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신세계 <공주들>
[응답하라] 불편해서 신세계
임승태
160호
2019.05.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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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신세계는 현재 한국 연극 무대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팀 중 하나다. 동시에 이 강력한 에너지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은 팀이기도 하다. 그들은 내가 본 대부분의 작업에서 성적 긴장감을 주요 동력으로 사용해 왔고, 노출과 폭력을 공연의 재료로 즐겨 사용했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극단 신세계는 현재 한국 연극 무대에서 가장 강력한 에너지를 발산하는 팀 중 하나다. 동시에 이 강력한 에너지가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것으로 악명이 높은 팀이기도 하다. 그들은 내가 본 대부분의 작업에서 성적 긴장감을 주요 동력으로 사용해 왔고, 노출과 폭력을 공연의 재료로 즐겨 사용했다. 우려하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고, 배우들에게 너무 가혹한 것 아니냐고. 그런데 적어도 지금까지 그들의 방식은 내부적으로 합의된 것으로 보이며, 그렇다면 그들에 대한 일부의 우려는 기우일지도 모른다. 아무튼 신세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두 가지로 나뉜다. 이 시대가 불편해하는 진실을 공연을 통해 드러내겠다는 극단의 모토에 수긍하는 시선이 하나요, 신세계의 공연이 그저 불편할 뿐이라는 시선이 나머지 하나다. 흥미로운 사실은 한 사람이 그 두 가지 관점을 함께 가질 수 있다는 점이다.
신세계의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적잖이 불편하다. 하지만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훔쳐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것을 목격했다고 나서서 불평하기도 애매하다.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면서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관객들을 뒤에서 보고 있는 연출, 그리고 무대 위에서 아닌 척, 모른 척하면서도 실은 관객의 반응을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배우들의 시선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훔쳐보는 사람들을 훔쳐보는 것. 신세계는 햄릿이 클로디어스 왕에게 썼던 전략을 관객에게 사용한다. 공연 전후로 더없이 친절한 그들의 제스처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친절한 고객 응대의 차원이 아니라 공연 시작과 함께 찾아오는 불편을 극대화시키는 전술로 느껴진다. 이 또한 극중극 장면에서 햄릿이 보이는 과장된 친절함 같은 것이다.
신세계가 연극으로 관객의 양심을 사로잡으려 한다는 것을 2017년 공연된 <파란나라>의 커튼콜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말하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관객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깨달음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커튼콜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대를 가득 채운 배우들, 그리고 시민배우들이 ‘파란’을 외치며 관객의 동참을 요구하자 관객 또한 이내 ‘파란’을 함께 연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커튼콜이 아주 못마땅했다. 어떻게 전체주의를 경계하자면서 관객들을 파쇼 대열에 편입시킨단 말인가. 들어오라고 순순히 들어오는 “말 잘 듣는” 관객들이 문제라는 것, 연극 한 편 본다고 우리 안의 파시즘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또 하나의 레이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날 밤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신세계의 공연장에서 관객들은 원하든 원치 않든 적잖이 불편하다. 하지만 어두운 객석에서 무대를 훔쳐보고 있는 입장에서는 원치 않는 것을 목격했다고 나서서 불평하기도 애매하다. 그런 일을 반복적으로 당하면서 나는 당혹스러워하는 관객들을 뒤에서 보고 있는 연출, 그리고 무대 위에서 아닌 척, 모른 척하면서도 실은 관객의 반응을 세밀히 관찰하고 있는 배우들의 시선을 조금씩 느낄 수 있었다. 훔쳐보는 사람들을 훔쳐보는 것. 신세계는 햄릿이 클로디어스 왕에게 썼던 전략을 관객에게 사용한다. 공연 전후로 더없이 친절한 그들의 제스처 또한 어느 순간부터는 단순히 친절한 고객 응대의 차원이 아니라 공연 시작과 함께 찾아오는 불편을 극대화시키는 전술로 느껴진다. 이 또한 극중극 장면에서 햄릿이 보이는 과장된 친절함 같은 것이다.
신세계가 연극으로 관객의 양심을 사로잡으려 한다는 것을 2017년 공연된 <파란나라>의 커튼콜을 보면서 알 수 있었다. 공연을 보면서 이 작품이 말하는 파시즘의 위험성을 인지하지 못한 관객은 아마 거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관객의 깨달음이 얼마나 허술한 것인지 커튼콜에서 여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무대를 가득 채운 배우들, 그리고 시민배우들이 ‘파란’을 외치며 관객의 동참을 요구하자 관객 또한 이내 ‘파란’을 함께 연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때 나는 이 커튼콜이 아주 못마땅했다. 어떻게 전체주의를 경계하자면서 관객들을 파쇼 대열에 편입시킨단 말인가. 들어오라고 순순히 들어오는 “말 잘 듣는” 관객들이 문제라는 것, 연극 한 편 본다고 우리 안의 파시즘이 눈 녹듯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또 하나의 레이어가 있었다는 것을 그날 밤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이번 서울연극제의 <공주들> 관람을 앞두고 이번에도 비슷한 함정이 있으리라 짐작은 했었다. 하지만 그 함정이 공연이 시작되기도 전에 놓여 있을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입장권을 찾을 때 관객은 윗구멍, 아랫구멍, 뒷구멍 중 어느 구멍으로 입장할지 선택하도록 안내받는다. ‘파란’은 외치지 않으면 그만이었지만, 이번에는 구멍을 선택하지 않으면 입장조차 할 수 없다. 내키지 않는 일이었지만 선택을 거부하고 극장을 떠날 대범함이 내겐 없었다. 어떻게 했냐고? 어느 구멍이 가장 괜찮은지 안내원에게 추천을 받았다. 그렇게 나는 돈 내고 구멍을 선택하는 사람이 되고 말았다. 성매매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 한 발짝 물러나 지켜보려던 나 같은 사람의 태도를 원천 봉쇄시키는 그들의 전략은 영악하고 또 효과적이었다. 그것을 매춘, 성매매, 성노동 무엇으로 부르든지 신세계는 그들다운 불편함으로 관객을 이 문제에 기어코 ‘들어오게’ 만들었다.
<공주들>은 1940년에서부터 2019년까지 우리 근현대사를 훑어보며 성매매의 계보를 빠르게 써내려간다. 성매매와 관련한 주류 담론이 대체로 찬반토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여러 입장들 사이에 끼어있는 그 일의 당사자, 그중에서도 성판매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공인에서 묵인으로, 묵인에서 다시 금지로 전환되는 국가의 정책 수정 (혹은 변덕) 과정에서 정작 구멍의 주인들(孔主)에게 발언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소거되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여기(도) 사람이 있음을 알린다. 때로는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위해, 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외화 벌이를 위해 그들의 ‘헌신’을 요구하고 강제하다가 어느 순간 그들을 사회의 암적 존재로, 혹은 계도의 대상으로, 또는 도시 미관을, 그래서 부동산 경기를 저해하는 자들로 여기는 국가 권력의 기만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 고발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은 편치 않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공연장에 들어오려면 구멍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건 공주들을 승인하든 억압하든 일정한 관계 맺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공주들>은 1940년에서부터 2019년까지 우리 근현대사를 훑어보며 성매매의 계보를 빠르게 써내려간다. 성매매와 관련한 주류 담론이 대체로 찬반토론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는 반면, 이 작품은 여러 입장들 사이에 끼어있는 그 일의 당사자, 그중에서도 성판매 여성의 목소리에 귀 기울인다. 공인에서 묵인으로, 묵인에서 다시 금지로 전환되는 국가의 정책 수정 (혹은 변덕) 과정에서 정작 구멍의 주인들(孔主)에게 발언권이 주어져 있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소거되었던 그들의 목소리를 대신해 여기(도) 사람이 있음을 알린다. 때로는 “텐노헤이카(天皇陛下)”를 위해, 또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외화 벌이를 위해 그들의 ‘헌신’을 요구하고 강제하다가 어느 순간 그들을 사회의 암적 존재로, 혹은 계도의 대상으로, 또는 도시 미관을, 그래서 부동산 경기를 저해하는 자들로 여기는 국가 권력의 기만을 폭로한다. 그러나 이 고발을 지켜보는 관객의 마음은 편치 않다. 각각의 에피소드를 보고 있노라면 내가 그 일에 직접 관여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결국은 이러저러한 형태로 연결되어 있음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마치 공연장에 들어오려면 구멍 하나를 선택해야 했던 것처럼, 대한민국에서 산다는 건 공주들을 승인하든 억압하든 일정한 관계 맺음을 전제로 하고 있다는 불편한 진실이 드러난다.

이번 달 ‘응답하라’ 지면에서 <공주들>을 다루게 된 이유는 이 작품에서 내가 아직 답을 찾지 못한 질문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공주 100년사를 위해 꼭 ‘김공주‘라는 단일 인물을 설정해야 했을까? 이 작품에서 김공주는 인신매매로 일본군 성노예가 되었고 해방 후 6·25 동란 때에는 빨갱이로 몰려 국군의 ‘제5종 보급품’으로, 전쟁 후에는 미군을 위한 ‘양공주’로 살아야 했다. 그 후에도 김공주는 동두천, 미아리, 용산 등지에서 성판매를 하거나 알선하는 일로 생계를 꾸려 나간다. 목격자로 관여하는 가장 최근의 경우를 제외한다면, 사실상 모든 형태의 성매매에 김공주라는 한 인물이 참여했다는 설정인 것이다.
김공주라는 인물로 인해 성매매 체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중세 도덕극의 주인공 ‘만인(Everyman)’처럼 동시대 한국 여성 누구라도 김공주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힘을 가진다. 관객으로부터 ‘내가 김공주다’라는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동일 인물 김공주는 분명 효과적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례는 유사한 구조 이전에 저마다의 특수한 맥락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투쟁 또한 저마다 다른 과제를 지닌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와 성노동의 비범죄화 문제는 동일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문제의 주안점과 해결 방법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노동의 비범죄화 이슈에서는 자발성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자발성은 가장 첨예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김공주가 개연성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문제로 느끼는 것은 드라마라는 허구의 틀이 개별 당사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캐릭터의 재현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인물이 유형적(~공주형) 인물인 것과 달리 왜 유독 김공주만 동일성을 지닌 단일 인물이어야 하는가?
김공주라는 인물로 인해 성매매 체제를 매우 효과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중세 도덕극의 주인공 ‘만인(Everyman)’처럼 동시대 한국 여성 누구라도 김공주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힘을 가진다. 관객으로부터 ‘내가 김공주다’라는 동일시를 이끌어내는 데 있어서 동일 인물 김공주는 분명 효과적이다.
하지만 각각의 사례는 유사한 구조 이전에 저마다의 특수한 맥락을 가지고 있고 각자의 투쟁 또한 저마다 다른 과제를 지닌다. 예컨대 일본군 ‘위안부’ 강제 징용 문제와 성노동의 비범죄화 문제는 동일한 구조적 모순의 결과물일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각 문제의 주안점과 해결 방법까지 동일한 것은 아니다. 성노동의 비범죄화 이슈에서는 자발성이 더 이상 문제 되지 않을 수 있지만, 일본군 ‘위안부’ 문제에 있어서 자발성은 가장 첨예한 싸움이 벌어지는 전선이다. 김공주가 개연성이 부족한 인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문제로 느끼는 것은 드라마라는 허구의 틀이 개별 당사자에게 적합하지 않은 캐릭터의 재현을 강요하고 있다는 점이다. 다른 모든 인물이 유형적(~공주형) 인물인 것과 달리 왜 유독 김공주만 동일성을 지닌 단일 인물이어야 하는가?
[사진제공: 서울연극협회]
공주들
- 일자
- 2019.5.4.(토) ~ 5.12(일)
-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소극장
- 작
- 공동창작
- 연출
- 김수정
- 출연
- 강주희, 권미나, 김보경, 김선기, 김정화, 김형준, 민현기, 박형범, 양정윤, 이강호
- 드라마터그
- 김지혜
- 조연출
- 고주영, 박미르
- 무대
- 송지인
- 조명
- 윤해인
- 의상
- 김미나
- 그래픽
- 미르그라피
- 음악
- 이율구
- 음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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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획
- 강지연, 김성현
- 극단 신세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