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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아르코 파트너 장우재

[세대교차] 허물어진 공간의 폐허

백승무
168호 2019.09.26
1. 부끄러웠다. 배우의 목청을 빼앗아버렸다. 마이크를 흉물스레 달고 나온 배우들은 그저 중얼거렸다. 발음은 흔들렸고 생기는 사라졌다. 대형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획일화된 기계음은 배우의 좌표를 지워버렸다. 삐죽거리는 입 모양을 따라 발화점에 있는 배우를 찾아가면 어느새 대사도 놓치고 긴장감도 망가진다. 행위는 배우의 존재론적 질감이다. 행위를 통해 관객은...
1. 부끄러웠다. 배우의 목청을 빼앗아버렸다. 마이크를 흉물스레 달고 나온 배우들은 그저 중얼거렸다. 발음은 흔들렸고 생기는 사라졌다. 대형 스피커를 통해 퍼지는 획일화된 기계음은 배우의 좌표를 지워버렸다. 삐죽거리는 입 모양을 따라 발화점에 있는 배우를 찾아가면 어느새 대사도 놓치고 긴장감도 망가진다. 행위는 배우의 존재론적 질감이다. 행위를 통해 관객은 인물 형상을 더듬어간다. 배우는 자기 몸의 질감을 관객에게 내주어 형상 창조에 기여한다. 하지만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이하 <이야기는 끝>)은 소리는 들리는데 행위가 보이지 않는다. 살짝 고개만 돌려도 (입이 가려지면) 인물이 보이지 않는다. 이 무슨 얄궂은 장난인가! 한국 배우의 발성·화술 약점을 이렇게 치명적인 방식으로 폭로하는 건 의도인가!
1.1. 이런 농담이 가능하다: 어조를 잔잔하게, 건조하게, 덤덤하게 했다. 덤덤한 것과 덤덤함을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엉터리와 엉터리를 ‘표현’하는 것은 다르다. 후자는 예술이지만 전자는 그 자체다.
1.2. 배우의 소리는 그저 대사의 전파에만 복무하는 게 아니다. 육성은 배우 현존의 증거이다. 무게중심이 잡힌 상태에서 단전의 힘으로 목청을 뚫고 터져 나오는 배우의 목소리는 몸의 움직임과 무대의 공명, 나아가 객석의 진동에까지 관여한다. 그 힘이 인물을 살아있게 만드는 동력 중 하나이다.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의 진동은 관객의 고막뿐만 아니라, 살갗도 곤두서게 만든다. 그것이 무대에서의 생존법이다. 살아있는 물고기처럼 팔딱팔딱 뛰는 인물의 생동감은 배우 자신의 소리통에 대한 확신에서 비롯된다. 배우는 자기 소리를 들을(느낄) 때, 확신을 가지고 감정에 몰두한다. 감정이 살아있는 배우는 그 에너지를 객석으로 전파한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 배우들은 관객에게 시선을 돌리지 않는다.
1.3. 이런 농담이 또 가능하다: 관객이 ‘제4의 벽’ 너머를 관조하게 만들었다. 배우들이 관객을 의식하지 않고 그저 실제 삶에 전념했다는 것이다. 물론 말이 안 되는 가설이다. 배우가 관객에게 고개를 돌리는 것은 얼굴에 새겨진 중요한 정보를 ‘공개’하는 연극적 정치 행위이다. 의도와 목적을 갖고 그 효과의 최대화를 위해 가용의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는 연극적 정치! 필요 정보가 관객에게 노출·제공되지 않았을 때, 관객은 객석에 앉아있을 이유가 없다.
1.4. 단축법(短縮法)이란 게 있다. 멀리 있는 형태를 좀 더 크게 그려 비율을 조정하는 화법이다. 소리로 치자면, 무대 후방의 배우가 전방의 배우보다 더 큰 소리로 발화를 하는 이치다. 큰 소리는 큰 움직임, 큰 공명, 큰 진동을 갖는다. 덕분에 관객은 투시도법상 작게 보이는 후방 배우를 심리적으로 좀 더 크게 지각하게 된다. 3선(후방)에 선 배우는 이런 방식으로 1선(전방)에 선 배우들과 경쟁함으로써 깊이를 가진 미장센을 완성한다. 저 후방에서 작은 동작으로 깨작거리는 배우는 미장센의 그림 속으로 들어올 수 없다. <이야기는 끝> 은 단축법을 모른다.
1.5. 연극적 미장센의 본질은 관객의 시선을 쟁탈하려는 배우들의 존재감이 빗어낸 (찰나적) 미적 충격이다. 감독의 카메라 앵글에 배우가 수동적으로 ‘선택’되는 영화적 미장센과는 아주 다르다. 최상의 미장센을 위해 수십 번 반복 촬영이 가능한 영화와 달리, 연극은 배우들의 연속적 행위 도중 순간적으로 미장센을 빚어낸다. 단축법을 무시한 무대는 미장센은 고사하고, 후방 배우의 표정도, 미세한 연기도 보여주지 못한다. 배우들은 생동감을 상실한 채 뿌리 없이 부유하기 시작한다. 설상가상, 닭장 같은 대도구들이 관객 시선마저 가리면 후방 배우들은 마이크 달린 소품으로 추락한다. 배우는 숨 막히고 인물은 질식한다.
2. 배우의 위치가 단축법 상(上)에 도열하지 않고 찢어진 종이처럼 마구 흩뿌려진 이유는 에피소드식 구성에 말미암는다. 여러 개의 에피소드가 사슬처럼 꼬리를 물고 똬리를 트니 수학의 고차방정식이 없다면 당최 동선과 구획 분할을 최적화할 수가 없다. 궁여지책이란 것이 회전 원형물을 중심에 두고 호선 안팎으로 배우들이 넘나드는 방식이다. 그랬더니 배우들 신세가 집도 절도 없는 떠돌이다. 공간의 상징화·의미화 없이 대도구를 중심으로 인물의 정체성과 삶의 영역이 결정된다. 배우가 매번 소품(대도구+소도구)의 집사 노릇을 하는 것도 딱하거니와 배역의 욕망과 개성이 구체화되지 못하고 장면 전환과 함께 말끔히 세척되고 만다. 배우가 소품의 들러리가 되는 희귀한 경우다. 자신의 공간을 지배할 수 없기 때문이다.
2.1. 그렇다고 소품이 갑질하는 건 아니다. 인물을 대신해 무대를 점령한 이 소품들은 사물의 부분만을 본뜬 축약물이다. 위압적 크기도, 기괴한 형상도 아니다. 부분이 지배력을 갖는 현상은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명제를 정면으로 뒤집는 것이다. 부분들이 서로 충돌·마찰하면서 시너지를 발휘하면 전체의 유기성을 넘어설 수 있다. 거실, 작업장, 거리, 키부츠, 나아가 지구(!)의 일부를 차용한 이 소품(=부분)들은 사실적 무대의 전체성을 압도할 에너지를 갖고 있(긴 하)다. 성공 사례도 있다. 영화 <도그빌>을 보라. 도그빌 집집이 소품(=부분)들의 합이 우리 일상의 총체적 모습보다 더 포괄적인 상징으로 등극하는 장면! 이때 부분(의 합)은 전체를 압도한다.
2.2. 공간의 일부이자 사물의 일부인 <도그빌>의 생략된(쪼개진;지워진) 소품이 전체를 능가하는 부분(의 합)이 될 수 있었던 것은 환유의 힘 덕분이다. <이야기는 끝>을 예로 든다면, 모시의 작업장 일부로서 등장하는 닭장이 바로 전형적 환유물이다. 그 닭장의 역할은 닭장에 ‘인접’한 온갖 사물들을 관객의 가상적 지각 속에 배치시켜 사물과 사물이 ‘연속’된 온전한 양계장을 건축하는 것이다. 인접성과 연속성을 토대로 부분을 전체로 복원하는 상상력이 환유의 본성이다. 그 상상의 공간 속에서 모시의 마임은 <도그빌>처럼 구체적 일상성을 획득해야 한다. 하지만 소품들의 어수선함과 공간의 의미화 실패로 인해, 즉 공간의 구체성이 수시로 씻겨져 나가는 바람에 끝내 양계장은 건설되지 못한다. 양봉장, 세탁소 등도 마찬가지다. 그나마 다간이 특화한 무대 중심으로서 학교 공간은 칠판과 책상의 관계성, 강의 행위의 구체성 덕분에 어느 정도 의미화에 성공했다.
2.3. 생략과 복원이라는 환유의 작동 방식은 일상적 공간뿐만 아니라, 인물의 구축, 관계의 형성에도 동일한 원리로 응용된다. <도그빌>에서 마을 공동체의 개별적 삶들은 인간 전체를 너끈히 대신할 뿐만 아니라, 사물-환유들은 상징과 알레고리로서 인간사의 다면성을 고스란히 반영한다. 부분으로 전체를 복원하는 환유적 원리는 <이야기는 끝>의 창작 토대지만 연출은 갈피를 놓치고 말았다. 도대체 <이야기는 끝>에 등장하는 많은 환유들은 제작비 절감과 소품 간소화 미학, 행위의 구체성 제공 외에 어떤 목적을 실현하는가? ‘인간’의 환유물인 ‘심리’가 인물 형상을 대리하거나, ‘만남’이라는 환유-행위가 인물 간 관계를 대변하는 쓰임새를 도저히 발견할 수 없다. 부분과 전체의 관계는 개인과 집단이라는 작품의 주제와도 직결된 문제 아닌가! <이야기는 끝>에서는 내용과 형식의 조화를 찾아볼 수 없다.
3. 유추하건대, <이야기는 끝>의 인물과 공간이 이처럼 맹숭맹숭한 이유는 일상과 시적 분위기의 부조화 때문이다. 일상적이고 범속한 산문적 세계(헤겔)가 시적이고 형식미학적인 ‘무대’로 침투하면서 발생하는 충돌과 굴절은 연극의 숙명이다. <이야기는 끝>이 선택한 공간과 행위의 간소화 미학은 이 충돌과 굴절을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한데 거기까지다. 그 충돌과 굴절이 변증법적 종합에 도달하는 게 아니라, 충돌의 사태만 보여줄 뿐이다.
3.1. 연극에서 일상은 자질구레한 삶의 디테일에 불과하다. 일상은 비루하고 추저분하다. 삶의 의미가 지워진 누더기이고, 반복과 관성으로 닳아버린 시공간이다. 최소한 무대라는 조건 속에서 일상은 그러하다. 예술은 일상의 반대편에 위치한다. 시적 영감과 상상력의 세계가 그것이다. 2,500년 전 연극은 그렇게 일상을 배제하며 출발했다. 시란 헤겔의 표현대로 “개념이 형식 속에 내재”한 현상이다. 반대로 일상은 개념과 형식이 분리된 파편화된 사태이다. 내용(개념)은 형식에 힘입어 예술의 문턱에 올라선다.
3.2. <이야기는 끝> 배우들의 기본적 ‘비즈니스’는 직업적 일상이다. 반면 대사는 시적 분위기가 다분하다. 시는 일상이 멈췄을 때 시작하고, 일상을 딛고 섰을 때 완성된다. 하지만 <이야기는 끝>의 일상성은 산만하고, 시적 분위기는 공허하다. 너저분한 일상 소품과 집중력 약한 일상행위는 시가 발 딛는 초석이 되지 못한다. 공간도, 소품도, 무대 개념도, 인물도 구체화를 거부한다. 일상적 구체성 없이 시적 추상성이 개화할 수 없다. 시적 분위기는 즈비의 대사처럼 뜬금없고 느닷없다. 두 세계의 충돌과 무대적 조화의 좌초는 불가피하다.
4. 더 심각한 것은 인물 형상화의 오류이다. 유추하건대, 무성의하게까지 보이는 인물들의 무기력은 일면 의도를 가진다. 무덤덤한 표정과 굼뜬 동작은 지루함, 갑갑함, 폐쇄성, 정체성(停滯性)의 표지이다. 정체된 마을, 정체된 사고, 정체된 인물 등 사람을 숨 막히게 하는 폭력적 일상을 드러내려는 상징행위랄까.
4.1. 하지만 갑갑함을 갑갑함 자체로 보여주는 의도는 위험하다. 연극은 행위의 다의성·다면성·다층성이 생명이다. 행위의 숨통을 주제 의식으로 틀어막은 상태로 관객을 설득할 수 없다. 갑갑함조차도 행위가 지배하는 연극적 갑갑함으로 번역해야 한다. 번역 없는 날 것의 개념(내용)은 결코 연극적이지 않다. 미학화 없이 의도만 앞선 행위는 결코 연극적이지 않다.
4.2. 그렇다고 부산스러운 행위가 용인되는 건 아니다. 가상적 무대를 축조하는 환영적(illusional) 건축술의 결핍은 인물 형상의 건축술마저 위태롭게 한다. 니나의 ‘배우다운’ 동작조차 허둥·빈둥거림으로 보이는 이유이다. ‘니나는 왜?’에 대한 연극적 설명이 없다. 자유로운 영혼이니 행위가 큰 것은 타당하지만, 도대체 니나는 누구이고, 그녀는 왜? 다른 인물도 마찬가지다. 인물 형상화가 부실하니 요압은 밋밋하기 그지없고, 소리의 리듬감을 잘라먹는 즈비의 화술은 낯설기만 하다. 형상의 생동감이 없을 때 흔하게 목격되는 증세들이다.
4.3. 극의 핵심 갈등은 다간 선생과 요탐의 갈등이다. 하지만 다간 선생이 진정성 없는 꼰대가 되고 요탐이 절박함 없는 철부지가 되는 순간, 이 갈등은 속없는 쭉정이가 되고 만다. 전자의 사려 깊은 내면과 후자의 들끓는 학구열이 얼핏얼핏 고개를 들지 않으면 이 갈등은 건더기 없는 맹탕이다. 그나마 욕망과 개성의 구체성이 어느 정도 확보된 두 인물이지만, 저런, 성격이 평면적이고 심리의 깊이가 드러나질 않는다. 입체성 없는 인물에게 무대를 맡겼더니 핵심 갈등은 도덕책처럼 도식적이고 우화처럼 우연적이다. 이 갈등의 첨예화 없이 어떻게 개인과 집단의 문제가 부각될 수 있는가. 자기들끼리 껴안고 화해해버리면, 관객은 빈손이 된다. “개인의 자유와 공동체의 유지”에 관한 사유는 허사이다.
5. 한 작품의 예술성은 그 작품의 내적 속성이라기보다는 사회적 주체들의 인지체계에 의존한다는 움베르토 에코의 수용자 중심론을 상기해야 한다. 예술성이란 관객과의 접경에 존재한다. 작의와 구상을 관객에게 윽박지를 일이 아니라, 설득력과 논리를 갖춰야 한다. 연극적 효과도 면밀히 따져야 하고, 배우의 표현능력도 고려해야 한다. 의도만 읽히고 표현에 성공하지 않는 시도는 배제되어야 한다. 확신과 확인 없이 상식과 관례를 외면하는 것도 안이하다. 폐허가 된 무대를 바라보는 것은 씁쓸한 일이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일자
2019.09.01(일) ~ 09.11(수)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원작
아모스 오즈
각색
김연재
연출
장우재
출연
권지숙, 박지아, 김충근, 신안진, 마두영, 고윤희, 조연희, 김신록, 이동혁, 김희선, 라소영, 안준호, 이진홍, 신정연
극단 이와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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