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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관크에 대하여

임승태
164호 2019.07.25
여름이다. 객석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는 계절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덥고 힘든 날씨에 무언가를 집중해서 본다는 건 고역이다. 그리고 그런 고역을 여러 사람이 같이하다 보면 피차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물을 마시고 부채질을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서법이다. 하지만 공연장 안에서 이런 행동은 그 자체로도 주변 사...
여름이다. 객석의 열기가 뜨거웠다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 않는 계절이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덥고 힘든 날씨에 무언가를 집중해서 본다는 건 고역이다. 그리고 그런 고역을 여러 사람이 같이하다 보면 피차 번거롭고 성가신 일이 일어나기 마련이다. 물을 마시고 부채질을 하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피서법이다. 하지만 공연장 안에서 이런 행동은 그 자체로도 주변 사람과 공연자에게 방해가 될 수 있을뿐더러 누군가의 손에 있던 물병과 부채는 공연 중 꼭 한 번쯤은 중력을 못 이기고 바닥에 떨어진다. 그렇다고 더위를 느끼는 사람이 물도 마시지 않고 부채질도 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가? 땀이 흐른다. 땀이 흐르면 땀 냄새가 날 수도 있다. 갑갑함을 견디다 지쳐 잠이 들기도 한다. 그리고 이내 코 고는 소리로 숙면을 인증하기도 한다. 그 순간 주변 관객들은 예상치 못한 청각과 후각의 자극에 압도되고 만다.
여름철 거리에 ‘폭염주의보’가 발효될 즈음 극장에는 이른바 ‘관크주의보’가 내려진다. 몇 년 전부터 관람에 치명적인 피해(critical damage)를 입혔다는 뜻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관크’란 말이 요즘 부쩍 관객 후기에서 자주 보인다. 관크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선 우선 부적절한 행위가 사라져야 한다. 그런데 그 행위를 대하는 우리의 반응도 조금은 달라질 필요가 있다. 물론 불편을 끼치는 행위가 일차적으로 잘못이다. 공연은 매 순간순간이 중요하고 그 순간은 다시 돌아오지 않기에 아무리 사소한 방해라도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공연을 보기 위해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들였기 때문에 그 공연을 온전히 누릴 수 없을 때 우리는 ‘내가 이러려고 왔나’라는 자괴감에 빠지기 쉽다.
나 역시 핸드폰 불빛, 소위 ‘폰딧불’ 앞에서 평정심을 잃을 때가 많다. 요즘 부쩍 경험하는 일이다. 과거에는 주로 벨 소리가 공연을 방해했다면, 요즘은 벨 소리는 예전보다 줄었으나 그 대신 불빛이 깜박이는 걸 보게 된다. 특히 공연 중 장면 전환을 위해 암전이 일어날 때 핸드폰을 열어보는 관객들이 심심찮게 보인다. 공연을 보면서 왜 핸드폰을 손에 들고 있는 걸까? 저 사람(들)은 암전도 공연의 한 요소임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가? 어쩌면 암전으로 긴장이 일시적으로 풀어지는 순간 스마트폰 화면을 열어보는 평소 습관이 자동적으로 일어나는 것일 수도 있다. 어쩌면 공연이 자신의 스마트폰 화면보다 덜 재미있음을 항의하고 싶은 마음일 수도, 어쩌면 암흑 속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주목받고 싶은 충동일 수도 있다. 어떤 이유든 분명한 건 그들이 무심코 밝힌 스마트폰 불빛은 그들 못지않게 스마트폰에 길들어 있는 다른 관객들에게도 그 순간 내 폰에도 뭔가 중요한 메시지나 알림이 들어오지 않았을까라는 궁금증과 불안감을 유발한다는 점이다. 이런 번민에서 자유롭지 못한 나는 요즘 객석에 앉으면 핸드폰 전원을 완전히 끄는 연습을 하고 있다.
관크는 관극 경험이 부족한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다. 연극인들 소위 (관)계자들 역시 관크의 주범으로 자주 거론된다. 가장 잦은 불만은 계자들은 다른 관객들이 웃지 않는 지점에서 (크게) 웃어서 공연장 분위기를 흐린다는 것이다. 계자들은 이러한 지적에 적잖이 당황한다. 그들이 소리 내어 웃는 것은 대체로 공연이 재미있다는 걸 무대 위 배우들과 극장 안 어딘가에 있을 제작진들에게 알리는 일종의 응원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공연 중에 그런 응원이 큰 힘이 된다는 걸 알고 있기에, 그리고 제작진이 그들이 공연을 보러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을 알기에 이러한 피드백은 계자들 사이에서는 일종의 의무이고 예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그런 행동들이 어느덧 관람을 방해하는 추태로 치부되면서 계자 관객들의 관람 문화가 중대한 도전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단체 관람이나 감상문 과제로 공연장을 찾은 학생들이 공연 중간에 열심히 노트 필기를 하는 것 또한 대표적인 관크 사례로 꼽힌다. 단체 관람 혹은 과제물을 위해 관극을 하는 학생 중에는 생애 최초로 연극을 보게 된 학생들이 적지 않은데, 이런 점에서는 비록 자발적이지 않더라도 관객 개발에 기여하는 단체 관람의 순기능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그 끝에 어김없이 감상문이라는 과제가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 당사자나 이웃 관객을 성가시게 만든다. 리허설이든 공연이든 보고 나서 뭐든 말하고 써야 하는 나는 과제를 앞둔 사람들의 절박함에 공감한다. 공연을 보면서 인상적인 장면들, 떠오른 느낌이나 생각, 혹은 질문들을 그때그때 남겨두어야 한다는 강박을 곧잘 느낀다. 공연이 끝나면 기억나지 않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이런 강박을 느끼는 학생이 많은 날에는 객석에서 종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펜 딸깍거리는 소리가 입체음향으로 들려온다. 학생들은 옆 사람이 의식하지 못할 수준의 은밀한 메모 기술을 터득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선생님들은 학생들에게 공연 중에는 아무것도 쓰지 않고 그저 공연을 온전히 즐긴 다음 극장 밖으로 나온 이후에도 여전히 자기 속에 남아 있는 것들로만 감상을 쓰게 할 필요가 있다.
연극은 클래식 연주만큼이나 공연자, 관객 모두에게 집중을 요구하기에 관객이 정숙을 유지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지만 연극은 의도적으로 관객이 긴장을 풀고 소리 내 웃어주기를 기대하는 때도 있다. 더 큰 집중과 긴장을 모으기 위해 이완이 필요할 때가 있기 마련이다. 또한 모든 공연은 의도하지 않은 소음과 돌발적인 상황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점에서 하루하루가 새로운 해프닝이다. 배우는 기계가 아니고 관객도 시체가 아니다. 배우가 소품을 손에서 놓칠 수도 있고 관객이 물병을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 일들은 항상 벌어질 수 있다. 그렇기에 고도(Godot)는 아무리 기다려도 오지 않지만 ‘크리’는 원하지 않아도 반드시 온다. 피할 수도 즐길 수도 없는 일이지만 그런 일들이 우리의 관극을 망쳤다고 낙심하지 않도록 우리의 정신을 붙잡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웃음, 하품, 재채기, 의자의 삐걱댐, 부채질, 물병 떨어지는 소리... 모든 게 관객의 반응이다. 물론 각자가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을 지키려는 노력이 우리 연극 문화를 발전시킨다. 좁은 곳에 모여 앉아서 모두가 무대를 향해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는 걸 생각한다면 모두가 서로 조심하는 게 마땅하다. 하지만 관객 한 사람은 공연에 대한 자기만의 의사를 가질, 그리고 적절한 수준에서 표시할 권리를 가진다. 남들이 웃을 때 내가 웃지 않을 권리가 있다면, 반대로 아무도 웃지 않을 때 나 혼자 웃을 수 있는 권리도 있어야 한다. 심지어 예컨대 혐오와 차별을 조장하는 것 같은 특수한 경우엔 야유나 중도 퇴장하는 것으로 자신의 의사를 표시할 수도 있다. 그럴 때 관객이 공연을 완성한다는 말의 최대치가 구현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럴 때 공연에서 나를 발견할 수 있다. 나는 하나도 안 웃긴데 저 사람(들)은 여기서 빵 터지는구나, 를 확인함으로써 나를 더 알아갈 수 있다. 또한 그렇게 서로 다른 사람들이 어느 순간 함께 웃거나 함께 눈물을 흘리는 신비를 맛보기도 한다. 나와 다른 타인의 반응을 존중할 때 나의 반응도 취향도 존중받을 수 있다. 이러한 반응을 공연장에 뒤늦게 들어오는 경우나 공연 중에 핸드폰을 열어보는 행동과 구별 없이 관크라고 부를 수는 없다.
요즘은 ‘시체 관극’이야 말로 옆 사람을 방해하지 않는 최선의 관극 태도라는 생각이 꽤 퍼져 있다. 이 말에는 어떤 측면에서 관극의 본질을 꿰뚫는 통찰이 담겨 있다. 무대 위의 배우가 최대치로 말하고 움직일 수 있도록 나를 어둡고 비좁은 객석에 구겨 넣고 말하고 움직일 자유를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것이 관극이라면, 모든 관극은 일정 부분 자발적으로 시체가 되는 행위이기도 하다. 하지만 살아 있는 사람이 시체처럼 움직이지 않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고도의 정신력과 체력이 요구되는 일이며, 그러하기에 이 일을 모두에게 일괄적으로 요구할 수는 없다. 나에게 알맞은 실내온도와 의자의 높이가 옆 사람에겐 매우 불편할 수 있다. 그들이 초집중해서 연극을 즐기지 못하는 것을 애석해하되 그들에게 지나치게 관심을 가져 나의 관극을 장악하지 못하게 하자. 어쩌면 내 옆의 관객이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이기에 움직이는 것이라는 정신 승리가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배우도 관객도 완전무결하지 않기에 무대 위에서도 객석에서도 실수는 일어나기 마련이다. 그 불완전함, 돌발적 상황이 늘 존재하는 게 연극이다. 거기서 연극의 묘미를 발견하지 못하면 머지않아 우리는 매일 저녁 유튜브와 넷플릭스를 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할지도 모른다.
물론 연극이 공동체 제의에서 비롯되었다거나, 일시적으로나마 공동체성을 회복시켜준다는 교과서의 설명이 옆자리 관객의 땀 냄새를 향수로 바꿔줄 수는 없다. 공연장에서 우리는 옆 사람과 한마디 말이나 눈빛조차 나누지 않을 때가 많으며, 어쩌면 모른 척하는 게 서로에 대한 예의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들의 존재를 지울 수는 없다. 공연장에 들어서면 적어도 한 시간 동안 내가 내쉰 숨을 옆자리 관객이 다시 들이쉬는 관계가 만들어진다. 그들을 함께 호흡하는 동료로 인식할 것인가, 밀폐된 극장의 산소를 축내며 소음을 만드는 몬스터 크리처로 인식할 것인가? 동지를 기대했으나 실상은 성가시기만한 존재라는 게 현실적인 답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선택한 답을 이웃 관객도 나에 대해 똑같이 선택할 수 있다는 점이 문제다. 그렇기에 이 질문에 답하기 전에 우리는 남에게 대접받고자 하는 대로 남을 대접하라는 고전적인 황금률이나 게임 이론에서 말하는 죄수의 딜레마를 한 번쯤 되새겨 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