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이정화, 이산, 아베 쿠니코, 오타 유미코 <바람의 포옹>
[작품리뷰] 나에게 말하는 그 여자의 단단한 팔
최하은_연출가, 비평가
165호
2019.08.08
주소가 복사되었습니다
Ctrl + V, 붙여넣기해서 사용하세요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칠월의 어느 저녁, 번화가 신촌의 한구석, 자동차가 올라가기에 벅찰 정도로 심하게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한 신촌문화발전소를 찾았다. 새로 지어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극장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아주 작고 단출했으며, 객석을 찾은 관객은 부모에게 이끌려온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열 명 남짓 되었다. 공연에 대한...
여름이 무르익어가는 칠월의 어느 저녁, 번화가 신촌의 한구석, 자동차가 올라가기에 벅찰 정도로 심하게 경사진 언덕 위에 위치한 신촌문화발전소를 찾았다. 새로 지어져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지 않은 이 극장은 깨끗하기는 하지만 아주 작고 단출했으며, 객석을 찾은 관객은 부모에게 이끌려온 어린아이들을 포함해 열 명 남짓 되었다. 공연에 대한 소개를 받았을 때, 이것이 ‘마임 공연’이며 ‘내가 이제까지 보아왔던 공연들과는 다소 결이 다를 것’이라는 말을 들었다. 평소 현대무용을 비롯한 움직임 공연에 관심이 많으니 걱정 마시라는 말로 답변하기는 했지만, 사실 달변하지 않는 - 아니 전혀 ‘말’하지 않는 작품에 대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염려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박이정화
<바람의 포옹>은 세 명의 여성 마임이스트 박이정화, 이산, 그리고 일본의 아베 쿠니코가 각각 10분 남짓의 짧은 솔로 마임 작품을 보여주는 옴니버스 마임 공연이었다. 박이정화의 <마임 라푼첼>, <사랑, 쓰다>, 아베 쿠니코의 <나의 보름달>, 이산의 <벌레>, <구름텃밭>, <꽃그늘 아래> 총 여섯 작품이 연이어 상연되었다. 막간극으로 간단한 움직임 표현을 관객이 맞춰보는 퀴즈 시간도 제공되었으며, 작품과 작품을 오타 유미코의 서정적이고 재치 있는 아코디언 연주와 퍼포먼스가 채워주었다.
동화나 판타지적 상상, 일상의 사소한 해프닝 등을 기반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웃음과 감동에 주안점을 둔 것들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부하는 예리한 시선이라든가 강력하게 부정을 성토하는 목소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제까지 주로 보아온 공연들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셈이다. 여름 저녁, 언덕 위의 작은 극장, 부모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찾는 공연. 그런 정도로 <바람의 포옹>을 다소 나이브하게 정의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연을 지켜보며 두 가지 흥미로운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가지는 마임과 같은 무언극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오류 가능성이었고, 또 한 가지는 내 눈앞에서 움직임 공연을 수행하고 있는 몸들에 대한 발견이었다.
동화나 판타지적 상상, 일상의 사소한 해프닝 등을 기반으로 구성된 이 작품들은 대체적으로 웃음과 감동에 주안점을 둔 것들로, 우리 사회의 문제를 해부하는 예리한 시선이라든가 강력하게 부정을 성토하는 목소리 따위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이제까지 주로 보아온 공연들과는 결이 달라도 너무 달랐던 셈이다. 여름 저녁, 언덕 위의 작은 극장, 부모들이 아이의 손을 잡고 찾는 공연. 그런 정도로 <바람의 포옹>을 다소 나이브하게 정의내릴 수도 있었다.
그러나 공연을 지켜보며 두 가지 흥미로운 생각이 나를 사로잡았다. 한 가지는 마임과 같은 무언극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의 오류 가능성이었고, 또 한 가지는 내 눈앞에서 움직임 공연을 수행하고 있는 몸들에 대한 발견이었다.
아베 쿠니코
이것은 나만의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마임 공연’, ‘움직임 공연’, 혹은 그 창작자/퍼포머들에 대한 인식은 달변하는 ‘유언극’들과 그 창작자들에 대한 인식에 비하면, 어떤가? 왜 마임 공연은 이른바 ‘주류 연극계’에서 다루는 대상에서 흔히 배제되는가? 왜 마임 축제나 거리극, 아동청소년극들에서나 그들의 이름이 호명되는가? 왜 나는 이제까지 그런 공연들과는 결이 다른, 말 많은 유언극들을 봐온 사람이었나? 그건 아마도 유언극이 무언극에 비해 보다 예술적이고, 논리적이고, 철학적이며 보는 이의 지적 사고를 자극할 수 있다는, 쉽게 말해 보다 우월하다는, 아무도 그다지 대놓고 언급하고 싶어 하지 않은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물론 인간 지성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고도로 발달해왔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유언극들은 실제로 무언극들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보의 발화가 아닌 수용의 입장에서 살펴보았을 때 무언극은, 적어도 <바람의 포옹>은 관객인 나에게 유언극들과는 전혀 다른 지적 반응을,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요구하고 유발하는 작품이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발화되는 언어’를 배제했기에, 관객들은 고도의 집중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퍼포머들 개별의 몸이 지칭하는 ‘움직이는 언어’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유언극을, 아니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일반을 구성하는 아주 근본적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치명적이지만 간과되어온 진실은, 우리는 어쩌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말하면 누군가가 알아듣는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수반하지 않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개별적 존재인 ‘나’와 ‘나’가 서로에게 가닿고자 끊임없이 시도한 끝에 얻어낸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그것은 지루하고 지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소통에 성공했을 때 얻게 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이다. 이로써 고요함 속에 서사와 정서를 전달하고자 움직이는 마임이스트 배우와, 그것을 바라보며 전달받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관객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애와 같은 것마저 형성된다.
물론 인간 지성이 언어라는 매개를 통해 고도로 발달해왔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유언극들은 실제로 무언극들에 비해 훨씬 많은 정보를 전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정보의 발화가 아닌 수용의 입장에서 살펴보았을 때 무언극은, 적어도 <바람의 포옹>은 관객인 나에게 유언극들과는 전혀 다른 지적 반응을,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요구하고 유발하는 작품이었다. 우리 모두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발화되는 언어’를 배제했기에, 관객들은 고도의 집중력과 추리력을 발휘해 퍼포머들 개별의 몸이 지칭하는 ‘움직이는 언어’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것은 대부분의 유언극을, 아니 우리 사회의 커뮤니케이션 일반을 구성하는 아주 근본적인 교리에 의문을 제기한다. ‘우리는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당연히 서로를 이해할 수 있다.’ 치명적이지만 간과되어온 진실은, 우리는 어쩌면 같은 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게 아닐지도 모르며, 우리는 서로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말하면 누군가가 알아듣는다는 것은, 인위적인 노력을 수반하지 않는 자연 현상이라기보다는, 서로 완전히 다른 개별적 존재인 ‘나’와 ‘나’가 서로에게 가닿고자 끊임없이 시도한 끝에 얻어낸 일종의 사회적 약속이다. 그것은 지루하고 지난할 수 있다. 그러나 마침내 소통에 성공했을 때 얻게 되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이다. 이로써 고요함 속에 서사와 정서를 전달하고자 움직이는 마임이스트 배우와, 그것을 바라보며 전달받고자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관객 사이에는 일종의 동지애와 같은 것마저 형성된다.
이산
또 다른 발견은 말할 나위 없이 이 공연의 퍼포머 셋이 ‘여성’ 마임이스트들이었다는 점이다. 살면서 당신은 몇 명의 여성 마임이스트를 만나 보았나? 부끄럽게도 나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여성 배우나 무용수는 수없이 보았어도, 스스로를 마임이스트로 정의하고 마임 공연을 퍼포밍하는 여성을 난생 처음, 그것도 한 번에 세 명이나 만난 것이다.
그들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 내 눈을 처음 사로잡은 것은 그들의 팔다리였다. 한때 현대무용 마니아가 되어 서울에서 하는 거의 모든 현대무용 공연을 보러 다녔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후유증과 같은 것으로 나는 무대에 서는 움직임 퍼포머들의 몸을 면밀히 뜯어보는 좋지 못한 습관이 생겼다. 내가 발견한 여성 무용수들은, 그것이 클래식 발레가 아니라 현대무용 공연들이었음에도 대다수가 지극히 마른 체형과 미끈한 근육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그들의 오랜 세월의 트레이닝이 낳은 자랑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만 말하건대, 나는 이제까지 백 편이 훨씬 넘는 현대무용 작품을 관람했음에도, 단 한 명의 ‘살집 있는’ 내지는 최소한 ‘튼튼한’ 몸의 여성 무용수를 목격한 바가 없다(튼튼한 몸의 남성 무용수는 꽤 쉽게 목격했다). 그러한 현실은 나를 포함한 많은 무용 또는 공연예술의 관객들로 하여금, 몸을 사용하는 여성 퍼포머는 반드시 마르고 미끈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하기 위해 논문검색사이트에 ‘여성 무용수’를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 결과 첫 페이지의 논문들이 여성 무용수들의 예술적 성취가 아닌, 그들의 에너지 소비량, 식욕조절 호르몬, 체지방률, 체질량 지수, 섭식 태도와 섭식 장애를 다루는 논문들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러나 <바람의 포옹>에서 만난 박이정화, 이산, 아베 쿠니코 세 명의 배우들의 체형은 제각각이었다. 마른 사람도 있었지만 팔다리가 튼튼하고 굵직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서로 다르게 생긴 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유연하고 강인하게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나는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내가 알던 여성 퍼포머들에 비하면 너무 제각각인 체형’에 놀랐던 나는, 어느 순간엔가 그들의 몸의 모양을 뜯어보기를 저절로 그만두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보아지기 위한 신체가 아니라 기능하는 신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무대에 나타났을 때, 내 눈을 처음 사로잡은 것은 그들의 팔다리였다. 한때 현대무용 마니아가 되어 서울에서 하는 거의 모든 현대무용 공연을 보러 다녔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때의 후유증과 같은 것으로 나는 무대에 서는 움직임 퍼포머들의 몸을 면밀히 뜯어보는 좋지 못한 습관이 생겼다. 내가 발견한 여성 무용수들은, 그것이 클래식 발레가 아니라 현대무용 공연들이었음에도 대다수가 지극히 마른 체형과 미끈한 근육의 형태를 갖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당연히 그들의 오랜 세월의 트레이닝이 낳은 자랑스러운 결과일 것이다. 그것을 비난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실만 말하건대, 나는 이제까지 백 편이 훨씬 넘는 현대무용 작품을 관람했음에도, 단 한 명의 ‘살집 있는’ 내지는 최소한 ‘튼튼한’ 몸의 여성 무용수를 목격한 바가 없다(튼튼한 몸의 남성 무용수는 꽤 쉽게 목격했다). 그러한 현실은 나를 포함한 많은 무용 또는 공연예술의 관객들로 하여금, 몸을 사용하는 여성 퍼포머는 반드시 마르고 미끈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추측하게 했다. 그리고 실제로 나는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하기 위해 논문검색사이트에 ‘여성 무용수’를 검색했다. 그런데 검색 결과 첫 페이지의 논문들이 여성 무용수들의 예술적 성취가 아닌, 그들의 에너지 소비량, 식욕조절 호르몬, 체지방률, 체질량 지수, 섭식 태도와 섭식 장애를 다루는 논문들이었다는 사실은 무엇을 시사하는가.
그러나 <바람의 포옹>에서 만난 박이정화, 이산, 아베 쿠니코 세 명의 배우들의 체형은 제각각이었다. 마른 사람도 있었지만 팔다리가 튼튼하고 굵직한 사람도 있었다. 그들의 서로 다르게 생긴 몸들이 각자의 방식으로 유연하고 강인하게 움직이면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모습을 나는 홀린 듯이 지켜보았다. 처음에는 ‘내가 알던 여성 퍼포머들에 비하면 너무 제각각인 체형’에 놀랐던 나는, 어느 순간엔가 그들의 몸의 모양을 뜯어보기를 저절로 그만두었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보아지기 위한 신체가 아니라 기능하는 신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가진 몸은 내 것이 아니고, 사회의 것도 아니고, 그들 자신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오타 유미코(가장 왼쪽)
‘이제까지 내가 보아왔던 공연들과는 결이 다른’ 공연, <바람의 포옹>을 보고 극장을 나서면서, 어느덧 캄캄해진 경사진 언덕길을 더듬더듬 걸어 내려오면서, 나는 생각했다. 오늘 나에게 낯선 언어로 말을 걸어온 그 여자들의 단단한 팔에 대해서. 그들이 살고 있을 세상에 대해서. 내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서. 우리가 가진 각각의 몸들에 대해서. 여름밤이었고,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무언가에 안겨 있는 기분이 들었다.
[사진제공: 이산]
바람의 포옹
- 일자
- 2019.07.12(금) ~ 07.13(토)
- 장소
- 신촌문화발전소
- 출연
- 박이정화, 이산, 아베 쿠니코, 오타 유미코(아코디언)
- 조명
- 류성국
- 음향
- 정산
- 진행
- 김시연, 이현수
- 일러스트
- 유경희
- 디자인
- 아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