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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벨이 울린다 <이게 마지막이야>

[작품리뷰]이번이 마지막이야

이창근_쌍용차 노동자
170호 2019.10.24
완벽한 익숙함이 오히려 불안함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에서 느끼는 낭패감은 피할 공간조차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곳이 약간의 불안을 품고 있을 때 긴장은 배가 된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완벽한 익숙함이 오히려 불안함을 야기하는 경우가 있다. 너무나도 당연한 상황에서 느끼는 낭패감은 피할 공간조차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익숙한 곳이 약간의 불안을 품고 있을 때 긴장은 배가 된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는 평범한 편의점 한 곳을 무대로 삼는다. 편의점 안에 물건이 가득하다. 가로세로 무심하게 쌓여 있지만 촘촘하게 짜인 시간을 보여주는 것 같다. 이 연극은 시간의 이야기며 염치란 것의 소견서다. 파인텍 노동자들의 굴뚝 농성을 모티브로 삼았지만, 굴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굴뚝 아래를 주목하고 굴뚝 이면을 비춘다. 우리에게 굴뚝이란 무엇인가를 묻는 연극인지도 모른다. 두 아이를 키우는 아내, 남편의 굴뚝 농성 동료, 학습지 교사, 편의점 사장 그리고 아르바이트 학생이 등장한다. 단순하지만 응축된 등장인물들이다. 현실은 판타지가 아니다. 그래서 불편한지도 모른다. 이 짧은 연극에 희망이란 없다. 그래서 불행의 최저선을 빨리 찾고 싶어졌는지도 모른다. 다급히 바닥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 내가 딛고 선 곳이 어딘지를 확인하고 싶은 다급한 자들의 마음이 적나라하게 등장한다. 연극은 시종일관 무겁다. 공기조차 객석을 짓누르는 듯하다. 주인공이 느끼는 무거움이 눈앞에 닥친 현실의 문제라면, 한 발 떨어져 보고 있는 이들에게는 언젠가 곧 닥칠 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피해 갈 우회로는 잘 보이지 않는다. 누구나 이 길 위 어디쯤에서 걷거나 뛰고 있기 때문이다.
굴뚝 농성을 마친 남편이 이제는 방에서 나오질 않는다. 굴뚝 위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통 얘기를 하지 않아 아내는 답답하고 궁금하다. 아이 둘을 키우며 파트타임으로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한다. 친절한 편의점 사장은 매너 좋게 아내의 시간을 뺏는다. 물건 정리에 드는 시간과 출퇴근 시간을 부스러기처럼 염치없이 뜯어 먹는다. 유통기간 지난 음식을 손에 쥐여주며 돈이 아닌 넉살 좋은 웃음으로 뺏은 시간을 대신한다. 기분에 따라 매니저로 승진을 시켰다가 ‘아주머니’로 강등한다. 그저 사장 기분에 따라 밥줄이 출렁거린다. 비루한 일상이 여과 없이 관객에게 밀려든다. 굴뚝 농성을 함께 했던 동료가 아내를 찾아와 급히 쓸 일이 있다며 빌린 돈을 갚아 달라는 부탁을 한다. 아내는 역정을 냈지만 이내 계좌 번호를 묻는다. 있을 법한 일이라서 부끄러웠고 미안했다. 거대한 악과 싸운다는 이유로 일상에서는 취약해질 수밖에 없는 투쟁하는 노동자의 모습. 몸 둘 바를 찾지 못할 만큼 얼굴이 화끈거렸다. 외면했던 일상이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폭풍처럼 일어났다. 남편이 빌렸다는 돈을 갚기 위해 사장에게 돈을 꾸었지만, 이제는 자녀의 학습지가 문제다. 교육비 몇 달 밀린 학습지 교사는 아내의 딱한 사정을 봐서 차일피일 미뤄줬지만, 회사의 압박을 더는 견디지 못한다. 결국 하루에 만원이라도 받아가겠다고 나선다. 을들의 슬픈 일상이 생각을 더욱 잘게 쪼갠다. 급기야 편의점 아르바이트 학생은 밀린 임금 받으려 편의점 문을 걸어 잠그고 ‘근로기준법이라도 지켜라’를 써 붙인 채 농성을 벌인다. 누가 누구의 사정을 먼저 봐줘야 할까. 마침내 생각이 엉키고야 말았다.
연극 <이게 마지막이야>를 볼 생각이 없었다. 하필 굴뚝 농성을 모티브로 한다기에 더욱 내키지 않았다. 뻔한 얘기여서가 아니다. 굴뚝 농성이라는 것이 멀리서 보면 소영웅주의적 희극일지 몰라도 가까이서 경험해 보면 일 분 일 초가 비극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촘촘한 긴장을 다시 견디기 싫었다. 다시 돌리고 싶지 않은 어떤 기억과 장면은 누구에게나 있다. 내게 굴뚝은 그런 곳이다. 의식이 확장되다 못해 폐사한 물고기 배처럼 부풀어 올라 생각이 퉁퉁 부었다. 쏟아지는 생각과 그 생각의 끝조차 알 수 없는 지경으로 곤두박질치기 일쑤였다. 고독하기만 했고 심각하기만 했다. 작은 투쟁은 보잘것없다 판단했고 굴뚝 농성과 같은 선 굵은 투쟁을 승리로 만들어야 지난 아픔의 시간을 모조리 되돌릴 수 있다 확신했다. 때로는 미쳐 날뛰었고 기뻐하며 나댔다. 이 모든 행동의 근거와 이유가 결과로 수렴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마음 몰라주는 이들이 야속했고 굼뜬 이들이 저주스러웠다. 홀로 이 괴로움을 지고 있다는 자의식에 자주 빠졌지만, 그조차 선택받았다는 최면의 달콤함으로 극복되었다. 점점 세상은 단순해졌고 선과 악으로만 구분되었다. 주변과 가장자리 소리는 점점 들리지 않았다. 해고 기간 내내 언론 담당을 한 터라 때깔 나는 단어를 자주 찾았고 빛나는 언어를 구하려 안달을 냈다. 피해자라는 위치, 그것은 여간 달콤한 자리가 아니었다. 결코 포기하고 싶지 않았을 정도로. 나는 그 방향으로 병들어갔다.
인생은 연극일까. 그렇다면 나는 배우인가 연출가인가. 아니면 작가일까. 혹시 관객은 아닐까. 연극을 보고 난 후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의 역할을 조금씩 떼서 맡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연극 보는 내내 들었던 어떤 묵직함이 연극이 끝나자 개운하게 사라졌다. 연극에서 아내가 고통스럽게 내뱉었던 대사 “약속했잖아, 이게 마지막이라고”가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마지막이라던 했던 말이 문제였을까. 그 말을 약속한 것이 잘못일까. 마지막이라는 것은 존재하는 것인가. 연극은 투쟁하는 ‘남자들이여 아내의 고통과 아이들의 수고스러움을 알라’는 메시지 앞에 멈춰 있지 않다. 우리 모두는 높낮이 다른 철탑 위와 굴뚝 위에 올라 살아간다는 것과 이 투쟁은 결코 끝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얼마나 그 과정 안에서 더 많은 행복과 기쁨을 찾기 위한 노력을 할 수 있는가의 문제다. 놓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그것을 찾기 위해선 민감한 촉수를 가져야 하고 그 촉수를 기르는 노력으로만 가능하다. 이 연극을 아내와 아이와 함께 봤으면 좋았겠다 싶었다. 그러나 선뜻 말하지 못했다. 엄두가 나지 않아서였는데 이제는 함께 보자는 말을 할 수 있을 것 같다. 낡은 나사의 성실한 회전만이 삶을 단단하게 만드는 법이니까.

[사진 제공: 전화벨이 울린다 ⓒ박태양]

이게 마지막이야
일자
2019.09.27(금) ~ 10.13(일)
장소
연우소극장
작
이연주
연출
이양구
기획
정소은
무대감독
예일
무대디자인
조경훈
조명디자인
고귀경
사운드디자인
정혜수
조연출
김이안
홍보물디자인
신지영
사진
박태양
영상
김성균
조명오퍼
김현
음향오퍼
김이안
신체훈련
선인
출연
이지현, 김상보, 황순미, 조형래, 정혜지
관련정보
http://www.playticket.co.kr/ticketDetail.html?idx=99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