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극단 플레이위드 <라틴아메리카 프로젝트Ⅲ>

[작품리뷰] 연극이라서, 괜찮아

예준미
167호 2019.09.05
사실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신이 나서 회상에 빠진 채 쉼 없이 묘사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은 구글링 몇 번으로, 10분의 유튜브 영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묘사해주는 그 장경도 상대의 표현력과 나의 상상력으로 어렵사리 만들어내느니, 사진과 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자료를 찾...
사실 남의 여행 이야기를 듣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여행을 다녀온 사람은 신이 나서 회상에 빠진 채 쉼 없이 묘사하지만, 사실 그 모든 것들은 구글링 몇 번으로, 10분의 유튜브 영상으로 찾아볼 수 있다. 그 사람이 묘사해주는 그 장경도 상대의 표현력과 나의 상상력으로 어렵사리 만들어내느니, 사진과 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자료를 찾는 편이 더 정확하다. 최근 유튜브에서 세계여행을 하고 있는 한 남자의 계정을 구독한 이후로 나는 남들의 여행 이야기에 더 무관심해졌다. 영상을 통하면 현장에 있는 그 순간, 그 시선, 경험을 거의 그대로 간접 체험할 수 있는데, 다 지나간 기억 속 여행의 기억과 묘사가 무슨 의미가 있나 싶었던 것이다.
총 세 개의 에피소드로 구성된 <라틴아메리카 프로젝트Ⅲ>의 첫 에피소드가 끝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아는 라틴아메리카의 이미지라고는 어렸을 적 봤던 애니메이션 영화 <쿠스코? 쿠스코!>가 떠오르는 고대 유적, 열정이 넘치는 춤, 부르마불에서 꽤나 수입이 쏠쏠했던 부에노스아이레스 그리고 흰색과 푸른색의 세로 줄무늬가 그려진 아르헨티나 유니폼을 입은 축구 선수 메시 정도일 뿐이었다. 나는 왜 이 극장에 앉아서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 다녀온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을까. 지금 터키 어느 즈음에 있을 유튜버 ‘빠니보틀‘은 언제쯤 라틴아메리카에 갈까. <걸어서 세계 속으로>나 여행 유튜브에서 라틴아메리카를 다룬 에피소드를 본 적이 있었던가.
거짓말이라도 괜찮아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무대 위 배우의 이야기를 듣다가, 문득 ‘이 이야기는 진짜인가?’라는 의문이 들었다. 마이크 앞에 선 배우는 마치 토크 콘서트처럼, 편하게 일인칭의 여행담을 풀어놓고, 뒤편 스크린에는 그의 이야기에 맞춰 수녀원에서 예술 봉사를 하고, 마추픽추 등 남미의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그의 얼굴이 보인다. 순간 웃음이 터졌다. 나는 ‘트래블러 장’의 이야기를 한 치의 의심 없이, 진지하게 믿고 있었다. 지금껏 여행 다큐멘터리가, 유튜브가 우리에게 보여주었던 것처럼, 그리고 여행 콘텐츠를 소비할 때 늘 그랬던 것처럼, 현장의 이야기 그리고 그 현장에 있었던 그 인물을 믿어버렸다. 그러나 이 무대는 다큐도, 유튜브도 아니다. 나는 지금 ‘연극‘을 보고 있다. 저 이야기가 거짓이라 할지라도, 기꺼이 믿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이곳은 극장이다.
많은 연극 공연들은 관객들의 믿음을 얻어내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인다. 효율성과 아름다움, 연출을 의도하면서도 현실에 있을 법한 무대와 의상, 극 중의 순간을 살아가기 위해 관객을 배제하고 무대 위 가상의 시공간에 집중하는 배우들의 연기, 빈틈없이 짜인 인물과 상황, 환상을 유지하기 위해 관객의 시야에서 사라지는 각종 장치 등. 그러나 이 무대는 왠지 어수선해 보이고, 단순하다. 왼편에는 수화기가 놓인 원형의 테이블과 옷걸이, 무대 중앙에는 스탠딩 마이크와 높은 의자 하나, 오른편에는 음향과 영상을 조작하는 것으로 보이는 두 대의 컴퓨터가 놓인 커다란 테이블과 악기를 연주하기도 하고, 코러스가 되기도 하는 네 명의 인물들이 있다. 꾸미지 않음과 완벽하게 감추지 않음이 되레 아무런 경계 없이 관객을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이는 데에 결정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이 무대에 믿을 것이라곤 배우의 대사와 영상뿐이다. 그리고 이미 영상이 주는 확실함에 익숙해져 있던 나는 영상 속 인물과 지금 여행기를 털어놓고 있는 이가 동일하다는 이유만으로, 그 이야기를 진심으로 믿어버렸다. 이들이 객석에 기꺼이 음료와 주류를 반입하도록 유도하고, 에피소드 중간에 와인을 나누어주었던 것 역시도 이들의 이야기를 편하게 듣고, 쉽게 믿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일종의 트릭이었던 것이다. 그제야 ‘아, 나 연극 보러 왔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지하지 않아도 될 공간에서, 진정으로 믿지 않아도 될 것에 지나치게 진지하게 임했으니 이게 재미있을 리가 없었다. 이 꾸며진 거짓을, 그럴싸하게 만들어진 이 이야기를 그저 잠시 믿으며 즐기면 그뿐이다. 영상이 전달해야 할 정확함과 재현, 그것은 무대에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때가 아니어도 괜찮아
무대 뒤 스크린에는 여행 당시의 영상이 떠오르고, 무대 위의 인물도 여행 당시의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인물이 이야기하는 장면이 무대 뒤 스크린에 거의 그대로 영사되기에, 굳이 낯선 국가의 거리나 폭포의 이미지를 상상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괜찮다. 그가 하는 이야기 그대로, 스크린에 띄워진 영상을 보며 짐짓 연상해본다. 잠시나마 꽤나 그럴듯하게 그의 여행을 함께하는 듯 한 느낌도 든다. 그러나 그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공간은 여행이 모두 끝난, 지금 여기의 대학로 소극장이다.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계속 눈에 띄는 스크린과 오퍼레이터석, 모든 것을 드러낸 무대가 이곳은 라틴아메리카가 아님을 계속 상기시킨다. 마지막 에피소드의 주인공 한민이 열두 시간의 시차를 두고 부인과의 관계를 질문하듯, 우리는 이들의 지난 여행과 지금 여기의 시차를 느끼고 여행의 의미를 질문하게 된다. 시차는 여행 당시의 인물과, 무대 위의 인물이라는 상당한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 이야기에는 여행 중의 라틴아메리카가 아닌, 지금 여기 대학로 소극장이기에 가능한 그런 순간들이 있다. ‘트래블러 장’은 탱고 클럽에서 어느 여자와 계속 시선이 마주치고, 그로부터 적극적인 시그널을 받는다. 그럼에도 그는 끝내 춤을 추지 않고 그 클럽을, 라틴아메리카를 떠나 돌아온다. 이 이야기를 할 때에 무대 위에는 여성 무용수가 등장해 장과 함께 탱고를 춘다. 정열보다는 정직에 가까운 그의 스텝과 뻣뻣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진지했다. 탱고 클럽에서 장이 여성과 춤을 췄다면, 상대는 그의 어설픔에 실망하거나, 웃음을 터트리며 장을 무안케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가 추지 못했던 그 춤을 마저 출 수 있었던 이 무대는 그에게 새로운 기회가 된다. 탱고를 배우기 위해 라틴아메리카에 머물며 학원에 다녔던 그의 꿈은 그때 그곳이 아닌 지금 여기에서, 모든 이들이 진지한 얼굴로 그의 스텝과 움직임에 집중해주는 무대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진지하게 춤에 임하는 그의 모습은 지금 당장 이루어지지 않아도 괜찮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한다.
우리가 이 무대를 통해 듣고, 느끼고, 연상하는 그 모든 것은 여행이라는 과정을 지나 변화한 인물들, 그리고 그들 삶에서 라틴아메리카가 가지는 의미이다. 지금 당장의 이 여행길에서 우리는 때로 기대에 못 미쳐 실망스럽기도, 전혀 예상치 못했던 기쁨을 가져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한 친구들을 만나게 하기도 하고, 누군가를 떠나보내야 하기도 한다. 여행이 끝나고 난 뒤에 무대에서 드러나는 것은 만남과 떠남을 통해 변화한 지금의 화자이다. 이는 여행의 현장에서 전하는 날 것의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이 무대 위에서 변화한 자기 자신의 상태로 지난 이야기를 회상하기도 하고, 과거 어느 시점으로 돌아가 그 때에 못 다한 것을 해보기도 하며, 닿지 못할 누군가와 다짐을 하기도 한다. 모든 과정이 끝난 뒤,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지난 시간을 되돌리고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시점에서 이들의 여행도, 여행 중의 고민과 결심도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과정 중에 차마 이루지 못했던 것 역시도, 무대라는 공간 안에서는 얼마든지 되돌아가 다시 도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이러한 시간의 차이에서 오는, 여행의 의미 찾기의 과정은 정보의 전달을 목적으로 하는 여행 다큐멘터리나 현장성과 흥미를 강조하는 유튜브 콘텐츠가 담아낼 수 없다. 그것이 이루어지는 장소가 연극 무대이기에 또 전달하는 내용이-믿을법 한, 그리고 즐거운-허구이기에 가능하다. 푹신한 침대와 이불 속 유튜브를 포기하고 극장을 찾아야하는 즐거움, 그리고 한 번도 가본적 없는 낯선 곳의 이야기를 귀 기울여 들을만한 가치는 연극이 가지는 지금 여기의 이야기, 그리고 그 거짓의 매력에서 비롯되는 것이 아닐까.

[사진 제공: 플레이위드]

라틴아메리카 프로젝트Ⅲ
일자
2019.08.12(월) ~ 08.26(월)
장소
한양레퍼토리 씨어터
구성/연출
박선희
조연출
송정희
출연
박동욱, 전석호, 임승범, 김영욱 영상/기술 한원균
의상
정시원
음악
이승호
랩음악
신예훈
랩자막
이재원
음향
이원만
주최
한양레퍼토리씨어터, 한양대학교 연극영화과
극단 플레이위드
관련정보
https://www.instagram.com/p/B1eunW0HsMD/?igshid=p0xp745g4ss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