옾프로젝트 <쇼코의 미소/빛의 호위>
[작품리뷰] ‘관극觀劇’이라는 연루의 형식
오혜진_문화연구자
164호
2019.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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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극 중 음료를 마셔도 되고, 무음 촬영을 해도 된다는 안내에 다소 의아해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기존 관극 규범을 위반해보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이 극단의 공간 배치는 과연 생소했다. 네 벽면 중 마주 보는 두 벽면이 객석으로 채워져 있고, 그 벽면들은 스크린이 되기도 했다. 마주 본 관객이 공통으로 응시하게 되는, 가운데에 마련된...
관극 중 음료를 마셔도 되고, 무음 촬영을 해도 된다는 안내에 다소 의아해하며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기존 관극 규범을 위반해보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이 극단의 공간 배치는 과연 생소했다. 네 벽면 중 마주 보는 두 벽면이 객석으로 채워져 있고, 그 벽면들은 스크린이 되기도 했다. 마주 본 관객이 공통으로 응시하게 되는, 가운데에 마련된 빈 공간이 곧 무대였다. 무대 한켠에는 의자 두 개가 나란히 놓여 있었는데, 그것들은 연극 <쇼코의 미소>에 등장하는 유일한 소품이었다.
2019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연희예술극장에서 열린 ‘옾프로젝트’의 작품 <쇼코의 미소/빛의 호위>는 각각 최은영과 조해진의 동명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두 개의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각각 따로 상연되며, 오직 두 명의 여성배우만 출연하고 최소한의 소품과 장치만 사용된다. 연극은 원작에 ‘충실’하다. 원작의 핵심적인 문장들을 거의 변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대사와 내레이션으로 만들었으며, 원작의 분위기와 정조, 주제에 대해 표 나는 재해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일종의 ‘낭독극’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연극의 이런 선택에 대해 누군가는 소극적이라고 말할 테지만, 반대의 질문도 가능하겠다. 이를테면, ‘이 연극은 어떻게 이 극도로 간소화된 규모와 무대 구성의 유연화만으로 원작의 아우라를 큰 누락 또는 변형 없이 보존할 수 있었을까. 이 요령 있는 ‘생략’과 ‘재배치’는 어떤 새로운 관람의 지평을 제공하는가.
2019년 7월 4일부터 7일까지 연희예술극장에서 열린 ‘옾프로젝트’의 작품 <쇼코의 미소/빛의 호위>는 각각 최은영과 조해진의 동명 단편소설을 연극으로 만든 것이다. 두 개의 작품은 1부와 2부로 나뉘어 각각 따로 상연되며, 오직 두 명의 여성배우만 출연하고 최소한의 소품과 장치만 사용된다. 연극은 원작에 ‘충실’하다. 원작의 핵심적인 문장들을 거의 변형하지 않은 채 그대로 대사와 내레이션으로 만들었으며, 원작의 분위기와 정조, 주제에 대해 표 나는 재해석을 시도하지 않았다.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일종의 ‘낭독극’에 가깝다고 판단한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연극의 이런 선택에 대해 누군가는 소극적이라고 말할 테지만, 반대의 질문도 가능하겠다. 이를테면, ‘이 연극은 어떻게 이 극도로 간소화된 규모와 무대 구성의 유연화만으로 원작의 아우라를 큰 누락 또는 변형 없이 보존할 수 있었을까. 이 요령 있는 ‘생략’과 ‘재배치’는 어떤 새로운 관람의 지평을 제공하는가.

우선 흥미로운 것은 연극 <쇼코의 미소>가 인물을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연극이 시작되고 두 여성배우가 등장하자, 관객은 이내 그녀들이 각각 ‘쇼코’와 ‘소유’의 역을 나눠 맡았으리라 짐작한다. 하지만 이 기대를 배반하듯, 두 배우는 모두 소유를 연기한다. 한 명이 현재 시점의 소유라면, 다른 한 명은 과거 고등학생 시절의 소유. 현재 시점의 소유를 맡은 배우는 과거와 현재 시점의 쇼코로 분하기도 한다. 소유의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현재의 ‘나’가 과거의 ‘나’를 돌아보며 지나버린 시간의 의미를 반추하는 데 반해, 연극은 한 인물을 두 명이 나눠 연기하게 함으로써 하나의 무대에서 두 개의 시간대를 동시에 펼쳐 보인다. 바닷가 시골마을에 살며 경상도 지역어를 구사하던 고등학생 소유를,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영화감독을 지망하는 시간 동안 서울말이 익숙해진 ‘현재’의 소유가 물끄러미 바라보는 식이다. 원작에서 소유와 쇼코에게 유사한 마음의 풍경을 선사한 인물인 둘의 할아버지는 무대에서 따로 인격화되지 않는다.
스크린의 역할도 인상적이다. 원작에서 일본인 쇼코와 한국인 소유는 각 학교 일학년 중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서 만났기에 둘의 대화는 영어로 이뤄진다. 한편, 소유의 할아버지는 영어를 모르지만 식민지기에 익힌 일본어가 제2의 모어였으므로 일본어를 통해 초점화자 소유를 매개하지 않고 쇼코와 내밀하고도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다채롭게 혼용되는 대화는 원작에서는 오직 한국어 표기를 통해서만 형상화된다. 반면, 연극은 원작에서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채 독자에게 전해지는 일본어와 영어 문장들을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 노출함으로써 소설이 중요하게 설정해둔, 이언어(異言語)가 관계의 ‘벽’이자 ‘문’으로 기능하는 순간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스크린의 역할도 인상적이다. 원작에서 일본인 쇼코와 한국인 소유는 각 학교 일학년 중 영어를 가장 잘하는 학생으로서 만났기에 둘의 대화는 영어로 이뤄진다. 한편, 소유의 할아버지는 영어를 모르지만 식민지기에 익힌 일본어가 제2의 모어였으므로 일본어를 통해 초점화자 소유를 매개하지 않고 쇼코와 내밀하고도 배타적인 관계를 형성할 수 있었다. 한국어, 일본어, 영어가 다채롭게 혼용되는 대화는 원작에서는 오직 한국어 표기를 통해서만 형상화된다. 반면, 연극은 원작에서 이미 한국어로 번역된 채 독자에게 전해지는 일본어와 영어 문장들을 스크린을 통해 관객에게 직접 노출함으로써 소설이 중요하게 설정해둔, 이언어(異言語)가 관계의 ‘벽’이자 ‘문’으로 기능하는 순간들을 보다 직접적으로 표현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관전 포인트는 관객으로 둘러싸인 공간을 무대로 삼았기에, 특정 순간에는 배우가 어느 한쪽의 관객을 등질 수밖에 없다는 점, 이 특수한 조건이 서사에 작용하는 방식이겠다. 소유가 정면을 보고 독백할 때 뒤쪽 관객은 그 순간 소유의 표정을 확인할 수 없지만, 그 반대의 상황도 반드시 벌어진다. 관객이 어느 방향에 배치되느냐에 따라 배우가 향한 방향은 정면일 수도, 후면일 수도 있다는 것. 따라서 관객은 무대 위에 일어나는 ‘모든’ 일을 다 ‘장악’할 수 있는 시좌를 확보할 수는 없다는 것. 내게는 이런 무대 설정과 배치가 ‘관계에 따라 말해지거나 혹은 말해지지 않는 인물의 내면적 진실’이 있음을 말하는 아래 인용문에 대한 꽤 그럴듯한 연극적 번역처럼 보였다.
“쇼코는 할아버지에게 늘 밝은 내용의 편지를 적어 보내는 것 같았다. (…) 반면 내가 받은 편지에는 어두운 이야기뿐이었다. (…) 당시에는 쇼코의 모순된 말들에 혼란을 느꼈다. 할아버지에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아니면 내게 하는 말이 진짜인지 판단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나는 그 두 종류의 편지가 모두 진실이었으리라고 짐작했다.”
2부 <빛의 호위> 무대 정리를 위해 관객은 잠시 퇴장한다. 15분 후 다시 극장에 들어섰을 때, <쇼코의 미소>의 무대였던 그곳은 전혀 다른 공간이 돼 있었다. 무대였던 가운데 공간이 객석으로 변해 있었고, 객석이었던 두 벽은 이경준 작가의 사진을 매개로 각각 뉴욕에 거하는 ‘수민’의 공간과 서울에 거하는 ‘권은’의 공간으로 양분됐다. 나머지 두 벽면에도 스크린과 무대가 설치됐다. 이제 사면 무대에 포위된 관객은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 사위를 살펴야 했다. 자, 과연 이 작품은 관객으로 하여금 이 수고스런 목운동을 반복하게 한 의도를 설득할 수 있을까.- 「쇼코의 미소」, 16~17쪽

<쇼코의 미소>가 소유와 쇼코가 함께한 아주 짧은 한여름의 며칠간을 핵심적인 서사적 시간으로 삼은 두 소녀의 성장담이었다면, <빛의 호위>가 서사적 배경으로 삼은 계절은 단연 겨울이다. <쇼코의 미소>가 미래를 기약 없는 가능성의 시간으로 상상하는 두 여학생의 패기와 좌절을 묘사했다면, <빛의 호위>는 ‘현재’를 설명하기 위해 과거를 탐색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다. 그래서 <쇼코의 미소>에 등장한 두 배우가 겨울옷을 입고 새 무대에 섰을 때, 나는 잠시 <빛의 호위>를 <쇼코의 미소>의 후편 또는 짝패로 상상해봤다.
소설 「빛의 호위」는 1인칭 주인공 ‘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원작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나’에게 ‘수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연극 <빛의 호위>가 시도한 가장 두드러진 도전일 것이다. 더구나 원작에서 ‘나’의 성별은 뚜렷하게 명시되지 않지만, “담임은 반장인 나와 부반장을 맡고 있던 여학생을 불러”(「빛의 호위」, 24쪽)라든지 “여자애와 단둘이 한방에 있는 게 어색했으면서도”(「빛의 호위」, 25쪽) 같은 구절은 이성애 규범이 디폴트인 서사 시장에서 ‘나’의 성별을 남자로 추측하도록 유도했다. 반면, 연극 <빛의 호위>에서 ‘수민’은 ‘여성’으로 패싱되는 외모로 등장하며, 원작에서 ‘나’가 ‘권은’과의 관계에서 감지했던 이성애적 긴장은 삭제돼 있다. 오히려 원작에서 ‘나’의 남성 성별이 필수적인 서사적 요건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 연극은 ‘나’를 젠더프리 혹은 젠더스위칭의 실험이 가능한 인물로 해석한 듯하다. 그렇게 했을 때 ‘수민’과 ‘권은’의 이야기는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쇼코의 미소」, 24쪽)라는 정당한 명제를 증빙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물론 ‘곤경’은 있었다. 소설 「빛의 호위」 초반에 권은은 ‘친구에게 받은 필름 카메라’ 때문에 사진작가가 됐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친구’가 바로 자신임을 꽤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다. ‘나’가 거듭된 우연 혹은 필연을 통해 권은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가는 시간, 나아가 권은에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은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서사화된다. 하지만 연극에서 그 반전 혹은 비밀은 성립하지 않는다. 3인칭 관찰자를 전제로 전개되는 연극에서 현재 시점의 수민이 곧 과거 권은의 어두운 방을 방문하던 ‘그’라는 진실은 수민보다 관객에게 먼저 누설된다.
소설 「빛의 호위」는 1인칭 주인공 ‘나’의 시점으로 전개된다. 원작에서 이름이 부여되지 않은 ‘나’에게 ‘수민’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연극 <빛의 호위>가 시도한 가장 두드러진 도전일 것이다. 더구나 원작에서 ‘나’의 성별은 뚜렷하게 명시되지 않지만, “담임은 반장인 나와 부반장을 맡고 있던 여학생을 불러”(「빛의 호위」, 24쪽)라든지 “여자애와 단둘이 한방에 있는 게 어색했으면서도”(「빛의 호위」, 25쪽) 같은 구절은 이성애 규범이 디폴트인 서사 시장에서 ‘나’의 성별을 남자로 추측하도록 유도했다. 반면, 연극 <빛의 호위>에서 ‘수민’은 ‘여성’으로 패싱되는 외모로 등장하며, 원작에서 ‘나’가 ‘권은’과의 관계에서 감지했던 이성애적 긴장은 삭제돼 있다. 오히려 원작에서 ‘나’의 남성 성별이 필수적인 서사적 요건이 아니었다는 점에 주목해 연극은 ‘나’를 젠더프리 혹은 젠더스위칭의 실험이 가능한 인물로 해석한 듯하다. 그렇게 했을 때 ‘수민’과 ‘권은’의 이야기는 “어떤 연애는 우정 같고, 어떤 우정은 연애 같다.”(「쇼코의 미소」, 24쪽)라는 정당한 명제를 증빙하는 또 하나의 사례로 이해될 수도 있었다.
물론 ‘곤경’은 있었다. 소설 「빛의 호위」 초반에 권은은 ‘친구에게 받은 필름 카메라’ 때문에 사진작가가 됐다고 말하는데, ‘나’는 그 ‘친구’가 바로 자신임을 꽤 오랫동안 깨닫지 못한다. ‘나’가 거듭된 우연 혹은 필연을 통해 권은에 대한 정보를 축적해가는 시간, 나아가 권은에게 ‘나’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확인하는 일련의 과정은 일종의 수수께끼처럼 서사화된다. 하지만 연극에서 그 반전 혹은 비밀은 성립하지 않는다. 3인칭 관찰자를 전제로 전개되는 연극에서 현재 시점의 수민이 곧 과거 권은의 어두운 방을 방문하던 ‘그’라는 진실은 수민보다 관객에게 먼저 누설된다.

연극 <빛의 호위>가 야심차게 단행한 또 하나의 실험은 수민과 권은이 마치 스노우볼 안을 들여다보듯 탐구했던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를 형상화하는 방식이다. 다큐멘터리는 1940~2000년대를 통어한 ‘노먼 마이어’와 ‘알마 마이어’, 그리고 ‘장 베른’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데, 연극은 한쪽 벽에 설치된 스크린을 통해 관객이 그 다큐멘터리 영상을 직접 시청하는 듯한 효과를 연출한다. 그리고 영상에 등장하는 알마 마이어와 장 베른의 이야기를 ‘극 중 극’처럼 연출하기도 했다. 특히 유대인 등록령을 피해 지하창고에 숨어 지내야 했던 전직 바이올리니스트 알마 마이어와, 그녀의 안위를 위해 위태로운 노력을 감행하는 장 베른이 서로에게 “인간적인 예의”(「빛의 호위」, 29쪽)를 다하는 지난한 시간들을 춤극의 한 장면처럼 연출한 대목은 이색적이었다.
요컨대 <빛의 호위>는 우리 모두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용기와 희생에 힘입어 생존과 안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진실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흩어진 인물들이 연루된 사연을 추적함으로써 증명해낸다. 노먼 마이어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알마 마이어를 살린 장 베른의 삶을 남몰래 좇아온 시간, 권은이 자신과 닮은 알마 마이어의 사연을 접하고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를 구해보려고 기울인 노력, 수민이 권은의 정체를 알기 위해 권은이 남긴 말을 단서 삼아 과거 기억을 더듬고, 권은의 블로그를 탐독하는 과정은 이 ‘진실’에 닿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연극 <빛의 호위>가 관객으로 하여금 50여 분간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 사면 무대의 정황을 살피는 수고를 감내하기를 요구한 것은, 이 겹겹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 직접 동참해보라는 제안에 다름 아니었다고. 그러니 어쩌면 관극 끝에 남은 목 근육의 미세한 통증은 우리가 극중 인물이 감행하는 추적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체현할 수 있도록 기획된 ‘수행(performance)’의 결과일지 모른다. 즉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꽤 충만한 ‘관극’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요컨대 <빛의 호위>는 우리 모두 부지불식간에 타인의 용기와 희생에 힘입어 생존과 안위를 지켜낼 수 있었다는 진실을 서로 다른 시간과 공간에 흩어진 인물들이 연루된 사연을 추적함으로써 증명해낸다. 노먼 마이어가 자신과 자신의 어머니 알마 마이어를 살린 장 베른의 삶을 남몰래 좇아온 시간, 권은이 자신과 닮은 알마 마이어의 사연을 접하고는 헬게 한센의 다큐멘터리를 구해보려고 기울인 노력, 수민이 권은의 정체를 알기 위해 권은이 남긴 말을 단서 삼아 과거 기억을 더듬고, 권은의 블로그를 탐독하는 과정은 이 ‘진실’에 닿기 위해서는 인위적인 ‘노력’이 필요하다는 점을 역설하는 듯하다.
그렇다면 이제 이렇게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연극 <빛의 호위>가 관객으로 하여금 50여 분간 끊임없이 고개를 돌려 사면 무대의 정황을 살피는 수고를 감내하기를 요구한 것은, 이 겹겹의 진실을 추적하는 과정에 직접 동참해보라는 제안에 다름 아니었다고. 그러니 어쩌면 관극 끝에 남은 목 근육의 미세한 통증은 우리가 극중 인물이 감행하는 추적의 시간을 물리적으로 체현할 수 있도록 기획된 ‘수행(performance)’의 결과일지 모른다. 즉 부지불식간에 우리는, 꽤 충만한 ‘관극’의 시간을 보낸 것이다.
[사진제공: 옾프로젝트]
쇼코의 미소, 빛의 호위
- 일자
- 2019.07.04(목) ~ 07.07(일)
- 장소
- 연희 예술극장
- 공동창작
- 김다빈, 김혜성, 안윤조
- 원작
- 최은영, 조해진
- 조명
- 류승열
- 영상
- 임유정
- 음향
- 정혜수
- 무대어시스턴스/홍보물
- 이정아
- 오퍼레이터
- 이로운
- 사진
- 이경준
- OFO PROJ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