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
[작품리뷰] 언어로부터의 일탈
강병우
167호
2019.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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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출이 현대의 모티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곤경에 처한다.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인가? 가장 근원적인 동일성이자 순수한 결박상태로서의 뿌리, 운명이란 모래시계가 뒤집어진 이래 단 한 번도 낙하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세계를 상상해냈을 때 비로소 운명으로 진입한다. 세계는 비로 가득하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그곳은 우후죽순 솟아나는 사....
탈출이 현대의 모티프가 되었을 때 우리는 어떤 곤경에 처한다. 무엇으로부터의 탈출인가? 가장 근원적인 동일성이자 순수한 결박상태로서의 뿌리, 운명이란 모래시계가 뒤집어진 이래 단 한 번도 낙하하지 않는 인간은 없다. 인간은 세계를 상상해냈을 때 비로소 운명으로 진입한다. 세계는 비로 가득하다. 비는 대지를 적시고 그곳은 우후죽순 솟아나는 사건들로 채워진다. 뿌리 깊은 나무가 땅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 하나의 숲이 선다. 어떤 도약에도 따라붙는 꼬리표, 은폐된 목소리로 말한다. 이곳에 어떤 갈망이 있다. 뿌리의 문제가 인간의 삶을 무대로 만든다.
오늘 시도되는 모든 일탈은 이곳에서 비롯된다: 세계로부터의 탈주, ‘나’라는 인간으로부터의 도주, 예술의 탈장르화, 주변과 중심 해체. 프린지의 ‘예술적 일탈’의 상상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언어를 새로이 창안하는 것이 곧 세계의 제-관계에 대한 실험이다. 극에서 연구되는 사물언어와 신체언어는 낙하하기를 그치지 않는 인간 소외의 역사(운명)에 대한 일탈적 상상이다. 인간은 근본의 부재로 인해 소외를 겪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로 나갈 수 없게 하는 뿌리가 최후 단절을, 오직 증식된 자기만을 보는 거울이 된다. 만약 예술이 일상을 낯설게 한다면 무언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에서 경험한 세 편의 극을 읽는다.
오늘 시도되는 모든 일탈은 이곳에서 비롯된다: 세계로부터의 탈주, ‘나’라는 인간으로부터의 도주, 예술의 탈장르화, 주변과 중심 해체. 프린지의 ‘예술적 일탈’의 상상력도 이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무대 언어를 새로이 창안하는 것이 곧 세계의 제-관계에 대한 실험이다. 극에서 연구되는 사물언어와 신체언어는 낙하하기를 그치지 않는 인간 소외의 역사(운명)에 대한 일탈적 상상이다. 인간은 근본의 부재로 인해 소외를 겪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외부’로 나갈 수 없게 하는 뿌리가 최후 단절을, 오직 증식된 자기만을 보는 거울이 된다. 만약 예술이 일상을 낯설게 한다면 무언가를 반증하고 있는 것일까. 이러한 문제의식과 함께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에서 경험한 세 편의 극을 읽는다.
극단 우아 <변신>
프란츠 카프카는 변신을 모티프로 한 단편을 남겼다. 잘 알고 있는 『변신』은 인간세계에서 동물세계로 이행하지만, 반대로 동물세계(『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서 인간세계로 돌파하는 경우도 있다. 후자의 경우는 정확히 인간이라기보다 청중을 향해 인사하는 인간이 된 원숭이, (인간)언어를 사용하지만 여전히 원숭이인 중간태이다. 두 이행은 인간 실존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상당히 중요하고, 핵심은 언어를 문제화하는 데에 있다.

극단 우아가 해석한 <변신>은 무너지는 언어의 하강 곡선을 그린다. T5 공연장에서 진행된 제1막은 원작 소설을 낭독하며 극이 진행된다. 관객과 배우가 놓인 공간 구분이 미약해 무대라기보다 마치 그레고르 잠자의 방 안에 들어선 인상을 받는다. 배치된 단상을 중심으로 네 명의 배우가 한 소절씩 읽어 나간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레고르 잠자에 몰입한 인물들의 메소드가 아니다. 오히려 직장 상사와 가족에게 절박하게 호소하는 그의 목소리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세 명의 배우가 동시에, 각기 다른 문장을 소리칠 때이다. 일반적인 ‘읽기’는 선형적인 시간을 따르게 된다. 이러한 읽기는 문자의 배열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사건은 개연성 아래에서 합당하게, 따라서 독자의 충분한 ‘예측’을 가능하게 한다. 하지만 세 명의 배우가 동시에 내뱉은 문장들은 중첩된 나머지 그 의미와 내러티브의 흐름이 전혀 파악되지 않는다. 이러한 목소리가 내러티브의 예측을 끊어내며 서스펜스를 발생시킨다. 추측건대, 원작 소설의 선형적 문장 배열을 비선형적/동시적으로 발화한 것으로 보인다. 더 이상 인간의 언어로 들리지 않고 뭉개진 덩어리처럼 과잉된 언어는 관객의 피부를 찌르는 촉각 언어가 된다. 그레고르의 절규는 초과된 의미를 담지 못하고, 더 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게 된다. 거칠어진 숨만, 쉬익 울린다. 1막이 공존과 소외의 경계선을 드러내는 언어극이라면, 관객 앞에 놓인 것은 무너지는 언어의 하강선과 인간-갑충 사이에 놓인 중간태로서 ‘그’일 것이다. 제2막은 장소를 옮겨 T4에서 벌어진다.

면적 1,228㎡의 T4(복합문화공간)는 높은 천장과 파이프 기둥으로 되어있다. 이곳에서 발생하는 모든 소리는 높은 천장을 오가며 바닥과 파이프에 부딪쳐 깊은 떨림을 지닌 메아리로 돌아온다. 관객이 착석하기 위해 끄는 의자 소리마저 자신을 몇 번이나 곱씹어 울린다. 이 공간에선 일반적인 언어극은 전개되기 힘든데, 앞서 1막이 의도적으로 문장을 중첩해 분열효과를 냈다면 이곳 T4에서는 모든 소리가 분열증자가 된다. 그 목소리는 더 이상 떠오르지 않고 바닥을 기어 다니며 배회하고 상승하지 못한다. 공간 특성상 소리는 무대에서 관객석으로 향하는 것이 아닌 도처에서 튕겨진다. 목소리가 의미를 압도한 그 순간, 세 명의 그레고르 잠자는 한 몸이 된 것처럼, 아니 서로의 육체가 엉겨붙어 여섯 발로 걷는 인간-갑충이 된다. 이 기괴한 모습은 톰 식스의 <휴먼 센티피드>의 한 장면을 연상시키며 관객은 섬찟한 장면에 압도된다. 하지만 의미의 집중이 아닌 대화 불가능한 타자 앞에서의 차렷. 대화불능의 이미지 앞에서의 굳은 몸이다. 그레고르 잠자와 가족, 관객은 더 이상 대화 불가능하다. 이러한 언어 불능이 단지 누구 하나가 괴물로서 자리해야만 성립되는 것일까? 언어 기계의 오작동이 대화불가능성을 만들어내는 것일까? 마치 꿈을 꾸듯 그레고르 잠자와 가족은 단란했던 일상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대화는 찾아볼 수 없으며 몸짓과 의례만 있을 뿐이다. 고기를 써는 나이프의 날선 소리가 대화 공간을 자른다. 그레고르의 가족이 특별히 더 무심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카프카의 단편이 자본주의와 현대 가족 시스템의 부조리만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이 두 전제는 여전히 투명한 언어를 전제하고 있을 뿐, 카프카 우화에 등장하는 중간태로서의 언어 주체가 지닌 숙명을 보여주지 못한다. 불능은 그다지도 멀리 있지 않다. 대화(소통: 疏通)란 세계를 뚫어버리는 것이다. 극단 우아의 <변신>은 우리의 언어를 송곳으로 위협하고 있다.
극단 비천 <베케티안 랩소디>
관객을 맞이한 그들은 먼저 양해의 인사부터 올린다. 베케트의 극을 예상하고 왔다면 비천의 <베케티안 랩소디>는 그렇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비천은 사무엘 베케트라는 프리즘에 자신의 삶을 투과 시켜 일반 백색 빛에 은폐된 스펙트럼(욕망)을 보여준다. 달리 말하자면 <베케티안 랩소디>는 백색 예술가에서 사오십대-여성-예술가라는 은폐된 계열을 추출해내는 것이다. 동일한 사오십대 예술가라 할지라도 성별에 따른 활동 범위 및 조건이 상이한 차이를 보인다. 백색 빛이 은폐된 색을 품고 있는 것처럼 ‘백색 예술가’는 이러한 젠더적 차이를 흐릿하게 한다. 보편의 제1효과는 은폐이다. 비천은 주어진 60분의 시간에서 백색 예술가를 분광하며 그 색들을 하나씩 몸으로 뚫는다.

몇 가지 눈에 띄는 장치가 무대를 구성하고 있다. 정면과 바닥에 투사된 두 개의 스크린, 관객의 앞뒤에 만들어진 두 개의 무대. 다중 무대 장치로 구성된 <베케티안 랩소디>는 영상, 그래프, 사물을 몸의 움직임으로 연결한다. 그리고 관객에게 묻는다, 춤은 무엇이며? 어떻게 움직여야 할 것인가? 춤과 무용에 대한 서로 다른 정의들이 관객의 입을 통해서 전해진다. 하지만 관객에게 가장 요구된 것은 신체의 비신체화이다. 신체는 마치 선험적인 목적을 지닌 것처럼 기능으로 환원되어 있다. 손, 발, 머리, 가슴 등은 합목적적으로 움직이며 그것을 잘 수행해냈을 때 비로소 ‘신체’로서 인정받게 된다. 계면활성제 <베리어>의 리뷰에서도 짚겠지만 이러한 신체의 정상화는 바로 기능 오작동의 문제 즉, 장애-신체와 직결된다. 일반적으로 이해되고 있는 신체의 위치를 임의로 바꾸며 그것을 수행하는 관객의 신체를 지연시킨다. 얼기설기 엮인 신체들을 움직이기 위해 수행자는 버벅대는 발과 손을 이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기능부전을 일으킨 수행자들에게 서로의 신체를 한 번 더 연결한다. 낯선 신체와의 비유기적 관계. 이 과정에서 여러 몸은 하나의 선율을 자아내며, 자연스레 질문에 응답하게 된다. 관객과 예술가가 함께 자아낸 움직임엔 목적 없이 오직 관계만 있다. 움직임은 사전적 정의도, 장르화된 춤의 특정 무브먼트도 아니다. 탈장르화라는 위반은 몸에서 비롯되어 다중 무대 장치의 세부를 이접(異?)한다.

스크린에 띄워진 그래프와 화살표, 숫자, 밴다이어그램은 사오십대-여성-예술가의 소외를 나타내는 자료이다. 아내로서, 어머니로서 가족제도로 정의된 이들은 자신의 정체성을 몇 안 되는 젠더적 수행 기호에 맡긴다. 사오십대 여성에게 결혼과 가족을 제외했을 때 나타나는 빈자리가 있다. 하지만 이 자리마저 여전히 젠더적 호명에 의해 돌려 세워진다. 자신의 행동이 고작 아줌마가 하는 일이 되거나, 늙음과 폐경이 신체 기능의 중지가 된다. 이제 남은 것은 생의 터럭 한 올이다. 바로 이곳, 세계의 가파른 가장자리가 무대이다. 협소해진 인간관계를 나타내는 짧은 막대그래프가 곧 재시작의 무대이다. 몸의 반경은 제약되어 움츠러든다. 타인에 의해 부여된 정체성은 벗어나고자 할수록 옥죄는 올무가 된다. 숫자와 도형의 크기가 신체를 통제한다. 그러나 이 모든 신체의 기능부전에서 비로소 움직임이 시작된다. 끊임없이 경계선 밟기를 시도하고, 서로 다른 의미지표를 지닌 그래프 위로 몸을 통과시키며 돌파한다. 지난한 과정 속에 고통을 토해내고 신음한다. 관객 앞에서 자신을 탈피한다. 몸은 자기를 찢는다. 움직임의 탈장르화는 사물을 재배치한다. 무대와 오브제를 몸으로 끊어내고 이접하는 과정이 극단 비천의 <베케티안 랩소디>이다.
계면활성제 <베리어>
의미론의 표지 이론에 따르면 정상성은 무표지 상태로 남아 있는 반면 비정상적 가치는 표지된다. 한 가지 예로 황정은 작가는 《디디의 우산》에서 점자(點字)와 묵자(墨字)의 세계를 말한다. 맹인이 사용하는 글자가 점자라면 비맹인이 사용하는 글자는 묵자라는 것이다. 하지만 익히 알려진 점자에 비해 비맹인이 쓰는 글자를 지칭하는 언어가 있다는 사실은 생소하기만 하다. 이유는 ‘볼 수 있다’가 곧 세계의 기본전제라서 우리(‘우리’는 가장 정치적인 개념이다)는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묵자의 상태가 곧 상식이고 정상으로 전제된다. 신체는 하나의 기관으로 환원됨으로써 정상성 개념을 획득하고 세계의 기본값이 된다. 결국 장애라는 개념은 몸을 도구적 관계 아래 놓는 것이다. 계면활성제의 <베리어>는 장애 예술가와 비장애 예술가 경계를 허무는 무대 언어를 실험하며 정상성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베리어>의 무대 언어를 특징짓는 두 가지 요소가 있는데, 프로그램북 소개를 보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두 가지 언어”를 바탕으로 극을 구성했음을 밝힌다. 예술가와 비장애 예술가 사이에 놓인 문턱은 [높음/낮음]이란 공간적 특성과 일상어의 [지연/반복]이란 시간적 특성으로 나타난다. 공간적 언어는 ‘베리어’라는 말이 상기시키듯이 장벽을 의미한다. 우선 관객과의 적정거리를 유지하게 하고 극의 전반적인 퍼포먼스의 무대가 되는 양탄자가 있다. 양탄자는 묵자의 세계에서 점자의 세계로 이행하는 경계면이다. 콘크리트 바닥보다 겨우 몇 밀리미터 솟은 이것은 부드러운 질감으로 발을 간지럽힌다. 신발을 벗은 두 사람은 그 경계면에 따라 무대에 위치한다. 양탄자는 무대의 경계를 알려주는 문턱이 된다. 이 집중된 공간에서 두 사람은 합숙을 거쳐 연습한 움직임을 보여준다. 서로의 관절이 맞닿지만 몸의 방향성은 다르다. 묵자의 세계에 있는 이재혜가 점자의 세계에 있는 남호섭과 부딪히지 않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과 약속이 필요했다. 사물을 인지하고 정렬하는 방식이 더 이상 같을 수 없었기에 이것을 약속하는 언어는 지연과 반복을 거친다. 작은 것 하나하나 모두 말해야 했기에 말은 둘 사이에서 보다 가득하지만, 바닥을 기는 것처럼 느리다. 느림을 인정하고 기다려야 했고 말해주어야 했다. 극의 종반부에 이르자 두 사람은 양탄자에서 벗어나 무대의 끝에 다다른다. 더듬거리는 손발로 콘크리트의 차갑고 두꺼운 벽면을 짚는다. 어느 때보다도 벽의 두께가 압도적으로 느껴진다. 두 사람은 사이에 놓은 장벽을 가늠하기 위해 연신 ‘이만큼’이라고 외친다. 장벽의 높이와 두께를 표현하는 이만큼이란 가늠되지 않는다. T6의 콘크리트처럼 넘어서기 힘든 장벽일까. 아니면 양탄자의 경계처럼 양적 차이가 아닌 질적 차이인 것일까. 다시 공간의 가장자리에서 양탄자 위로 되돌아가는 일이 남았다. 다시 바닥을 기어야 했고 때로는 관객과 부딪쳐 멋쩍은 미소를 지어 보여야 했다. 극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벽 앞에서 한 뼘씩 걸어야만 한다. <베리어>의 무대 언어는 공간적인 의미의 높고/낮음과 시간적 의미의 빠르고/늦음의 경계적 유동성을 보여준다. 대화를 효율성 담론에 성급하게 환원하여 장벽을 해결하려고 들지 않고, 차이를 천천히 인내할 뿐이다. 극이 종료되고 배우와 관객이 서로에게 답하는 박수가 오랫동안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두 사람은 주저앉아 인상적인 쓴웃음을 짓고 있었다.

모든 언어는 비끌릴 수 있다. 자명하다고 여긴 언어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가렸는지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투명한 언어가 아닐지도 모르고, 어쩌면 투명한 렌즈로는 당최 보질 못한다. 이 리뷰에서 세 편의 극을 언어의 하강 곡선, 정상화에 대항하는 몸-언어를 실험한 것으로 읽었다. 그러나 해석에 반대하는 작품이 자신의 숙명을 따를 때, 이 리뷰 또한 미끄러질 테지만 세 극단이 선보인 무대극은 관객의 몸에 기억될 것이다.
-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 공식 홈페이지
www.seoulfringefestival.net
[사진 제공: 서울프린지페스티벌2019 사무국ⓒ김명집, 김성일, 박종일, 이좋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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