 회색 터틀넥 스웨터를 이용해 그것을 높이 들어 올려 얼굴을 가리고 다른 인물이 되거나 그것을 입음으로써 두 인물을 동일하게 만든다.
캐비넷과 스웨터라는 두 개의 오브제를 주로 사용하는 동시에 배우는 또한 세 가지의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면서 50여 분 동안의 연극을 이끌어 간다. ‘나’를 주어로 하여 서술체로 말하거나, ‘나’를 포함한 여러 인물을 오가며 인물 간의 대화 상황을 보여주거나, 상대 인물의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여 말을 주고받는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학교 시설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나’, 나의 친구이자 나와 같이 일하는 ‘폴라’, 버섯 상자에 갇혀 있다가 청소도구함 안에서 발견된 ‘아이’, 목이 일부 잘려있고 한쪽 눈에는 깊고 새까만 구멍이 있는 ‘토끼’, 저수지 마을에 사는 ‘소녀’ 등이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이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 누군가로부터 잃어버려진 사람으로 연결되며, 결국에는 잃어버려지고 잃어버린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오브제를 동원해 여러 인물을 넘나들며 연기하던 배우의 1인극은 이 지점에서 합치된다.
캐비넷과 스웨터라는 두 개의 오브제를 주로 사용하는 동시에 배우는 또한 세 가지의 말하기 방식을 사용하면서 50여 분 동안의 연극을 이끌어 간다. ‘나’를 주어로 하여 서술체로 말하거나, ‘나’를 포함한 여러 인물을 오가며 인물 간의 대화 상황을 보여주거나, 상대 인물의 대사를 자막으로 처리하여 말을 주고받는다. 연극에 등장하는 인물은 학교 시설물을 관리하는 일을 하는 ‘나’, 나의 친구이자 나와 같이 일하는 ‘폴라’, 버섯 상자에 갇혀 있다가 청소도구함 안에서 발견된 ‘아이’, 목이 일부 잘려있고 한쪽 눈에는 깊고 새까만 구멍이 있는 ‘토끼’, 저수지 마을에 사는 ‘소녀’ 등이다. 연극이 진행될수록 이들은 무언가를 잃어버린 사람, 누군가로부터 잃어버려진 사람으로 연결되며, 결국에는 잃어버려지고 잃어버린 한 사람으로 귀결된다. 오브제를 동원해 여러 인물을 넘나들며 연기하던 배우의 1인극은 이 지점에서 합치된다.

연극은 의도적으로 인물과 시공간을 교란한다. 연극은 이야기가 선조적(線條的: 시간 따위의 흐름에 따라 체계적,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또는 그런 것.)으로 흐르지 않도록 중간 중간에 장면을 삽입하여 공연의 시공간을 빈번히 분절시킨다. 개학식 날의 학교에서 나에게 청소도구함 안에 숨어 있던 아이가 맡겨졌음을 보여준 후, 다음 장면에서는 과수원에서 과수원지기가 나에게 목이 잘린 토끼의 죽음과 관계가 있느냐고 묻는 것을 보여주는 식이다. 이는 처음에는 느닷없는 이행으로 느껴지지만, 결과적으로 이 연극이 1인 화자라는 것을 고려하고 나면 화자의 의식을 반영한 기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연극의 메시지를 더욱 공고히 하기 위해 쓰인다. 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관객에게는 각 장면이 병렬적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지만, 각 사건은 실은 하나의 이야기여서 관객의 되새김 속에서 직렬적으로 쌓이며 겹쳐진다. 여러 인물과 시공간을 넘나들며 연기하던 배우는 하나의 이야기를 그의 몸으로써 겹칠한다.
우리는 모두 불완전하고 불미스러워서

미아로서의 우리는 자연히 존재의 이유가 있기를, 안정적이고 탄탄한 삶의 길을 찾아 나갈 수 있기를 바란다. 삶에 가끔 찾아오는 충만한 순간에서 그 실마리를 포착한다. 어느 날 방에서 나오던 순간 방 안의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노래의 제목을 찾기 위해 편지를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잃어버린 것을 찾으려는 시도는 자주 실패해버린다. 목에 걸린 노래를 기억해내려다 그만 목이 부어 편도염에 걸리며, 또는 되돌리기 어려울 만큼 그릇된 해답을 택하는 경우도 잦다. 머리가 없이 태어난 저수지 소녀에게 엄마는 지푸라기로 만든 머리를 달아 주었다. 소녀는 자신의 머리가 말라버린 저수지 위를 구르고 있음을 발견하지만 이미 지푸라기 머리가 목에 달라붙어 진짜 머리는 붙일 수가 없다.
우리의 헤어짐과 단절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우리는 완전한 무엇에 제대로 닿을 수는 없는 것인가? 연극이 상실과 상실됨의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인간적 한계, 실수, 악한 본성이다. 폴라는 아이를 버섯 상자 안에 가둬놓음으로써 보호자의 의무를 방기한다. 폴라는 새가 사악하기 때문에 닭을 고아 먹는 것이 몸에 좋다고 말한다. 연극은 인간을 불완전하고 불미스러운 존재로 그린다. 그리고 인간으로서의 허물을 곧 죄로 치환한다. 연극의 후반부에 폴라와 나는 죄수가 되어 추운 날 호송줄에 끌려가는 신세가 된다. 우리는 그렇게 삶의 제반 조건들에 얽매여 있으며 그것들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우리는 연극의 인물들이 방에, 버섯 상자 안에, 출렁이는 낙타 가죽 자루 안에 갇혀 있는 것과 같이 저마다의 인간적 한계 안에 갇혀 타인과의 관계에서도 단절감과 고독감을 느낀다.
절단면에서도 돋아나는 것이 있으니
그러나 연극은 생성하는 에너지를 은근하게 소망한다. 잃어버려진 물건에서, 잘린 목의 절단면에서, 편도염에 걸린 목 안에서 버섯이 자라나는 것이다. 버섯들은 빽빽이 고고하게 목을 쳐들고 있다. 버섯은 토를 하지 않기 때문에 깨끗하다. 연극은 완전무결함의 존재가 있을 것이라 기대를 걸어보고 있다. 또한 목이 잘린 닭은 목이 있는 닭보다 기운이 좋다. 배우가 목이 잘린 닭이 되어 “라차! 라차! 으라차차!” 신이 난 듯 소리를 내고 우스꽝스러운 몸짓을 하는 것이 일부러 에너지를 끌어올리는 것처럼 느껴져 어쩐지 애처롭지만, 그런 식의 생기도 극장 안에 웃음을 발동한다. 연극의 이러한 은유들은 우리가 마땅한 이유 없이 태어난 존재라고 할지라도 태어남 그 자체에 상실 극복의 실마리가 있음을 가리킨다.
잃어버린 노래의 제목을 찾던 연극의 인물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자신이 노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망각이라는 존재적인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해가 저무는 텅 빈 학교에서 할 일을 모두 마쳐갈 때쯤, 그는 청소도구함 안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고 느낀다. 연극은 그러한 낌새를, 그 낌새를 채는 순간의 힘을 믿는다.
잃어버린 노래의 제목을 찾던 연극의 인물은 마지막 장면에 이르러 자신이 노래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린다. 그렇게 우리는 망각이라는 존재적인 한계를 지닌다. 하지만 해가 저무는 텅 빈 학교에서 할 일을 모두 마쳐갈 때쯤, 그는 청소도구함 안에 무엇인가가 있었던 것 같다고 느낀다. 연극은 그러한 낌새를, 그 낌새를 채는 순간의 힘을 믿는다.
[사진제공: 가다랑어 씨어터 ⓒ윤관희]
폴라 목
- 일자
- 2019.4.18(목) ~ 4.27(토)
- 장소
- 신촌극장
- 작·포스터그림
- 김연재
- 출연
- 김민주
- 조명
- 김소현
- 가다랑어 씨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