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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이엠 피지컬 띠어터 <D섬_122513>

[작품리뷰] 우리는 저마다 섬이 되어

김송요
169호 2019.10.10
글을 쓸 때 무심코 ‘우리’라는 주어를 붙이는 것이 섣부르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 )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처음 생각난 주어, 아니 단어, 아니면 개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우리’다....
글을 쓸 때 무심코 ‘우리’라는 주어를 붙이는 것이 섣부르고 위험한 일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하 )에 대해 쓰려고 할 때 처음 생각난 주어, 아니 단어, 아니면 개념 하나를 꼽으라면 단연 ‘우리’다.
의 발화주체이자 대상은 사이버 세상에 섬을 띄우고 사는 사람들이다. 공연은 각자의 소셜미디어 계정을 갖고 사는 사람들이 어떤 감정으로 자신의 섬을 대하고, 가꾸고, 그것과 이별하는지 등을 담았다. 공연은 이들 주제를 세세히 서술하기보다는 몸짓, 프로젝션, 소품, 사운드 등을 통해 요약하거나 정돈함으로써 보편적이고 쉽사리 공감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렇기에 이 하는 이야기, 또는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안전하지만 평이한 모호함을 동반한다. 어쩌면 이는 ‘D섬’이라는 제목 자체가 이미 암시한 것일지도 모른다. ‘D섬’이란 이름에선 아무것도 추측할 수 없는 동시에 아무거나 추측할 수 있다. 섬이 상징하는 수많은 것들이야 차치하고서라도, D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디지털? 도메인? 거리distance? 문door? 차원dimension? 발견discovery? 혹은 전략형 전쟁 게임을 할 때 A, B, C를 거쳐야만 도달할 수 있는, D섬? 아니 잠시만, 설마 DA원 예술?
이름 붙이기의 가능성과 선택지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폭넓은 해석의 여지를 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명쾌한 대답을 유보하는 일이기도 하다. 바로 이 점이 이 갖는 특징이자 장점이자 단점이다. 혹자는 이 정도도 충분히 구체적이고 개인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각자 체험한 내용을 바탕으로 만들었고, 개인의 감정을 담았으니까. 그리고 어쩌면 이만큼의 설명이 움직임이나 미디어아트로 표현 가능한 정도라고 반박할 수도 있다. 그러나 애초에 그런 한계점을 지정하는 것이 불합리함은 물론이거니와, 이 공연이 연극의 발화법 역시 체화한 다원·복합장르임을 생각했을 때 단일장르에서 존재할 수 있는 부족함을 메울 방법은 이미 충분할 것이다. 각자 스마트폰만을 들여다보다가 셀카를 찍을 때만 친근하게 몸을 붙인 채 미소를 짓는 순간이나, 청소와 병치되거나 은유되는 사이버 세상 속 흔적 지우기를 독백하는 장면 정도에서만 연극이 역할 한다면 아쉬울 노릇이다.
물론 처음부터 ‘단상’으로서의 정체성을 분명히 하기에, 이야기의 간소함을 꼭 부정적 요소로 여기고 싶지만은 않다. 공연 후, 공연 뒤의 활발한 토의에 초점을 두었나 추측하기에 이르면 꽤 긍정적인 마음도 든다. 그러나 이번에도 같은 지점에서 의문이 생긴다. 공연은 당연히 무대 밖으로 이야기가 뻗어 나갈 수 있게 하는 것이고, 공연 안에서 스스로 해결하고 소화해내야 하는 몫은 별개가 아닌가?
그러니까 을 보고 곧장 떠올린 ‘우리’라는 말은 전혀 가치 중립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긍정이거나 부정인 것도 아닌, 아주 애매한 개념이다. ‘우리’는 지시적으로 나와 너를 뜻하지만 사실 누구도 아닌 불특정 다수를 일컬을 때도 쓰는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란 때로 아주 공허한 주어다. 대강 주어가 필요할 것 같거나 왠지 성찰적이어야 할 것 같은 자리에 밀어 넣는 ‘우리’에 머물지 않기 위해, 실체를 가진 우리가 되기 위해 이 작품이 더 밀어붙이는 부분이 있었으면 하는 마음이 거듭 남는다. 어떻게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같을 수 있으랴. 문장이 또 단어가 다르고, 행간이 다르고, 문단의 순서가 다를 텐데 말이다. 그렇기에 차라리 ‘우리’의 이름으로 할 수 있는 것은 더욱 평평해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구체적인 것이 아닐까. 인터넷 게시판 속 ‘공감 100% 도전’이 순간적으로 주는 웃음이 아주 사적인 서사와 마주해서야 각별한 의미를 맺게 되는 것처럼, 이 이야기도 조금 더 면밀한 세부를 통해 도리어 각자의 경험과 밀착한 감흥을 주었더라면 어땠을까. 나탈리 골드버그가 말한 것처럼 그냥 ‘꽃’이라고 부르는 대신 ‘제라늄’이라고 말할 때 우리는1) 현재 속으로 더 깊게 뚫고 들어가게 되므로.
다른 이야기도 하고 싶다. D섬의 아주 큰 매력은 빛나는 이미지다. 이 말이 소위 알맹이와 껍데기를 나누어 그 외형을 칭찬하는 것은 결코 아님을 주지하고 싶다. (실은 두 가지 마음이 든다. 이것을 단순히 ‘감각적’이라고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 싶지 않다는 것과 아니, 예쁜 것이 나쁜가? 하는 반감.) 이 작품은 큰 면적의 평면부터 작은 부피의 사물까지 다양한 소품과 무대미술을 활용한다. 공연의 앞뒤로 퍼포머들이 소중히 들고 있는 아크릴 박스는 인터넷 속 작은 저장창고 또는 계정을 떠올리게끔 한다. 섬에 섬의 생태계가 있듯이 D섬은 내가 만들었지만 또 다른 자아를 갖고 성장한다. 다만 이곳은 자생종의 뜰이 아니어서 트랙터로 일구어주기도 갈아엎기도 하고 군데군데를 살펴야 한다. 무대에 돋아난 풀밭과 공연 중 무대를 누비는 RC카가 보여주듯 말이다. 한편 섬은 성이 아니기에 요새를 뚫어야만 들어올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때로는 작은 광장으로 변모하기도 한다. 사방으로 종횡무진하던 퍼포머들이 무대 위에 색지를 촤르륵 펼치는 순간은 각별히 매혹적이다. 반짝이 패턴 색지 위 잔잔한 빛의 일렁임은 섬이 떠 있는 바다의 윤슬 같기도 하고 그 선적인 형태로 인해 소셜미디어 속 타임라인 같아 보이기도 한다. 이는 ‘정주행’과 ‘역주행’을 할 수 있는, RC카의 트랙이 된다. 퍼포머들의 타임라인-트랙은 종종 겹쳐지고 교차로에서 마주치기도 하며, 이들은 그 위에서 자주 현대무용의 움직임을 빌려, 종종 연극의 언어를 빌려 발언한다. 제한된 공간에서 긴장감을 안은 정동을 오가며 물리적으로 접촉하기도 하고, 직접적인 대사나 지시적인 동작으로 설명을 하기도 하는 것이다. 비유와 상징인 동시에 그 자체로 시청각 이미지의 큰 면적을 차지하기도 하는 이들 소품은 을 이끌고 보완하는 주요 요소가 된다.
의 정식 제목은 이다. 그러니까 이 섬엔 ID내지는 시리얼 넘버가 있는 셈이다. 이것이 이 차후 언제든 가질 수 있는 핍진을 상상하게끔 하는 단초라고 한다면 과한 소리일까? 앞으로도 오랫동안 소셜미디어와 ‘우리’의 이야기는 낡지 않고 현재진행형의 주제로 존재할 것이고, 이 제공하거나 암시한 요소들은 그 자체로도, 또 다른 이야기의 힌트로도 의미 있을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섬이 있다/그 섬에 가고 싶다’는 정현종의 시처럼, 우리는 여전히 D섬에 가고 싶(어질 것이)다. D섬에 어떤 풀이 자라고 어떤 열매가 맺히고 어떤 새가 날아다니는지를, 조금 더 들여다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1. 원문에서는 ‘당신’으로 번역된 ‘you’가 쓰였다.

[사진 제공: 제이엠 피지컬 띠어터 ⓒKim Sua]

D섬_122513
일자
2019.09.20(금) ~ 09.21(토)
장소
콘텐츠문화광장 스테이지66
연출
이정윤
영상
정진아
안무
임다운
음악
곽정민
조명
김종석
기술
인터렉션랩
디자인
그래서그림
출연
임다운, 나경호, 백진주, 김종우
제이엠 피지컬 띠어터
관련정보
https://www.onoffmix.com/event/1917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