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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호바다 <집시들>

상징의 저편

유혜영
166호 2019.08.22
청년예술지원을 받은 공연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그중 극단 호호바다의 <집시들>은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서사시 『집시』를 각색하여 현대인의 ‘소유’와 ‘자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집시 젬피라(황순미 분)는 어느 날 도시인 알레코(김원종 분)를 집시 공동체로 데려와 그의 여자가 되겠다고, 그는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준비가 ...
청년예술지원을 받은 공연들이 꾸준히 발표되고 있다. 그중 극단 호호바다의 <집시들>은 러시아 시인 푸시킨의 서사시 『집시』를 각색하여 현대인의 ‘소유’와 ‘자유’에 관해 이야기하고자 했다.
줄거리는 이렇다. 집시 젬피라(황순미 분)는 어느 날 도시인 알레코(김원종 분)를 집시 공동체로 데려와 그의 여자가 되겠다고, 그는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준비가 되어 있다고 수줍게 고백-선언한다. 공동체로 받아들여진 알레코는 하루하루 집시 생활에 적응해가던 중 젬피라가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졌음을 고백하는 노래를 듣는다. 낙심하여 꿈에서마저 젬피라를 찾아 헤매던 알레코는 결국 젬피라와 그녀가 사랑한 남자 모두를 칼로 찔러 살해한다. 무대화된 푸쉬킨의 시는 이렇게 비극적인 한 편의 러브스토리가 된다.
알레코와 젬피라의 사랑과 파멸은 내 방식대로 상대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비극을 단명하게 보여줬다. 알레코의 방식이 ‘소유’였다면, 젬피라의 방식은 ‘자유’였다. 연극은 “자유를 동경하는 현대인”의 표상으로 알레코를, “자유로운 집시”의 표상으로 젬피라를 지목하고 현대인의 소유 욕망으로 인한 파멸을 그려내고자 한다고 했다. 그러나 공연이 끝난 후, 무대 위 알레코가 추구한 것이 자유인지, 사랑인지, 어떻게 소유와 연결되는지 또는, 젬피라는 진정 자유로운지에 관해 떠오르는 생각들이 분분했다.
무대는 잔 나뭇가지를 겹쳐 만든 몇몇 설치물로 둘러싸인 단출한 숲이다. 눈에 띄는 것은 객석과 무대를 나누고 있는 두껍고 하얀 프로시니엄 테두리다. 이미 무대에 나와 있던 알레코는 그 뚜렷한 경계를 넘으려고 발을 내밀지만 실패하고 돌아서기를 반복한다. 알레코는 경계에서 공연의 시작과 끝을 맞이한다. 어두운 극장을 가르는 흰 선은 ‘자유’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알레코를 위치를 인식하도록 한다.
연극에 심겨진 상징들은 원작의 시 언어를 토대로 한 대사로도 이어진다. 특히 젬피라의 어머니인 노파(이미숙 분)는 극장의 분위기를 장악하는 낮고 무거운 목소리와 신비한 눈동자로 비유적이면서도 음악적인 예언을 통해 알레코의 결말을 계속해서 암시한다. 달은 하늘에서 떠날 것이라는 비유는 알레코가 도시로 돌아갈 것이라는 예언인가 싶지만, 젬피라의 변심을 가리키는 것이 되고, 반복되는 “여전하다”는 대사는 알레코가 집시 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맥락으로 이해되다가, 결국에는 도시인의 소유하고자 하는 습성을 전혀 버리지 못한 채 “여전”한 알레코를 의미하는 말이 된다. 무대를 떠다니던 말들의 의미가 밝혀지는 순간들은 무척이나 흥미롭다.
시적 언어에 맞추어 배우들의 연기도 사실적이기보다는 함축적인 움직임이 대부분이다. 이를테면, 팔로 휘휘 노를 젓고, 발끝으로만 살금살금 절벽을 지나, 손바닥으로 비를 피하고, 몸을 겹치고 잠드는 등 몇 단계의 단순한 판토마임을 반복하고 변주하는 것으로 알레코가 집시 공동체에 적응해가는, 즉 젬피라와의 사랑을 키워가는 시간이 표현되는 것이다. 다만, 대체로 어두운 조명 아래 갑작스럽게 전개되는 발랄한 율동(?)은 객석의 긴장을 풀면서도 한편 당황스러웠다. 귀엽기까지 한 몸짓과 비장한 부르짖음 사이를 오가는 배우들의 연기가 조화되는 지점을 안타깝게도 나는 발견하지 못했다.
연출의 글에 등장하는 “소유하기 위해 타자성을 포획하는 폭력을 저지르고야 마는 동시대 현대인의 모습”은 아마도 알레코가 집시들의 사랑 방식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살인을 저지르고 마는 것에 대한 해석일 것이다. 그러나 알레코의 분노를 소유에 대한 집착이라고만 할 수 있을까? 연극에서 알레코가 젬피라를 따라 왔는지, 자유를 좇아 왔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도시 생활이 얼마나 부자유한지를 말하는 알레코의 대사를 통해 그가 젬피라만이 아니라 이 공동체의 ‘자유’로운 삶 또한 원하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뿐이다.
다만, 그는 사랑에 있어서만큼은 집시들의 룰을 따르지 못했다. 애초에 그에게 사랑은 자유 또는 부자유, 소유 또는 무소유의 이분법적 문제가 아니었던 것은 아닐까? 사랑은 관계가 빚어내는 믿음과 의리와 연민과 같은 더욱 복잡한 알고리즘의 총합일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고, 당신을 증오한다고 말하는 젬피라에게 느꼈을 배신감, 그 반응으로 발현되는 폭력에 대해 나는 알레코의 도시적 소유욕만을 탓할 수는 없다. 그것은 해석을 위해 그의 행동을 그저 이용하는 것은 아닐까.

“타자성을 포획하는 폭력”은 오히려 집시들을 ‘자유의 상징’으로 못 박은 시인에게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도 있다. 집시들이 자유로워 보이는 것은 그들이 한곳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이동하는 삶을 살기 때문이다. 젬피라가 처음 알레코를 소개하며 '그가 나를 따라 어디든 갈 준비가 되었다'고 말하는 것은 집시들의 삶에 있어 이동성이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는 것을 말해 준다. 그러나 실제 집시들은 땅을 잃은 슬픔을 가진 공동체가 아니던가. 집시들의 춤 플라멩코의 힘찬 발 구름은 땅을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들의 ‘자유’는 그저 그것을 동경했던 외부인에 의해 만들어진 낭만적인 신기루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알레코가 살인에 사용한 가방(도시에서 가져왔을)은 공연의 맥락과 관계없이 도시 중심적인 해석과 판단이 집시 공동체를 왜곡하고, 파괴한다는 의미로 읽히기도 했다.
공연에서 노파가 들려주는 옛이야기는 집시들의 미련 없이 자유로운 사랑법이 슬픔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아니었을까 예감하게 하기도 한다. 노파는 아직 흰머리가 하나도 없었을 시절, 도시에서 온 로마시인과 사랑을 나눴지만, 그 시인은딸을 낳은 후에도 계속 무언가를 기다리기만 했는데, 그것은 바로 이곳에서 구출되는 것이었으며, 죽는 순간까지도 이전의 세계로 돌아가고자 했다는 것이다. 노파의 목소리에는 슬픔이 서린다. 노파는 그를 사랑했기에 상처 입었고, 그래서 이제 사랑하는 것을 애초에 포기하기로 한 것은 아닐까. 도시인으로부터 경험한 이전의 슬픔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젬피라는 ‘자유’라는 이름으로 애초에 진정한 사랑을 시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그렇다면 이런 태도야말로, 가장 현대인다운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한다. 이별의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워 사랑하지 않거나, 책임의 무게가 두려워 시도하지 않는, 자유와 체념과 회피의 경계 어딘가에서 버티고 있는, 마치 공연 초반 알레코가 프로시니엄 경계에 누워 어느 한 쪽으로도 넘어가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며 균형을 잡고 있는 것과 같은 모습 말이다. 그 모습을 나는 집시들에게서 발견한다. 죽은 젬피라와 노파가 서로 얼굴을 닦아주는 모습에서 ‘자유’ 저편에 흐르는 슬픔을 본다.

[사진제공: 호호바다©권애진]

집시들
일자
2019.08.14(수) ~ 08.25(일)
장소
극장 동국
원작
알렉산드르 푸쉬킨
각색
장영
연출/번역
조하영
출연
이미숙, 황순미, 김원종
음악/작곡
채서진
무대디자인
박성찬
조명디자인
노명준
기술감독
이준
의상디자인
김정향
홍보물디자인
장주희
사진
임범식
기획
김강민
조명오퍼
최상익
음향오퍼
최소연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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