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별의 오로라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극단 성북동비둘기 <성북동비둘기 Bye Cycle>
[세대교차] 다시 온 화제작
임승태
165호
2019.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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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은 일회적이다. 그래서 놓친 공연이 좋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쉬움은 상당하다. 다행히 어떤 공연들은 간절히 바라고 잘 버티다 보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막상 공연을 보면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감탄할 때도 있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인지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과거에 좋아서 다시 볼 때도 마찬가지다. 공연도 나도 변했고, 나와 공연이 만나는 상...
공연은 일회적이다. 그래서 놓친 공연이 좋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쉬움은 상당하다. 다행히 어떤 공연들은 간절히 바라고 잘 버티다 보면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막상 공연을 보면 과연 명불허전이라고 감탄할 때도 있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탓인지 실망스러울 때도 있다. 과거에 좋아서 다시 볼 때도 마찬가지다. 공연도 나도 변했고, 나와 공연이 만나는 상황이 또 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좋았던 공연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은 양가적이다. 좋았던 순간을 다시 경험하고 싶은 희망과 다시 보고 실망할 수도 있다는 불안이 공존한다. 재공연에 임하는 창작자들의 마음도 다르지는 않을 것이다. 관객들이 변화를 원할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전처럼만 해주기를 바랄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확신하기 어렵다. 어쩌면 좋은 것을 다시 하고 다시 보고픈 마음은 일회성이란 공연의 준엄한 원리를 거스르는 우리의 어리석음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결과물에서 종종 창작자와 관객 모두가 새로운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기에 우리는 오늘도 이 어리석음에 판돈을 걸게 된다. 몇 해 전 화제를 모았던 작품들이 재공연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망설이지 않고 예약을 한 자의 변명이 길었다.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Makeup to Wakeup 2>
(사진: 황가림)
공연장에 들어섰을 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중앙 무대가 아닌 입구와 무대 앞뒤 한쪽에 문발처럼 걸려 있던 줄자였다. 조명을 받아 영롱한 빛을 발하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깨달았다. 늘어난 허리둘레를 가차 없이 폭로하지 않을 땐 저 물건도 저렇게 예쁠 수 있음을.
초반의 줄거리만 놓고 보자면 이 작품은 미스터리 호러의 외피를 두른 블랙 코미디다. 여성들이 잇달아 실종되는 의문의 사건이 벌어지는데 납치범의 실체를 도무지 알 수 없다. ‘하이드 비하인드’라고 불리게 되는 이 사건과 관련하여 이런저런 괴담이 퍼지고 그중 유행 지난 ‘일자 눈썹’을 하고 있는 사람이 납치범의 타겟이 된다는 가설이 유력하다. 사람들은 어디선가 자기를 보고 있을 납치범을 의식하기 시작하며 내 외모가,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외모가 혹시라도 유행에 뒤처지지 않았는지 염려한다. 매 순간 서늘한 기운을 느낀다. 호흡곤란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생긴다. 그런 와중에 여성들을 위한 새로운 시민사회 운동이 출범한다. 이름하여 새뷰티운동. 이 운동의 리더는 뷰티가 안전이고 자유며 또한 권력이라며, 회원들이 ‘정상 체중’이란 허상에 속지 말고 끊임없이 자신의 아름다움을 (되)찾도록 일깨운다. 새뷰티운동이 이내 대안으로 확산되지만, 유감스럽게도 하이드 비하인드 사건은 사라지지 않을뿐더러 새뷰티운동에서 극단적 다이어트를 하던 참가자가 죽음에 이르는 일이 벌어지고 만다. 이 과정에서 새뷰티운동이 모 화장품회사와 유착관계에 있는 영리사업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여성들의 실망과 불안이 가중된다.
기획 의도와 메시지가 매우 선명하다는 것이 적어도 이 공연에서는 미덕이다. 예쁨을 강요당해본 여성들 대부분이 충분히 반길만한 내용이고, 이번 재공연은 그러한 보편적 공감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유행에 맞게 화장하고 옷 입고 얼굴과 몸을 고치는 것이 언젠가부터 당연시되는 세상에 맞서자, 혹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그리 특별하지 않으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연극의 중심 관객층인 젊은 여성들은 이 당연한 메시지를 그동안 극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음에 분노하고 이런 목소리가 극장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채우기를 요구하고 있다. 창작진과 관객 모두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획 의도와 메시지가 매우 선명하다는 것이 적어도 이 공연에서는 미덕이다. 예쁨을 강요당해본 여성들 대부분이 충분히 반길만한 내용이고, 이번 재공연은 그러한 보편적 공감에 힘입은 바가 클 것이다. 유행에 맞게 화장하고 옷 입고 얼굴과 몸을 고치는 것이 언젠가부터 당연시되는 세상에 맞서자, 혹은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이 작품의 메시지는 그리 특별하지 않으며 구체적 대안을 제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현재 한국 연극의 중심 관객층인 젊은 여성들은 이 당연한 메시지를 그동안 극장에서 찾아보기 힘들었음에 분노하고 이런 목소리가 극장을 더 많이 그리고 더 자주 채우기를 요구하고 있다. 창작진과 관객 모두 세 번째 시즌을 준비하고 기다려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사진: 황가림)
만약 시즌 3에서도 블랙 코미디를 표방한다면 더 신랄한 풍자로 채워지길 바란다. 장면 전환 시 무대 위에서 속옷에 가까운 차림으로 그것도 꼭 끼는 옷을 힘겹게 덧입는 모습은 보고 있기 애처로웠다. 의상을 갈아입는 행위가 그 자체로 전달하는 메시지가 분명히 있으나 애처로움, 연민을 느낄 때마다 점점 더 웃기 어려워진다. 마지막 장면도 그러하다. 편안한 옷차림을 한 두 배우가 스폿 조명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몸짓으로 무대를 누비는 장면이 전하는 의미는 비교적 명확하다. 하지만 그 순간 하이드 비하인드 납치범을 비롯해 코미디를 위해 마련했던 모든 요소가 더이상 자리할 곳이 없어지고, ‘타인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살자’는 계몽적 메시지가 갑자기 두드러진다. 블랙 코미디를 고수할 필요는 없으나, 문제의식을 공유한 관객들이 한바탕 웃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수 있다.
<성북동비둘기 Bye Cycle>
5년 전 크게 주목받은 <자전거>의 재공연이지만 ‘자전거’라는 말도 원작자 이름도 사라졌다. 원작자가 재공연을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도 들리지만, 그보다는 2017년 연극계 미투 운동의 중요한 가해자의 이름과 작품을 성북동비둘기의 역사에서 지우겠다는 의지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공연 전단에는 2014년 공연 및 수상 내역이 검은색 펜으로 지워져 있었다.
초연이 원작의 등기소 화재 사건과 그해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병치시켰다면 이번에는 6·25 전쟁이 있던 자리를 5·18 광주로 대체했다. 적절한 대체물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재공연을 위해선 다행스러운 일일지만 그만큼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던 우리 역사가 서글프다. 이 공연은 그러한 순환(Cycle)에 고하는 작별(Bye), 혹은 작별을 고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자조다.
초연이 원작의 등기소 화재 사건과 그해 있었던 세월호 참사를 병치시켰다면 이번에는 6·25 전쟁이 있던 자리를 5·18 광주로 대체했다. 적절한 대체물을 찾을 수 있는 것이 재공연을 위해선 다행스러운 일일지만 그만큼 비슷한 일이 반복되었던 우리 역사가 서글프다. 이 공연은 그러한 순환(Cycle)에 고하는 작별(Bye), 혹은 작별을 고해도 여전히 남아 있는 것에 대한 자조다.
(사진제공: 극단 성북동비둘기)
공연은 한 배우(김근환)가 자신을 “연출을 맡은 김현탁”이라고 소개하는 새빨간 거짓말로 시작한다. ‘김현탁’은 원작 윤서기의 부재를 대체하는 기표이며, 원작자로부터 벗어나 자기 작품을 하겠다는 의지를 드러낸 연출의 서명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번 공연은 원작이나 2014년 초연과 무관하게 독립된 작품으로도 충분히 볼 수 있다. 다만 그러한 맥락이 이 공연을 훨씬 더 입체적으로 보게 만든다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다.
이번에도 관객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영사기를 돌려야 그 조명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그동안 발전기나 영사기의 효율이 좋아진 덕분일까. 5년 전 자전거 10대가 마련되었던 반면 이번에는 객석 중앙에 1대만 놓여 있었다. 자전거에 오르도록 지목받았을 때 종아리가 부실한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걱정과 달리 페달을 밟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작 무거운 것은 마음이었다. 관객이 공연을 완성한다는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연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꽤 긴장되는 일이었다. 계속 페달을 밟으라는 것 외에 아무런 지시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얼마나 밟을지는 즉석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나의 체력도 기계의 상태도 정확히 모르기에 무작정 열심히 밟을 수밖에 없다. 조금 익숙해질 즈음엔 체력 소모도 줄이고 바퀴 소음을 줄여 무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의 속도를 찾아본다. 장면 전환을 위해 배우가 영사기 앞에 와서 몸으로 불빛을 가릴 땐 나도 잠시 멈춰도 될 것 같은데, 그러다 혹시라도 암전이 될까 봐 혹은 어느덧 백색 소음으로 자리한 바퀴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공연자들과 주변 관객들에게 괜한 변수로 작동하면 어쩌나 싶어 멈추지 못한다. 공연을 멈출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막상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권한을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6·25가 5·18로 대체되면서 올림픽 장면은 더 선명해졌다. ‘땡전 뉴스’로 88 서울올림픽 개최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모든 배우가 운동복 차림으로 가슴에 각 나라/지역 표시를 달고 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배우들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 동안 1위 국가를 대표하는 배우가 선두로 나와 개최년도, 참가인원 등을 외치고 맨 뒤에서 ‘김현탁’ 역의 배우가 대한민국의 참가 여부와 순위를 말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묘한 동질감을 느꼈으며 심지어 나의 편안한 페달 질이 조금 민망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소개가 끝나자 ‘김현탁’은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나머지 배우들은 스케이트 지치는 동작으로 바꾸더니 동계올림픽을 이어간다. 하지만 ‘김현탁’이 쓰러져 있어 1924년을 지나가지 못한다. 결국 ‘김현탁’은 쌍욕을 듣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참가 여부를 말하고 나서야 동계올림픽 연혁도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자전거 위의 내가 지쳐 쓰러졌다면 나도 저 욕을 듣지 않았을까.
정보적 측면에서 올림픽 장면은 대단히 쓸데없다. 어느 나라가 1위를 했는지 한국이 언제 메달을 몇 개나 땄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있다 해도 구글이나 시리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80년 광주로 향해야 했던 에너지와 정신을 휘발시켜버린 3S 정책에 던져야 했던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공연 후반부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는 것도 초연과 동일하다. 하지만 여기에 미투 운동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다. 할리우드 배우가 제작자에게 당한 성폭행을 폭로하는 연설이 영어로 전달된다. 통역을 맡은 ‘김현탁’은 이 연설을 광주에서 진압대의 폭력에 희생당한 아버지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권력자가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고 때로는 감춰지는 측면에서 유사성이 드러난다.
초연에서 이문세의 노래 “붉은 노을”을 통해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그 세월 속에 잊어야 할 기억들”)와 더불어 세월호를 선거에 이용하는 정치 세력을 희화화했다면, 이번에는 그와 더불어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운영했던 나이트클럽을 연상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저 타는 붉은 노을처럼”) 또한 미투 운동 이후의 변화된 지점이다. 물론 미투 운동으로 인한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원작 제목과 원작자의 탈락에서 찾아야 한다.
김현탁의 연극은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나오는 직소 퍼즐이기보다는 관객이 공연의 각 요소와 그로 인한 연상작용으로부터 자기만의 그림과 이야기를 구축해가도록 초대하는 놀이다. 그는 동시대 현실을 재료로 즐겨 사용하지만, 그 재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은 덕분에 받은 초대권으로 주말에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 사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이 있었고 주말 공연엔 일본어 몇 마디와 ‘평화의 소녀상’ 이미지가 추가되었다. 이 발 빠른 반응은 현 시국에 대한 연출가의 입장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엄중한 현실을 그저 유희의 대상으로 소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초연 당시 합평회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배우들이 세월호 추모하는 데 가면서 자기더러 안 가냐고 묻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연극으로 해 보겠다.” 건투를 빈다. 더 안전한 세상을, 공정한 과정을, 정의로운 결과를 김현탁이 연극으로 해내길 기대한다.
이번에도 관객이 자전거 페달을 밟아 영사기를 돌려야 그 조명으로 공연이 진행된다. 그동안 발전기나 영사기의 효율이 좋아진 덕분일까. 5년 전 자전거 10대가 마련되었던 반면 이번에는 객석 중앙에 1대만 놓여 있었다. 자전거에 오르도록 지목받았을 때 종아리가 부실한 나는 잠시 망설였지만, 걱정과 달리 페달을 밟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정작 무거운 것은 마음이었다. 관객이 공연을 완성한다는 이론적 차원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공연에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꽤 긴장되는 일이었다. 계속 페달을 밟으라는 것 외에 아무런 지시가 없기 때문에 어떻게 얼마나 밟을지는 즉석에서 스스로 찾아야 한다. 처음에는 나의 체력도 기계의 상태도 정확히 모르기에 무작정 열심히 밟을 수밖에 없다. 조금 익숙해질 즈음엔 체력 소모도 줄이고 바퀴 소음을 줄여 무대에 더 집중할 수 있도록 최적의 속도를 찾아본다. 장면 전환을 위해 배우가 영사기 앞에 와서 몸으로 불빛을 가릴 땐 나도 잠시 멈춰도 될 것 같은데, 그러다 혹시라도 암전이 될까 봐 혹은 어느덧 백색 소음으로 자리한 바퀴 소리가 사라지는 것이 공연자들과 주변 관객들에게 괜한 변수로 작동하면 어쩌나 싶어 멈추지 못한다. 공연을 멈출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부여받았으나 막상 민폐를 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에 그 권한을 감히 사용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6·25가 5·18로 대체되면서 올림픽 장면은 더 선명해졌다. ‘땡전 뉴스’로 88 서울올림픽 개최 소식이 전해지고 이어 모든 배우가 운동복 차림으로 가슴에 각 나라/지역 표시를 달고 나와 달리기 시작한다. 배우들이 제자리 뛰기를 하는 동안 1위 국가를 대표하는 배우가 선두로 나와 개최년도, 참가인원 등을 외치고 맨 뒤에서 ‘김현탁’ 역의 배우가 대한민국의 참가 여부와 순위를 말한다. 자전거 페달을 밟고 있던 나는 그 순간 묘한 동질감을 느꼈으며 심지어 나의 편안한 페달 질이 조금 민망했다. 2020년 도쿄 올림픽까지 소개가 끝나자 ‘김현탁’은 지쳐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나머지 배우들은 스케이트 지치는 동작으로 바꾸더니 동계올림픽을 이어간다. 하지만 ‘김현탁’이 쓰러져 있어 1924년을 지나가지 못한다. 결국 ‘김현탁’은 쌍욕을 듣고 일어나서 대한민국 참가 여부를 말하고 나서야 동계올림픽 연혁도 끝까지 나아갈 수 있었다. 자전거 위의 내가 지쳐 쓰러졌다면 나도 저 욕을 듣지 않았을까.
정보적 측면에서 올림픽 장면은 대단히 쓸데없다. 어느 나라가 1위를 했는지 한국이 언제 메달을 몇 개나 땄는지 궁금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으며 있다 해도 구글이나 시리가 더 빠르고 정확하게 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왜 이런 쓸데없는 일에 많은 시간과 에너지를 소모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80년 광주로 향해야 했던 에너지와 정신을 휘발시켜버린 3S 정책에 던져야 했던 것이기도 하다.
세월호 참사가 공연 후반부의 주된 재료로 사용되는 것도 초연과 동일하다. 하지만 여기에 미투 운동이라는 새로운 요소가 더해졌다. 할리우드 배우가 제작자에게 당한 성폭행을 폭로하는 연설이 영어로 전달된다. 통역을 맡은 ‘김현탁’은 이 연설을 광주에서 진압대의 폭력에 희생당한 아버지 이야기로 바꿔놓는다. 권력자가 휘두르는 폭력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이러한 사건들이 미디어를 통해 소비되고 때로는 감춰지는 측면에서 유사성이 드러난다.
초연에서 이문세의 노래 “붉은 노을”을 통해 세월호 희생자에 대한 애도(“그 세월 속에 잊어야 할 기억들”)와 더불어 세월호를 선거에 이용하는 정치 세력을 희화화했다면, 이번에는 그와 더불어 이 노래를 리메이크했던 아이돌 그룹의 멤버가 운영했던 나이트클럽을 연상시키는 데까지 나아가는 것(“저 타는 붉은 노을처럼”) 또한 미투 운동 이후의 변화된 지점이다. 물론 미투 운동으로 인한 가장 결정적인 변화는 원작 제목과 원작자의 탈락에서 찾아야 한다.
김현탁의 연극은 흩어진 조각들을 이어 붙이면 하나의 큰 그림이 나오는 직소 퍼즐이기보다는 관객이 공연의 각 요소와 그로 인한 연상작용으로부터 자기만의 그림과 이야기를 구축해가도록 초대하는 놀이다. 그는 동시대 현실을 재료로 즐겨 사용하지만, 그 재료에 어떠한 의미를 부여할 것인가는 어디까지나 관객의 몫이다. 자전거 페달을 밟은 덕분에 받은 초대권으로 주말에 다시 극장을 찾았다. 그 사이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배제 결정이 있었고 주말 공연엔 일본어 몇 마디와 ‘평화의 소녀상’ 이미지가 추가되었다. 이 발 빠른 반응은 현 시국에 대한 연출가의 입장을 은유적으로 드러내는 방식으로도, 엄중한 현실을 그저 유희의 대상으로 소모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초연 당시 합평회에서 그는 이런 말을 했다. 배우들이 세월호 추모하는 데 가면서 자기더러 안 가냐고 묻는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저는 연극으로 해 보겠다.” 건투를 빈다. 더 안전한 세상을, 공정한 과정을, 정의로운 결과를 김현탁이 연극으로 해내길 기대한다.
메이크업 투 웨이크업 2
- 일자
- 2019.07.26(금) ~ 08.11(일)
- 장소
-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
- 공동구성/연출/출연
- 김정, 황은후
- 공동구성/드라마터그
- 권세미
- 조연출
- 신지원
- 무대
- 이상홍
- 조명디자인
- 성미림
- 의상디자인
- 김미나
- 영상디자인
- 강수연
- 사운드디자인
- 강하늘
- 기술감독
- 강경호
- 움직임워크숍
- 김신록
- 오퍼레이터
- 김정아, 이진주
- 그래픽
- 황가림
- 기획
- 나희경
- 사막별의 오로라
성북동비둘기 Bye Cycle
- 일자
- 2019.07.30(화) ~ 08.18(일)
- 장소
- 한남대로 158 (성북동비둘기 연극실험실)
- 작/연출
- 김현탁
- 출연
- 성석주, 김미옥, 박보현, 김근환, 김정희, 곽영현, 이경우, 변경민
- 제작감독
- 이진성
- 기술감독
- 지대현
- 기획/홍보
- 최영미
- 조연출
- 안지현
- 극단 성북동비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