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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거리예술축제2019 <워크맨 인 서울>, <친밀한 공간>

[작품리뷰]친밀한 공간

김민관_아트신 편집장
170호 2019.10.24
표면적으로 해외 작품이라는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없는 두 공연을 엮어 본다. 물론, 소수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며,....
표면적으로 해외 작품이라는 것 외에 어떤 공통점이 없는 두 공연을 엮어 본다. 물론, 소수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며, 장소 특정적 성격을 갖는다는 것은 두 작업의 본질적인 차원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공연의 방식 자체가 근래에 이르러서는 실은 창작에 있어 하나의 선택의 형식일 수도 있다고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거리 예술이라 불리는 예술의 형식에서는. 오히려 그 장소를 특정화할 때 그것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 단순히 배경을 낭만화하려는 것 아닌지 의구심을 가져볼 필요도 있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독립적으로 두 공연의 리뷰를 볼 수 있되, 관객을 윤리적 주체의 지위로 두(려)는 방식의 측면에서 공통점을 도출해보고자 했다. 여기서 ‘윤리’란 올바른 것(을 따를 것)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존재 자체를 스스로 반영하는 지점을 공연에서 또는 공연을 통해 구성하게 됨을 의미한다.
극단 아르펑터 <워크맨 인 서울>

‘워크맨을 들으며 서울을 걷는 사람’, 말 그대로 제목을 중의적으로 위치시키는 공연은, 관객 한 명의 현존을 구성한다. 사실 거기에 별다른 비밀이나 기술이 있는 건 아닌데, 단지 경험상으로 잘 측정된 공연일 뿐이라는 것이다. 회현역 부근 한 카페에서 헤드폰을 인계해 천천히 발걸음을 옮기며 헤드폰의 음성에 따라 이동하면 되는 공연에서, 내밀한 산책 반려인을 자처하는 오디오 가이드는 실은 이미 존재했었던 목소리이지만, 그의 말은 일종의 공연의 매뉴얼이자 룰이라는 점에서 관객의 모든 감각을 동원해야 하는 수행의 근거이자 정언명령이 된다. 곧 헤드폰을 벗는 순간 공연의 가상적 실재는 끝이 나며, 발걸음은 오직 개인의 목적지에 맞춰지게 된다.
구체적으로 헤드폰의 목소리와 사운드(만 있는, 정확하게 말하면 재생되는 공연의 사운드)만 존재하는 공연에서, 전자가 일종의 지표로서 도로명, 간판과 같은 상호를 언급한다면, 후자는 주로 내딛는 발걸음의 수를 조직하는데, 때로는 좁은 도로에 지나가는 차의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자동차의 사운드가 출현하기도 한다. 후자는 배경의 차원이지만, 결코 사라지지 않으며, 전자와 후자는 연동된다. 곧 다른/다음 지표를 이야기하며 발걸음의 사운드가 ‘멈추게’ 되어 있다. 발걸음의 수는 참여자의 신장지수와 보폭에 따른 차이까지를 반영하지는 않지만, 이전 지표와 이어지는 다른 지표의 차이는 그리 크지 않은 관계로―이 점이 매우 중요하다.―거의 적확하게 다음 지표가 있는 장소를 발견하거나 도착하게 되어 있다.
사운드는 무엇보다 힘이 매우 세다. 사운드는 현존을 매개한다. 가령 우리는 전화를 받을 때 상대방과의 기존 관계를 자세와 태도로써 그대로 보존하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지표들 간 간극이 매우 작은 측면으로부터 이 ‘아날로그적 원격 조종’은 실패 없이 성공한다. (그러니까 이 공연에 간간이 음성이 사진을 찍자고 할 때 우리가 꺼내 드는 게 휴대폰이라는 것을 제한다면, 디지털적인 요소란 있는가. 그리고 단지 실제 워크맨이 아닌 CDP를 그대로 재생시키는 것 외에, 더 다른 어떤 기술적 요소가 공연에 있는가.) 아이패드와 같은 작은 스크린으로 증강현실을 구성하거나 휴대폰 앱의 메시지를 따르거나 실제 퍼포머가 동반되어 길을 안내해주거나 하여 목표지를 찾아 나갔던 여러 공연의 형태들에 비해 이는 가장 직접적으로 상대를 마주하며 그로부터 목적지를 인도받는다.1) 다시 말하자면, 사운드는 존재를 현재에 출현시킨다, 현재의 존재와 맞물려.

이 사운드는 매우 잘 측정되어 있고 미시적으로 도시 곳곳을 보고 감각하게 하여 어떤 서사를 직조한다. 이 사운드는 거리와 골목을 오가며 공적인 차원과 사적인 차원을 오르락내리락하게 하는데, 여기에 내밀한 목소리가 이 산책에 가까운 걷기의 여정에 확신을 주는 셈이다. 김두식 분의 집 앞을 서성거리거나 연두색 계단을 통해 누군가의 집―사실은 오래된 한의원에서 현재 고시원으로 바뀐 건물의 개방형 복도―으로 들어가는 아슬아슬한 사적 경계로의 침입은, 이를 ‘안전한 여행’으로 확장/합리화한다기보다 그 잠입자로서의 지위 자체를 하나의 은밀한 사적 경험으로 수축하(려)는 측면이 크다. (무엇보다 근원적으로 안전한 여행이란 존재하는가.)
하지만 그것이 안전한 것―실제 김두식 분의 집에는 주인이 없다고 한다.―이 아니라 올바른 것임(잘못된 것이 아님)을 확신할 수 있는 건 이 목소리에 대한 믿음 바깥에는 없다. 그 믿음은 또한 이 공연의 룰이기도 하다. 여기서 미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분기한다, 아니 그 둘이 근원적으로 만나(지 못하)는 지점을 가리킨다. 우리는 공연 안에서 안전하지만, 공연의 바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곧 이 공연은 관객을 방치하고 수동적 수행자의 역할을 부여하면서 그 바깥의 실재가 완전히 소거/지시될 수 없는 환경임을 전제한다. 그리고 거기서 보고 얻는 경험이 결국 그 순간 존재하는 관객 한 명의 것임을 지시하려 한다.2)

이 공연의 (마지막에 한 번 더 반복되는) 관객을 향한 명시적 메시지는 이탈로 칼비노의 소설 『보이지 않는 도시들』에 나오는 마르코 폴로의 우화를 따라 또 다른 삶의 가상성을 고찰하는 것, 그리고 첫 번째 자신이 선택한 것에 대해 확신을 가질 것이다. 우리는 타인의 모습을 우리의 모습인 양 보는, 곧 유령처럼 이 도시를 떠도는 시점과 함께 유일한 주체로서 현재를 단 하나의 순간으로 결정지어야 한다. 결과적으로, 이 공연은 미세하게 분절하는 도시를 개인적 경험으로 종합하게 하는 어떤 시간이었다. 도시를 보는 게 아니라 읽는 것, 어떤 사유의 매듭을 만드는 것, 몸의 마디들을 세우고 또 움츠리며 감각하는 것. 옆에서 공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나도 모르게 대답하게 되는 것, 도시를 함께 보는 누군가가 옆에 있다는 것.
레스트레스 댄스 씨어터, <친밀한 공간>
관객은 실제 투숙객이 현재 있는 호텔 로비와 엘리베이터, 룸을 이동하며 퍼포머들을 ‘마주하게’ 된다. 공간은 매우 비좁으며 따라서 거리를 두고 보기 힘든데, 퍼포머의 현전은 그 가깝고도 잘 파악되지 않는 움직임―어느 정도의 거리가 온전하게 퍼포머의 형체를 보존할 것이다.―으로 인해 가상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여기에 반복되는 사운드 스케이프는 마치 머릿속을 무화시키는 효과를 의도하는 듯한데, 이처럼 가까운 거리는 친밀함을 일종의 강요로, 또 불가해한 타자와의 마주침으로 현상하는 측면이 크다. 곧 ‘친밀한 공간’에 있는 낯선 존재들을 마주하는 게 이 작업의 중핵이다.
장애인3)과 비장애인이 함께함을 씨어터의 정체성으로 내세운 레스트레스 댄스 씨어터는, 그 장애를 고유한 표현 양식으로 승화시키고자 한다. 타자성을 친밀함으로 두는 장치 혹은 전략은 장애인을 타자로 현상하려는 것이 아닌, 타자가 친화적 감각에 의해 무력화될 수 있는 상징계적 지위임을 역설하려는 것일 것이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호텔 로비에 이르러 처음 마주한 퍼포머가 누워서 자신을 일으켜줄 손을 관객 한 명에게 내밀고, 이후 그 관객이 신체를 맞닿아 퍼포머를 일으켜줬을 때 일어난 건 일종의 신체적 감염 주술이라 할 만 했다. 곧 그들을 근거리에서 보며 영원히 평행선상에 위치시킬 수 있는 게 아니라, 우리의 신체로 그들이 옮겨 올 수 있었으므로. (아마 이 ‘친밀함’에 대해 계속 생각해야 할 것이다, 이 공연의 흐름 안에서 이것이 어떻게 피상적 차원으로 접히는지. 또는 그러한 차원의 전반적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이 부분이 독보적인 예외의 순간이었는지를.)
이제 조금 더 내밀한 공간에서의 움직임을 겪게 되는데, 하나는 룸에 들어가 잠든 두 남녀의 움직임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괴로움에 절규하는 퍼포머의 움직임이 체현되는 부분이다. 룸에 들어가기 전 로비에서 관객 한 명, 한 명의 손목에 매단 수하물 물표를 확인하고 “감성 바보”에게는 손전등을 비출 것을 요구한다. 은밀한 사생활은 관찰되는 장면이 된다, 뻣뻣하고 묵묵하게, 하지만 적극적으로. 여기서 또한 미학적인 것과 윤리적인 것은 교차한다. 우리는 안의 바깥에 있는 셈이다, 유령처럼. 하지만 이는 이미 낯선 타자가 우리의 신체에 전염되는 걸 구현하려는 작업이 원점으로 반환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다시 우리는 곧장 룸을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처음 관객은 온라인상의 사전 예매 외에, 호텔 투숙객의 절차적 관문을 통과해야 이 공연에 임할 수 있다. 제일 먼저 호텔에 도착해 체크인을 하고 받아 든 “수하물 물표(BAGGAGE CHECK)”에는 “□ 미련한 사냥꾼 / □ 자유로운 영혼 / □ 열린 마음의 소유자 / □ 무난한 타입 / □ 감성 바보 / □ 싱글(...딱히 누굴 찾고 있지도 않음)”의 체크란이 있다. 이 중 하나를 체크하고 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입장하게 되는데, 이는 공연이 사랑을 포함한 관계에 대한 이야기이자 열린 결말 속 각자의 선택지가 중요함을 이야기한다. 주황색 계열의 의상을 착장한 호텔 종업원은 말 대신 의상 일부를 까거나 뒤집어서 일렬로 옹기종기 로비 의자에 앉은 관객들에게 지시문을 차례차례 보여준다.
우리는 룸의 침대에서, 그리고 1층 계단과 카페에서 여러 남녀 커플을 본다. 마지막에는 그들의 대화를 블루투스 헤드폰으로 듣기도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내밀한 타인의 속마음을 듣지만, 무엇보다 이런 관계의 구체적인 콘텍스트는 알 길이 없으며, 실은 ‘친밀한 공간’ 안 타자와의 관계에 대한 맥거핀으로서 관계가 된다. 그렇다면 작업은 ‘단지 우리의 관계는 바깥에서 보기에는 피상적일 뿐이며 본질적으로 드러날 수 없다.’를 가리키는가. ‘친밀한 공간’은 시각(외양)과 청각(이야기)의 분열을 겪는다. 친밀한 공간은 타자를 현시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직접적으로 듣게 하지는 않는다.
실제 장애인의 실제, 콘텍스트는 찾을 수 없다. 예외적으로 호텔 직원이 퍼포머에게 폭력을 휘두르고 이후 허공을 두드리는 반복적 행동, 그리고 절규는 그 트라우마적 체현을 말하고 있지만, 이는 피상적인 현대인의 이야기를 보편적 허구성으로 내세우는 정도로, 구체적으로 이들로부터 유래한 어떤 이야기, 목소리가 드러나진 않는다. 그러니 이들의 다른(?) 외양은 어떤 것도 말하지 않으면서 말을 한다. 투명한 보기의 방식을 통해. 동시에 공연은 이들의 말을 거세함으로써 이들을 대변하지도 않지만 특정한 캐릭터로 형상화하지 않음으로써 타자화하지도 않는다.
호텔 직원으로 분한 비장애인 배우에 반해 우리와 같은 일반인으로 현현하는 동시에 배우 자신을 투명하게 지시하지 않는 퍼포머들은, 텅 빈 피사체로서의 얼굴로 환원된다. 곧 심미적인 대상으로. 어떤 다른 이야기로도 확정하지 않으면서, 대신 그들을 우리의 지위, 자리에 둠으로써(‘우리가 보는 건 타인이라기보다 낯선 우리의 모습, 아니 그 보는 시선 자체이다.’). 여기에 어떤 최후의 편견이 하나의 장애물을 형성하고 있다면, 이는 공연 말미에서처럼 스쳐가는 어떤 부질없는 소리(언어)들에 가까울 것이다. 이러한 시각과 청각의 매체적 분별을 통해 작업은, 언어에 걸려 제대로 볼 수 없던 타자를 현상한다. 이제 최후의 가장 강력한 매체를 언급할 순간이다. 호텔(의 비좁은 격리적 관계항)은 친밀한 공간으로 친밀하지 않은 수많은 타자로서의 현대인을 구성해낸다. 무엇보다 친밀함은 친밀하지 않음을 역설한다.
  1. 가령, 김보람 작가의 <57.2도 기울어진 지형>(2015)이나 <무제의 산>(2015)은 태블릿의 기녹화된 장소들―각각 대학로와 서울도서관―을 현재의 장소와 일치시키며 걸어가는 작업이었고, 서현석 작가의 <천사-유보된 제목>은 퍼포머 한 명이 관객 한 명을 이끌어 남산드라마센터 곳곳을 살펴보는 게 공연 일부가 되었다. ‘낯선자들’의 <반(Bahn)>(2018)의 경우, 미리 깐 앱을 통해 메시지를 전달받으며 세운상가 일대의 장소들을 이동하는 작업이었다.
  2. 관객은 인지할 것이다. 현실을 미적 풍경으로 재전유하는 것과 그 미적 풍경 안의 보이는 대상으로서 스스로 일종의 배우가 된다는 것은, 사실 맞물린 채 팽팽한 균형을 맞추고 있다는 것. 그 경계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타자, 우발적 타자에 의해 구성된다.
  3. 사실 이 표현을 쓰는 건 공연 소개를 따른 것이지만, 이 공연의 취지를 반하는 것이기도 하고, 꽤나 망설여지는 일이긴 하다. 그런 차이가 사회적 오해와 편견에 기인하는 것임을 공연은 역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진 제공: 서울거리예술축제]

워크맨 인 서울
일자
2019.10.03.(목) ~ 10.06(일), 회당 75분, 일일 45회
장소
서울시 중구 회현동 (회현역 3번 출구 카페 휴빈 출발)
개념/연출
Herve Lelardoux
텍스트
Herve Lelardoux, 국지인
퍼포머
국지인, 이지형
음향기술
김형준
가이드
국지수
관련정보
http://www.ssaf.or.kr/html_kor/concert_public.asp?flag=READ&CIdx=253&page=1
친밀한 공간
일자
2019.10.03.(목) ~ 10.06(일), 회당 35분, 일일 5회
장소
서울시 뉴서울호텔
연출
Michelle Ryan
댄서
Darcy Carpenter, Jianna Georgiou, Abby Hampton, Michael Hodyl, Alexis Luke, Michael Noble, Andrew Pandos, Anastasia Retallack, 조윤서, 문승현, 김민수, 홍영훈
배우
Ashton Malcolm
예술감독
Roz Hervey
기술감독
Hamish McAdam
무대감독
Francoise Piron
무대조감독
o Curren, Emma Stokes
레스트레스 댄스 씨어터
관련정보
http://www.ssaf.or.kr/html_kor/concert_public.asp?flag=READ&CIdx=256&page=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