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아르코 파트너 장우재
[세대교차] 원칙적으로는 우리 모두 친구
임승태
168호
2019.0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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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대 중앙에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시골 마을 어귀 서낭나무인 양 중심을 잡고 서 있다. 바닥엔 이 나무를 중심으로 흰 선이 열십자로 뻗어 있고, 그 주변에 키부츠의 각종 일터가 마련된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터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각 일터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될 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
무대 중앙에 나무 한 그루가 마치 시골 마을 어귀 서낭나무인 양 중심을 잡고 서 있다. 바닥엔 이 나무를 중심으로 흰 선이 열십자로 뻗어 있고, 그 주변에 키부츠의 각종 일터가 마련된다.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나무를 중심으로 펼쳐진 일터가 시계 방향으로 회전한다. 각 일터는 인물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사건의 배경이 될 뿐만 아니라, 구성원 모두가 육체노동을 통해 공동체를 꾸려 가고 있음을 전시한다. 사람들은 낮에는 각자의 일터에서 일하고 밤이 되면 회전 무대 밖, 작은 테이블과 의자가 놓여 있는 자기 숙소로 돌아간다. 함께 일하고 함께 먹으며 함께 아이를 기르는 것이 키부츠의 운영 원리라는 점에서 배우들이 대사가 없는 순간에도 무대 위에서 주어진 일을 하는 것은 이 공동체를 재현하기에 적합한 방식이다. 하지만 원칙적으로는 매우 이상적인 이 공동체에서도 집단과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 그리고 개인과 개인 사이에서 갈등은 빚어지기 마련이다. 어쩌면 작가가 이 작품에서 말하고자 했던 것도 바로 이상과 현실의 괴리였으리라. 그럴 땐 각자의 일터가 잠시 무대 밖으로 나가고 중앙에 회의장이 꾸려진다. 가운데 긴 테이블에는 찻주전자가 놓여 있고,2) 사람들은 의자를 가져와 둘러앉는다. 소소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해결되면서 하루하루가 흐른다. 회전 무대가 돌아갈 때 구구궁 하는 기계음이 들려온다. 조용히 진행되는 공연이기에 감출 수 없는 육중한 소리다. 이처럼 무대는 때가 되면 원하든 원치 않든 돌고 돌면서 그렇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어 (어쩌면 조금은 달라진) 새 하루를 맞는다.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에는 원작의 등장인물과 사건을 연극이라는 그릇에 옮겨 담기 위해 애쓴 흔적이 역력했다. 아모스 오즈의 원작(<친구 사이>)에서는 각 인물의 이야기가 챕터마다 차례로 전개되고 그로 인해 각자의 사연과 갈등이 시간(과 지면의) 간격을 두고 드러나는 반면, 각색은 대부분 인물을 무대 위에 동시 배치하고 대화가 연결 고리를 타고 넘나들도록 하고 있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 일하고 있는 모습을 동시 조망할 수 있는 것은 각색을 통해 얻게 된 큰 소득이었다. 소설의 각 챕터가 큰 그림의 한 부분을 따로 떼어서 꼼꼼히 들여다보게 한다면 이번 공연은 각 부분을 다시금 하나의 큰 그림으로 조망할 수 있게 했다.
무대 위에서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고 관객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볼 수 있어도 좋았겠지만, 아르코 대극장에서는 여의찮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요탐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공연을 풀어간 것은 잘한 선택 같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고르게 다루고 있는 원작에 비한다면 공연이 모든 인물의 사연을 충분히 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연이라는 조건, 특히 시간적 제한을 고려한다면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했고,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 요탐의 사건은 구심점으로 적절했다. 우리에게도 매우 민감한 문제인 대학 진학이기에 관객들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라는 작품의 주제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 요탐을 원작과 달리 여성 인물로 설정한 것도 흥미롭다. 물론 남성으로 설정된 원작에서도 공동체의 의무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의 갈등은 잘 드러난다. 하지만 초기 키부츠의 중요한 원칙인 성 평등 정신을 드러내기에는 여성 인물이 더 효과적이다. 물론 요탐이란 히브리 이름은 원어민에겐 아무래도 남자 이름처럼 들릴 테지만, 한국 관객에게는 (다윗이나 야곱같이 인지도가 높은 이름이 아닌지라) 크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 공연이 젠더 프리 캐스팅을 통해 권력 구조의 재현에서 반복되는 젠더 불평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작의 설정을 고쳐 갈등하고 선택하는 캐릭터를 여성으로 배당했다는 것 또한 분명 의의 있는 시도라 할 만하다.
요탐의 이름 외에도 문화적 코드가 어긋나는 지점들이 이따금 보였는데, 그 어색함이 오히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관습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이 무관하게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면서도 서로 존댓말을 하는 극중 대화법은 적어도 내 어감에는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합쳐진 듯한 어색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어쩌면 머잖아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르는 게 우리의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모두가 닉네임을 부르며 존댓말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 한 유명 IT 기업에서는 수평적인 직장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함 대신 영어 이름을 부르며 공연에서 사용된 바로 그 방식으로 대화한다고도 한다. 한편, 키부츠를 떠난 줄 알았던 모시가 한참 뒤에 돌아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느라 늦었다고 전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시에게 위로를 건네는 장면도 ‘한국인의 정서’라는 기준에서는 상당히 건조했다. 슬픔을 나누고 있다기엔 어색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이내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한국인의 정서란 게 그 익숙한 표현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까? 번역극 특유의 어중간한 선택에서, 그래서 느끼는 어색함에서 결국 키부츠라는 낯선 공동체를 다룬 이 연극을 지금 여기서 만들고 보는 이유를 찾도록 한다.
무대 위에서 모든 인물이 각자의 이야기를 동시에 진행하고 관객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골라볼 수 있어도 좋았겠지만, 아르코 대극장에서는 여의찮은 일이다. 그런 점에서 요탐의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공연을 풀어간 것은 잘한 선택 같다. 등장인물들의 사연을 고르게 다루고 있는 원작에 비한다면 공연이 모든 인물의 사연을 충분히 담고 있지는 않았다. 하지만 공연이라는 조건, 특히 시간적 제한을 고려한다면 선택과 집중은 불가피했고, 그렇다면 많은 사람이 관여하는 요탐의 사건은 구심점으로 적절했다. 우리에게도 매우 민감한 문제인 대학 진학이기에 관객들은 공동체와 개인의 자유라는 작품의 주제에 빨리 들어갈 수 있다. 요탐을 원작과 달리 여성 인물로 설정한 것도 흥미롭다. 물론 남성으로 설정된 원작에서도 공동체의 의무와 개인의 자유 사이에서의 갈등은 잘 드러난다. 하지만 초기 키부츠의 중요한 원칙인 성 평등 정신을 드러내기에는 여성 인물이 더 효과적이다. 물론 요탐이란 히브리 이름은 원어민에겐 아무래도 남자 이름처럼 들릴 테지만, 한국 관객에게는 (다윗이나 야곱같이 인지도가 높은 이름이 아닌지라) 크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이 공연이 젠더 프리 캐스팅을 통해 권력 구조의 재현에서 반복되는 젠더 불평등을 본격적으로 비판하는 것은 아니지만, 원작의 설정을 고쳐 갈등하고 선택하는 캐릭터를 여성으로 배당했다는 것 또한 분명 의의 있는 시도라 할 만하다.
요탐의 이름 외에도 문화적 코드가 어긋나는 지점들이 이따금 보였는데, 그 어색함이 오히려 우리가 자연스럽다고 여기는 관습들을 낯설게 바라보게 만드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다. 나이 무관하게 이름으로 상대를 부르면서도 서로 존댓말을 하는 극중 대화법은 적어도 내 어감에는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가 합쳐진 듯한 어색한 느낌을 자아냈다. 하지만 어쩌면 머잖아 이런 식으로 서로를 부르는 게 우리의 일상이 될지도 모른다. 이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모두가 닉네임을 부르며 존댓말로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다. 한 유명 IT 기업에서는 수평적인 직장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함 대신 영어 이름을 부르며 공연에서 사용된 바로 그 방식으로 대화한다고도 한다. 한편, 키부츠를 떠난 줄 알았던 모시가 한참 뒤에 돌아와서 아버지 장례를 치르느라 늦었다고 전하자 마을 사람들이 모시에게 위로를 건네는 장면도 ‘한국인의 정서’라는 기준에서는 상당히 건조했다. 슬픔을 나누고 있다기엔 어색하다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는데, 그러던 중 이내 다른 질문이 떠오른다. 과연 한국인의 정서란 게 그 익숙한 표현만큼이나 우리 삶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을까? 번역극 특유의 어중간한 선택에서, 그래서 느끼는 어색함에서 결국 키부츠라는 낯선 공동체를 다룬 이 연극을 지금 여기서 만들고 보는 이유를 찾도록 한다.

무대 위에 전시된 공동체를 우리는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남녀노소 모두가 땀 흘려 각자 맡은 일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내 집이 아니라 차별 없이 먹이고 입히면서 보육원에서 길러야 한다. 설령 내게 부자 삼촌이 있어 나의 대학 교육비 전액을 지원한다고 해도 내 순번이 올 때까지는 의무 노동을 하며 기다려야 한다. 그리고 마침내 때가 오더라도 공동체가 필요로 하는 것을 전공으로 선택해서 공부하고 돌아와야 한다. 우리 주변에서 누가 이런 공동체를 주창한다면, 당장 우리의 헌법적 가치인 자유민주주의를 부정하는 위험한 사회주의적 발상이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완전히 틀린 지적은 아니다. 키부츠란, 원작에서 요압이 말하는 것처럼, 맑스를 탈무드로 여긴 사람들이 세운 공동체이므로 자유민주주의 체제에서는 이런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위험한 일로 여겨질 수도 있다. 광화문에서 정기적으로 다윗의 별 문양의 깃발을 흔드는 사람들도 키부츠의 정신을 선뜻 받아들이지는 못할 것 같다.
이 공연에서 다루는 키부츠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 키부츠도 이 작품이 다루는 초기와 지금은 꽤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community)란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한 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커뮤니티’는 지금 우리에겐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요즘은 취미, 성별, 정치 성향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상 공간에 모여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집단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이제 대학의 축제도 ‘대동제(大同祭)’라고 부르는 건 왠지 어색하다. 공동체란 말보다 비록 씁쓸할지언정 ‘각자도생’이란 말이 더 와닿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적으로 개인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채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살면서 공동체로 묶인다. 한국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남보다 더 좋은 학교를 나와 직장에 들어가고 내 스펙에 걸맞은 짝을 얻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아이를 낳아 더 좋은 걸 먹이고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그래서 그 아이도 좋은 학교, 직장, 결혼, 아파트를 선점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든 혹은 그렇게 살지는 않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 한편에 불안을 느낀다. 이 ‘테크 트리’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사람은 주류 클럽에 가입할 수 있고 자식에게는 다른 색깔의 수저를 물려 줄 수 있게 된다. 반면 낙오한 사람들은 별수 없이 헬조선 혹은 지옥불반도 커뮤니티의 정회원이 된다. 분명한 건, 이 순환 고리를 벗어나는 것은 개인의 힘이나 ‘노오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그렇기에 남다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같이 모여 다른 집단(키부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최근 여러 형태로 시도되는 공동육아 공동체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삶의 실체는 공연에서 보여주듯이 냄새나는 양계장을 청소하거나 고장 난 부화기 때문에 절절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반드시 포함할 수밖에 없다.
이 공연에서 다루는 키부츠는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다고 느낄 수도 있다. 실제 키부츠도 이 작품이 다루는 초기와 지금은 꽤 많이 달라졌다고 한다. 그렇지만 여전히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동체(community)란 게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는 한 번쯤 되새겨 볼 일이다. ‘커뮤니티’는 지금 우리에겐 어떤 의미로 쓰이고 있는가? 요즘은 취미, 성별, 정치 성향 등을 공유하는 사람들이 가상 공간에 모여 반대 진영의 사람들에게 혐오와 조롱의 말을 거침없이 내뱉는 집단을 지칭할 때 자주 사용되는 것 같다. 이제 대학의 축제도 ‘대동제(大同祭)’라고 부르는 건 왠지 어색하다. 공동체란 말보다 비록 씁쓸할지언정 ‘각자도생’이란 말이 더 와닿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전적으로 개인으로만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럴 수도 없다. 우리는 좋든 싫든 비슷한 생각을 공유한 채 좁은 지역에 밀집해서 살면서 공동체로 묶인다. 한국에서 사는 이상 우리는 남보다 더 좋은 학교를 나와 직장에 들어가고 내 스펙에 걸맞은 짝을 얻고 아파트 평수를 늘리고 아이를 낳아 더 좋은 걸 먹이고 (영어) 유치원에 보내고 그래서 그 아이도 좋은 학교, 직장, 결혼, 아파트를 선점하게 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기 어렵다. 적극적으로 추구하든 혹은 그렇게 살지는 않지만 그렇게 사는 사람들을 보며 마음 한편에 불안을 느낀다. 이 ‘테크 트리’를 성공적으로 이행한 사람은 주류 클럽에 가입할 수 있고 자식에게는 다른 색깔의 수저를 물려 줄 수 있게 된다. 반면 낙오한 사람들은 별수 없이 헬조선 혹은 지옥불반도 커뮤니티의 정회원이 된다. 분명한 건, 이 순환 고리를 벗어나는 것은 개인의 힘이나 ‘노오력’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점이며, 그렇기에 남다르게 살고자 하는 사람들 또한 같이 모여 다른 집단(키부츠)을 적극적으로 만들어 갈 필요가 있다. 최근 여러 형태로 시도되는 공동육아 공동체가 그 한 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삶의 실체는 공연에서 보여주듯이 냄새나는 양계장을 청소하거나 고장 난 부화기 때문에 절절매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반드시 포함할 수밖에 없다.

무대 위에 전시된 가상의 공동체, 그리고 이를 매개로 구성된 극장 안의 일시적 공동체는 지금 우리에게 무엇이 결핍되어 있는지를 보여주면서 각자 혹은 함께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도록 도전한다. 이번 공연에서 무대 위에 서 있는 나무들, 중앙에 있는 예의 그 나무를 비롯한 무대 위 네 그루의 나무가 뿌리를 내리지 못한 채 포장지에 싸여 바닥에 놓여 있는 것은 어쩌면 극장 밖에서 이루어질 도전을 위함일 수도 있다. 나무를 땅에 심는 일은 내일에 대한 믿음이, 그리고 그 나무의 과실을 함께 누릴 공동체에 대한 소망이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사진 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옥상훈]
- 제목은 원작에 있는 요압의 다음 말에서 가져왔다: “원칙적으로는 우리 모두 친구여야 하는데 실제로는 친구가 무척 드물잖아요.” 아모스 오즈, 『친구 사이』, 민은영 역, 문학동네, 2013, 168쪽.
- 원작에서 언급된 사모바르를 대체한 작은 찻주전자는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감당하기엔 너무 작아 보였다. 어쩌면 이 작은 찻주전자가 공동체 안에서 살아가는 개인의 쓸쓸함을 대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이제 내 이야기는 끝났으니 어서 모두 그의 집으로 가보세요
- 일자
- 2019.09.01(일) ~ 09.11(수)
- 장소
-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 원작
- 아모스 오즈
- 각색
- 김연재
- 연출
- 장우재
- 출연
- 권지숙, 박지아, 김충근, 신안진, 마두영, 고윤희, 조연희, 김신록, 이동혁, 김희선, 라소영, 안준호, 이진홍, 신정연
- 극단 이와삼, 한국문화예술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