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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콘센트-동의>

[세대교차] 부지런히 생각하도록 만드는 연극

김방옥_연극평론가
163호 2019.07.11
국립극단의 <콘센트-동의(니나 레인 작, 강량원 연출, 임일진 무대미술)>는 비록 번역극이지만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하며 관객을 긴장시키는 공연이었다. 최근작으로 런던에서도 뜨거운 화제였다는데 강간 사건과 수임 변호사들의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시의성 있는 이슈와 그 뒤의 더 큰 질문들을 재미와 웃음 속에서도 ...
동의란 무엇인가? 공감이란 무엇인가?
국립극단의 <콘센트-동의(니나 레인 작, 강량원 연출, 임일진 무대미술)>는 비록 번역극이지만 오늘의 한국사회에도 적지 않은 시사점을 제공하며 관객을 긴장시키는 공연이었다. 최근작으로 런던에서도 뜨거운 화제였다는데 강간 사건과 수임 변호사들의 남녀관계를 중심으로 시의성 있는 이슈와 그 뒤의 더 큰 질문들을 재미와 웃음 속에서도 냉정하게 성찰하도록 권하고 있다. 이 연극에서 제목이 말하는 ‘동의(consent)’는 일단 단순명료한 의미로 출발한다. 상대방의 ‘동의’ 없는 성행위는 강간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 경우 ‘동의’에 대한 법적 해석은 분분하지만 말이다. 이 극의 영리함은 이런 ‘동의’라는 개념을, 특정 강간 사건 뿐 아니라 이를 다루는 법정 변호사들의 메마르고 이기적인 결혼생활과 그들의 교묘한 논리와 화술들에도 역설적으로 적용하고 확장했다는 데 있다. 극은 그들의 부부, 남녀, 인간관계가 냉소, 거짓말, 성적 방종, 질투, 주도권 싸움, 뒷담화, 비밀 폭로하기, 아이 소유권 투쟁, 그리고 인간혐오, 직업혐오, 여혐, 남혐들의 혼란스런 범벅 위에 걸쳐놓은 임시적 합의나 ‘동의’에 다름 아닐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 연극의 핵심은 그들이 동의라는 법적, 사회적 행위를 넘어 ‘공감’, 그리고 ‘진정어린 사과’ 같은 점차 윤리적 차원으로 갈등을 심화시킨다는 점에 있으며 또한 그 과정에서 작가는 복수, 용서, 합의, 공평함, 타자, 계급성, 그리고 이성과 이성을 넘어선 그 무엇 등, 더 커다란 논제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을 던져 주었다는 데 있다.
<콘센트-동의>는 머리 좋고 말 잘하는 변호사들로 가득 차 있지만 그들은 입센극의 인물처럼 자신의 말과 신념을 믿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인물들이 아니다. 냉소적이고 회의적이며 일 중독이거나 섹스 중독이거나 술에 취해있거나 대마초에 쩔어 살거나 왜 사는지 모르는 인물들이 대부분이다. 그들은 매 순간 앞에서 등 뒤에서 서로를 비난하고 판단하고 논쟁을 벌이지만 누구도 자신들의 혼란스러운 삶의 진짜 원인이 뭔지 알아낼 능력이 없다. 에드는 “공감은 무슨, 좆같은 구닥다리...”라고 비웃을 뿐 아니라 “솔직히 더 이상 전체 시스템 자체를 믿지 않는다”라고 외친다. 법적 시비를 가리는 법률가들의 이런 추태들을 통해 관객은 병들어가는 민주주의와 심화된 자본주의 세계를 사는 대부분의 인간의 모습을 더 잘 돌아 볼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의 공연 팀은 이런 혼란스런 논쟁들의 내용을 한국 관객에게 잘 전달하면서, 동시에 관객들이 그 다툼들의 무의미함 까지를 알아채고, 거기서 더 나아가 그들이 더 생각하도록 쉬지 않고 자극해야 한다는 어려운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이번 국립극단 공연은 문화 번역이 아주 잘 이루어지지는 않은 상황에서나마 관객을 생각하도록 자극하는 데는 상당 부분 성공한듯하다. 그러나 그 자극들을 소화하고 관객 스스로 더 많은 의미를 찾아내서 성찰하게끔 충분히 도와주는 데까지는 가지 못했다.
모두가 쓰레기다
조명이 들어오면 일단 무대가 시선을 끈다. 핫핑크로 글로시하게 반짝이는 미니멀하고 고급스런 인테리어는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그리스 건축물의 폐허라는 이질적 이미지들과 뒤섞이게 된다. 이 세련된 공간은 주로 법정변호사인 에드와 전직 카피라이터인 키티 부부의 거실이나 부부 변호사인 제이크와 레이첼 부부의 거실, 그리고 동료 변호사인 팀의 집으로 쓰인다. 이 극에는 그들 외에 연극배우 자라, 강간 사건의 피해자인 게일, 그리고 이혼 전문변호사가 나온다. 프롤로그에서 남루하고 거친 차림의 강간 피해자 게일이 폐허들이 흩어진 무대 앞쪽을 거닐며 관객들을 바라본다. 뒤이어 화려한 거실에서 에드와 키티 부부의 아기 출생과 이사를 축하하는 제이크와 레이첼 부부가 보인다. 냉소적이며 경박한 이들의 대화 속에서 에드와 팀이 게일 강간 사건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음이 알려지며, 짧게 삽입된 재판 관련 장면들은 가해자 측의 변호사 에드가 강간 피해자 게일의 음주나 우울증, 문자 등 정황을 들어 재판에 이기는 과정을 보여준다. 한편 만성적으로 바람을 피워온 제이크는 새로운 외도를 들켜 레이첼에게 아이도 뺏기고 이혼 당하게 생겼다면서 울고 다니고, 독신인 팀을 경멸하고 싫어하는 에드는 팀에게 연극배우인 자라를 소개한다면서 자신이 자라에게 추근댄다. 독신인 팀은 게이로 오해받을 정도로 감성적이지만 마음이 텅 빈 기회주의적 인간이고, 독신인 자라 역시 배우라지만 세속적이고 피상적 인물인데 단지 이 둘은 아이를 낳고 싶어 한다는 점에서 공통될 뿐이다.
이 즉물적이고 이기적인 집단의 균열은 유일하게 법률가가 아니며 자신이 도덕적으로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에드의 아내 키티로부터 시작된다. 균열의 씨앗은 5년 전 에드가 바람피운 것을 키티가 마음속으로 용서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고 그 균열이 실제 벌어진 건 잘난 척하는 에드에 대해 피해 의식을 가지고 있는 팀과의 우발적 정사였으며 여기에는 바람피운 남편에 대한 복수심도 한 몫 한다. 그리고 그 균열에 대한 확신은 크리스마스 파티 도중 재판에서 진 게일이 에드를 찾아와 항의하고 절규한 이후 굳어졌다. 파티장에 찾아온 게일은 말한다. 자신이 우울증에 걸렸던 건 십년 전 동생과 함께 숲속에서 강간을 당했기 때문이라고, 그런데 그 동생이 죽은 장례식 날 자신은 다시 강간을 당했다고. 그리고 “숲속에 나란히 눕혀져 강간을 당하는 동안 자신은 동생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고. 압도당한 키티는 자신도 모르게 게일에게 뛰쳐가 “미안하다”고 소리치지만 게일은 뿌리친다. 기나긴 1막이 끝난 후 2막 어디에서 관객들은 게일이 결국 자살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들 부부는 정말 화해했나?
게일 사건과, 복잡한 남녀관계와, 영국 변호사들이 퍼붓는 잘 들리지도 않는 욕과 외설적 농담 때문에 힘들었던 1막에 비해 2막은 비교적 관객들을 즐겁게 한다. 1막의 제이크와 레이첼의 위기가 그럭저럭 봉합되면서 이번에는 에디와 키티와 팀의 삼각관계를 중심으로 전개되기 때문이다. 1막의 어디에서인가와 똑같은 구도로, 이번에는 처참한 모습의 에드가 제이크 부부를 찾아와 자신의 처지를 하소연한다. 팀과 동거를 시작한 키티가 이혼을 요구해서 아이를 뺏길지도 모르게 됐다는데 헤어지기 전 부부가 섹스를 했던 사실도 드러난다. 에드는 그건 그냥 사랑을 확인하기 위한 거였다고 우물대지만 제이크와 레이첼은 변호사답게 만일 상대방이 동의하지 않았는데도 했으면 그건 분명 강간에 해당된다고, 그건 부부 이별 시 부부강간의 전형적인 예라고 에드를 깨우쳐준다(이들이 자신들의 사생활에서도 ‘동의’를 기계적으로 적용하는 탓에, 게일을 좌절시켰던 덫에 에드 자신이 걸려드는 장면은 물론 이 극의 핵심적 아이러니 중 하나이다). 에드는 수년 전 키티가 자기 동의 없이 낙태한 예도 들어가며 항의도 하고 애원도 하지만 결국 키티는 팀과 자신은 서로 사랑한다면서 집을 떠난다. 과연 그럴까?
마지막으로 키티와 여배우 자라의 대결이다. 키티와 관계를 맺기 전 팀은 자라와 사귀고 있었는데 이제 팀은 키티를 떠나 다시 자라에게 갔다. 모든 것을 잃은 키티는 현재 충치까지 앓고 있어 그야말로 심신이 말이 아니다(몸의 연출가 강량원은 왜 충치로 인한 고통 부분을 더 멋지게 강조하지 않았을까?). 자라는 키티에게 “넌 인간적인 척하지만 집도, 남편도, 아기도 있으면서 팀까지 뺏어간 욕심쟁이이고 용서를 모르는 가혹하고 나쁜 년”이라고 비판한다. 키티의 사과를 진정성 없다고 거부한 자라는 인공수정을 위해 에드로부터 협조를 좀 받아도 괜찮으냐며 그게 공평한 거겠지? 라고 묻는다.
극은 오픈 엔딩으로 끝난다. 키티와 에드는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불현듯 서로에 대한 이해에 접근하는 듯하다. 마음에 동요를 일으킨 키티가, 갑자기 무릎을 꿇고 이제 당신의 아픔에 공감한다며 “이제 그만 용서하라구, 씨발”이라고 외치는 에드를 몸씨름 하듯 일으키는 장면으로 극이 끝난다. 에피로그에서는 자살한 게일의 유령이 무대 뒤쪽으로부터 걸어들어와 이들 부부를 바라본다. 그리고 망사막이 내려오면서 옛 그리스 극장의 돌계단이 관객의 시야를 가득 채운다. 이런 오픈 엔딩은 당연히 여러 질문과 토론 거리를 남긴다. 키티와 에드는 과연 사랑을 회복했으며 원래 사랑을 하기는 했던 건가? 그들은 과연 공감과 진정성 있는 화해를 주고 받을만한 윤리적 용량을 갖춘 인물들이었는지? 레이첼은 왜 에드의 편을 들었을까? 그리고 개인적인 질문으로, 그들은 남녀 할 것 없이 왜 모두 그렇게 아이에 집착하는가? (<메디아>와의 상응점 때문일까?) 작가는 아이가 있는 결혼생활을 궁극적 유토피아로 전제하는 것인가? 영국에서 여자들은 남자들의 성적 언어폭력에 관대한가? 왜 영국 법정은 강간 피해자에게 변호인을 허용하지 않는가? 게일은 강간 피해자라기보다 스코틀랜드 사투리를 쓰는 도시 하층민으로서 타자인가? 막이 내린 후 이들 변호사부부들의 삶은, 이들이 변호사로 사는 사회는 이전과 달라질 것인가?
가끔은 논쟁연극이 부럽다
이 극은 우리에게 결코 낯설지 않다. 각종 성폭력과 미투사태를 포함한 사회적 갈등과 분열을 거치면서 개인적, 사회적 ‘동의’와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공감’과 사과, 그리고 복수와 용서, 공평함, 타자화와 배제 등은 오늘 한국사회에서도 절실한 이슈이기 때문이다. 이 극은 엄밀히 말하면 삶에 대한 객관적 묘사라기보다 논제극(thesis play)에 가깝다. 장면별로 2-3 명의 인물들의 논쟁적 대결로 이루어져 있으며 게일의 서브플롯은 노골적으로 주제 전달을 위한 장치이다. 알다시피 연극사적으로 사실주의극은 토론 중심의 ‘논제극’이라는 내용과 ‘잘짜여진 극’이라는 형식이 만나서 탄생되었다. 2019년의 <콘센트-동의>에도 그런 논제극의 흔적이 보인다. 세계적으로 각종 갈등과 분쟁들이 불거지다 보니 이런 논쟁적 연극이 다시 복귀하는 추세인 것 같다. <인형의 집 파트2>가 그렇고 오스터마이어의 <민중의 적>이 그랬다. 관객들도 논쟁적 대사로만 진행되는 <데모크라시>나 <코펜하겐> 같은 연극에 신선한 자극과 청량감을 느끼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따라서 왜 우리 연극계에는 이런 희곡이 안 나오느냐는 해묵은 한탄이 다시 나올 수 있는 지점이다.
한국 문화에는 옛날이나 오늘에나 토론이 없다고 한다. 옛날에는 수직적 유교문화 때문에, 오늘날에는 축약된 근대화 과정에서 압제/항거의 이분법에 따른 울분과 분노 때문인지 차분하면서도 신랄한 토론이란 게 없었다. 서양인들처럼 아무데서나 대화하고 토론하는 문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합리성에 토대한 서구 근대시민사회식 논의의 축적이 부족한 것이다. 그러다 보니 한국근대사 백년에 그럴싸한 희곡작품도 드물지만 그나마 대부분 사회 환경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을 풍속적으로 그리거나 잘난 놈/못난 놈을 나누는 이분법적 풍자였고 인물과 인물 사이의 가치관의 복잡한 갈등을 합리적인 대화 중심으로 풀어낸 희곡은 거의 없었다. 세상이 요동치는 가운데 2019년 한국 연극계에도 수많은 이슈가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이를 논리적인 대화나 토론을 통해 집요하게 극화하는 작품은 드물다. 그 대신 현재는 버바텀이나 다큐멘터리 연극의 생생한 실재적 자료들이 일단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지만 말이다. 요즘 우리 연극은 거칠게 말하면 ‘애도->우울->아주 섬세한 공감이나 개인적 인식->광장’의 양상을 띠고 있거나 직설적인 사회비판극이 많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보다 정교하고 재미있고 불편하고 치열한 공적 담론화의 단계가 더 있었으면 하는 욕심이 드는 게 사실이다. 문화적 배경 상 아마 힘들 것 같으니 아쉬운 대로 그냥 좋은 번역극을 가끔 보는 수밖에 없다. 아, 우리도 최근 비슷한 작품으로 <옥상밭 고추는 왜?> <테스트(황승욱 작, 김진아 연출, 양동탁, 김우진 출연)> 같은 연극이 생각난다.
임일진의 시노그래피
무대를 먼저 압도한 것은 임일진의 무대미술이었다. 윤기 흐르는 핑크로 반짝이는 실내와 그리스 신전의 폐허를 섞어놓은 무대는 얼핏 아테네 중심가의 고급 펜트하우스나 부티크 호텔 내부처럼 보였고 첫인상은 시각적으로 너무 화려해서 공연을 과도하게 장악한다는 느낌이었다. 희곡에서는 지시되지 않았던 고대건물의 폐허는 여배우가 <메디아>를 공연 중이라는 다소 빈약한 연결고리로 도입되는 듯 했으나 정의니 복수니 하는 아이스퀼러스적 단어들도 가끔 들렸고 후반부로 가면서 차차 이 공연 나름의 새로운 의미로 살아나기 시작했다. 그 의미란 ‘연극의 본래적 의미가 이런 재판극 같은 토론이고 법적 시비이며 시대적 정의를 모색하는 것’이라는 총체적 주제로 읽혔다. 주지하듯이 고대 그리스극은 도시국가 폴리스의 정치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토론의 형식으로부터 발전되어 온 것이 아니던가? 이 논제적 연극은 미해결의 오픈 엔딩이다. 강량원과 임일진은 마지막 장면에서 망사막을 내리면서 고대 그리스 극장의 돌로 된 객석을 스크린 가득 채워 관객에게 오래 보여주고 뒤이어 객석의 불을 잠시 환하게 켬으로써 이런 오픈 엔딩에 대한 이 공연 나름의 시노그래피적 해석을 분명하게 마무리했다. 살아가는 모든 의제가 진심을 다해 토론되는 곳, 그곳이 극장이었고, 극장이고, 극장이 될 것이라는 대 주제, 이 마무리 주제는 한국의 공연을 통해 확장된 것이다.
강량원의 연기 메소드
‘주체의 의지를 담은 행위로서의 몸’을 강조했던 강량원의 연기론은 최근 ‘외부의 자극에 의해 움직이는 비어있는 몸’으로 전환했다고 한다(<연극-인>, 159호). 이런 강량원의 연기론은 기본적으로 주체가 약화되고 있고 대상에 대한 합리적 분석보다는 세계를 향해 감각과 몸을 여는 탈근대의 사상적, 미학적 경향과 합치한다고 볼 수 있으며 따라서 해체적 기법의 소설에 토대한 <그믐, 또는 당신이 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에서는 효과적이었다. 그런데 이런 연기 메소드로 모든 텍스트와 만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기본훈련과 텍스트에 따른 인물 만들기는 별개일까? <콘센트-동의>에서도 다소 낯선 행위들을 통해 개인의 심리나 합리성 너머의 ‘세계’의 삐걱거림을 감지하게 할 수 있을 것인가? 일단 눈에 보이는 결과는 우려보다 나쁘지 않았다. 국립극단 배우인 정새별, 이종무, 임준식은 극단 동의 배우인 김석주, 신소영과 우려를 넘어서는 앙상블을 보였는데 아무튼 국립극단 배우들의 경우는 강량원의 연기 메소드를 통해 한 단계 연기를 확장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던 것 같다. 비연기전문가의 눈으로 보기에는 ‘주체의 의지로서의 행위’건 ‘외부세계의 자극에 의해 되어지는 몸’이건, 결국 ‘행위’를 ‘선택(만나지는 세계를 설계)’하는 것으로 느껴졌는데, 그렇다면 강량원의 연기는 보편적 연기론과 만날 수 있는 접촉면이 그리 제한적이지는 않은 셈이다. 김석주와 신소영의 ‘되어지는 몸’들은 자주 지나치게 흐느적거리거나 휘청거리기는 했지만 때로 분명한 감각적 의미화와 리듬감을 만들어냄으로써 부분적으로 인물의 외연을 넓힌 효과는 있었다. 그러나 역시 대사중심의 연극에서 가끔 설명적이 되거나 안무적이 되거나 ‘설계’된 행위와 행위 사이의 연결 문제에서 어색한 빈 순간이 드러나곤 했다. 무엇보다 전경화된 신체 행동이 대사를 삼켜버리는 경우가 없지 않았다.
상대를 바꿔가며 헛 판을 벌이는 구조의 이 연극은 인물 간의 대조와 갈등관계도 중요하다. 이 극에서 잘나고 존경받을 인물은 아무도 없으나 경박하고 피상적인 제이크 부부와 그보다는 그래도 정신적 용량이 큰 에드 부부의 대조는 잘 드러났다. 정새별은 냉정한 일중독자인 레이첼을 형상화함으로써 보다 인간적인 폭과 깊이를 갖춘 신소영(키티)과 적절한 대조를 이루었다. 이와 달리 김석주(에드)가 지닌 냉정함과 이성은 임준식(제이크)의 산만할 정도의 과잉된 연기를 압도할 만큼의 볼륨과 무게를 지니지는 못해 극 전체가 흐름을 잃고 다소 산만해졌다. 이종무는 분석하기 힘든 인물인 팀이라는 텅 빈, 묘한 캐릭터를 연기적 직감과 절제되고 선택된 행동을 통해 적절하게 구체화시켜 제 위치에 놓았다. 일인이역의 양서빈은 게일 역을 섬찟한 타자성으로 무게감 있게 구현했던 것만큼, 대조적인 이혼변호사 역에 즐거운 존재감을 주지 못한 점이 아쉽다. 여배우 자라는 분명히 극에서 적지 않은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 같기는 한데 주인영의 연기를 통해서는 도대체 어떤 인물인지 짐작하기 힘들었다. 결론적으로 끝 장면에서 에드와 레이첼의 얽힘이 화해의 포옹이 아니라 실은 상호 모색의 몸 씨름이고 그 몸 씨름이 단지 그들만의 것이 아닌 피해자 게일의 시선, 나아가 이 세계라는 관점의 반영임을 관객이 눈치챘다면 이 극은 그 나름으로 성공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관능적이면서도 지적이고 의문을 불러일으키는 듯한 음악은 연출과 무대의 이런 해석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했다.
구글과 유튜브를 통해 찾아보니 로저 미첼이 연출한 <콘센트> 런던공연(국립극단, 해롤드 핀터 씨어터)의 공연사진은 놀랍도록 일상적이었다. 아무것도 없는 빈 무대에 평범한 의자 몇 개, 장난감, 그리고 배우들은 아무렇게나 묶은 머리에 편해 보이는 면 셔츠나 진 바지를 입고 있었다. 자연스럽고 일상적 말과 행동을 통해서도 이 막장의 논제적 난투극을 전달할 자신이 있다는 것이다. 스펙터클한 무대에서 디자이너 브랜드 같은 옷들을 입고 ‘연기’를 전경화시키는 한국공연과 또 다르게, 구체적 현실 속에서 속사포 같은 말과 생각과 관객들의 웃음만으로 진행될 영국공연도 궁금하다.

[사진제공: 국립극단 ⓒ나승열]

콘센트-동의
일자
2019.06.14(금) ~ 07.07(일)
장소
명동예술극장
작
니나레인
연출
강량원
출연
김석주, 신소영, 양서빈, 이종무, 임준식, 정새별, 주인영
무대
임일진
조명
최보윤
의상
강기정
음악
장영규
분장
백지영
소품
박현이
음향
김서영
조연출
문새미, 김다슬
제작
(재)국립극단
관련정보
https://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68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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