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세영 <Shame Shame Shame>
[작품리뷰] 아직 마침표 찍지 못한 연극에 대한 고민
김유진
164호
2019.07.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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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ame Shame Shame'의 진행은 이렇다. 극이 시작되기 전부터 한 남자가 반바지와 반팔 티, 어쩌면 속옷인 듯한 옷만 걸친 채 의자에 결박되어 사각의 무대 언저리에 앉아있다. 극이 시작되면 여자의 내레이션이 들리는데, 병에 걸려 젊은 나이임에도 기저귀를 차야 하는 자신을 소개한다. 이어지는 장면에서 안전모와 안전띠를...

말로 서술했지만, 은 언뜻 보아 미술 작품 같다. 배우는 발화하지 않고 그의 얼굴은 무표정하며 동작은 정적이다. 물과 물감과 연기가 번져나가지 않는다면, 그저 그림 넉 장을 차례로 본 듯하다. 혹은 오브제들을 통한 설치 미술이나 아주 정적인 리듬의 행위 예술 몇 컷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같이 ‘미술’같은 미장센 덕에 은 미적이다. 표정과 말이 지워져 배우도 오브제와 같이 배치된 첫 번째, 세 번째 장면의 무대는 미니멀한 시각적 아름다움에 대한 연출가의 강박과 계산을 드러낸다. 상징과 의미는 비워진 채 그저 배치와 기능만으로 무대 위로 소환된 두 번째 장면에서의 사물들은 마르셀 뒤샹의 <샘>을 상기시킨다. 정체를 모르게 점점 팽창하며 관객을 향해 다가오는 거대한 비닐의 물체는 크고 알 수 없는 것이 주는 공포와 쾌감, 즉 숭고(sublime)의 감정을 일으킴으로써 현대 미술의 주된 탐구체를 무대 위로 가져다 놓은 것 같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직전의 장면을 돌이켜 보았을 때, 세 번째 장면에서 배우의 바지 위로 번져 가는 물, 즉 남자의 방뇨는 숭고적 대상의 뒷면에 있는 아브젝시옹(abjection), 바로 더럽고 추한 것이 주는 쾌감과 맞닿아 있는데, 이는 어리둥절하고 당황한 관객들의 눈이 모순되게 그 대상을 향하게끔 잡아끄는 이유가 되었으리라. 그러므로 은 미적인 것과 숭고한 것이 더하는 쾌감이 작품의 표층을 감싸고 있다.
개별적이고 임의로 병치된 듯한 네 장면을 잇는 선은 내레이션으로 적은 양이나마 주어진 서사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갖지만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자신의 죄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살인의 피해자에 대한 수치심 없는 대중의 과한 반응에 ‘나’ 또한 수치심 없이 동조한다. 수치심을 구슬 삼아 개인과 타자, 그리고 사회를 엮어내는 내레이션은 미적으로 독립되어 자족적인 듯 보였던 각 장의 이미지들을 전체 서사의 구조 속에 재배치시킨다. 그리하여 많은 설명은 하지 않지만, 서사는 각 이미지들에 의미와 이야기(혹은 그 가능성)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로 해석되는 이미지들은 나아가 현실의 존재를 지운 듯한 미적이고 숭고한 쾌감의 대상으로서만 공기 중을 부유하지 않는다. 이야기로 말미암아은 미와 숭고의 층위 아래에 있는 현실의 무게를 상기시키려 하는 듯하다. 그리고 그 무게는 연기가 객석으로 번져나감과 함께 수치심의 대상에 대한 손끝이 관객에게도 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미적 쾌감 뒤로 번지듯 밀려오는 불편함, 혹은 불쾌감을 동반한다. 미학적으로 그리고 서사적으로 은 쾌와 불쾌가 버무려진 감정을 관객에게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개별적이고 임의로 병치된 듯한 네 장면을 잇는 선은 내레이션으로 적은 양이나마 주어진 서사이다. 말하자면 이렇다. ‘나’는 대소변을 가리지 못한다는 사실에 수치심을 갖지만 사이코패스 살인마는 자신의 죄에 수치심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살인의 피해자에 대한 수치심 없는 대중의 과한 반응에 ‘나’ 또한 수치심 없이 동조한다. 수치심을 구슬 삼아 개인과 타자, 그리고 사회를 엮어내는 내레이션은 미적으로 독립되어 자족적인 듯 보였던 각 장의 이미지들을 전체 서사의 구조 속에 재배치시킨다. 그리하여 많은 설명은 하지 않지만, 서사는 각 이미지들에 의미와 이야기(혹은 그 가능성)를 불어넣는다. 이야기로 해석되는 이미지들은 나아가 현실의 존재를 지운 듯한 미적이고 숭고한 쾌감의 대상으로서만 공기 중을 부유하지 않는다. 이야기로 말미암아

사실 불편함과 불쾌감은 또 다른 데서 일어난다. 내레이션을 통한 서사가 너무 강하거나 혹은 너무 흐릿하기 때문에서 오는 불만족 때문이다. 내레이션의 이야기가 무대 위의 장면들과 완벽하게 유기적이지 않고, 또 그러기엔 정보가 적기에 내레이션에 기댄 서사는 앞서 정리한 것처럼 한두 줄로 끝이 난다. 한두 줄로 정리된 서사는 그래서 오히려 모호함의 여지없이 너무나도 명징하게 무대 위의 이미지들에 의미를 부여할 위험을 낳는다. 수치심과 관련한 비판적 관점의 메시지가 너무 직접적이고 강해서 미적 쾌감을 낳던 장면들과 충돌하거나 혹은 그것들을 압도할 존재감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연출가의 변은 이 참여한 올해 서울변방연극제 사전 인터뷰에서 힌트를 얻을 수 있을 듯하다. 정세영은 극의 제목이 빌려온 Shirley & Company의 동명 노래가 춤을 추고 싶지만 추지 못하는 자가 느낄 부끄러움에 관한 것이라 설명하며, 이때의 수치심은 행동하지 못하고 어중간한 상태에 있는 자가 느껴야 할 감정이라 먼저 얘기한다. 이어서 그는 이번 작품이 분명 연극이고, 자신은 연극을 하고 있다고 한다.1) 연극, 무대미술, 그리고 무용을 차례로 전공한 자신의 작품 활동 가운데서 에게 연출가가 더하는 틀은 분명 연극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소 직접적인 듯한 서사의 조각들은 어중간한 상태에 놓여 있지 않아야 할 연극적 장치인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연극을 한다고 이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이제는 말하는 자 스스로의 수치심을 탐구한 결과인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제목 붙여진 그의 이전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대두되어 온 서사 중심의 드라마 이전 드라마에서의 연극의 특징을 포스트드라마(post-drama)적 요소들로 고민한 흔적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해당 작품은 연극보다는 무용과 미술의 정체성이 두드러졌다. 그러나에서 여전히 포스트드라마적인 서사의 존재감이 드러나는 것은 연극에 대한 그의 마무리되지 못한 고민의 흔적 때문일까? 그에게 연극 장르를 규정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규범일까 혹은 그 변방으로 밀려났던 요소들을 소환하는 과정일까? 연극을 하는 연출가의 답이 모호해서인지, 은 한편으로 미완이고 그래서 만족에 이르지 못해 불만이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연출가의 마음이 작품의 제목에 다 드러난 것 같아서, 그리고 그것이 너무나 치열하게 작품 가운데 벌려져 있어서, 결국 은 쾌와 불쾌를 버무린 아브젝시옹 혹은 숭고로 다가온다. 그러니 이번 작품이 미완이고 불만이지만, 혹은 또 그러하기에 그의 다음이 궁금하다.
그렇다면 이 작품은 연극을 한다고 이전에는 말하지 못했던, 그래서 이제는 말하는 자 스스로의 수치심을 탐구한 결과인가? <데우스 엑스 마키나>로 제목 붙여진 그의 이전 작품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으로 대두되어 온 서사 중심의 드라마 이전 드라마에서의 연극의 특징을 포스트드라마(post-drama)적 요소들로 고민한 흔적과 같았다. 그래서인지 해당 작품은 연극보다는 무용과 미술의 정체성이 두드러졌다. 그러나
[사진 제공: 제19회 서울변방연극제ⓒ한민주]
- 서울변방연극제 아티스트 인터뷰_정세영 https://blog.naver.com/mtfestival/221576308153
Shame Shame Shame
- 일자
- 2019.07.04(목) ~ 07.06(토)
- 장소
- 미아리고개예술극장
- 출연
- 정세영, 서재영, 이신실, 이재민
- 사운드디자인
- 김성환
- 무대감독
- 이신실
- 조명/무대디자인
- 정세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