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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 SPAF 고골센터 <카프카>

[세대교차]예술은 절대 타지 않는다

백승무
170호 2019.10.24
카프카의 침묵은 대사보다는 행위에, 내용보다는 형식에, 서사보다 표현에 전념하도록 만든다. 말보다 높은 데시벨의 침묵은 의도와 목적을 가진 행위를 통해 그 의미가 시각화(형식화)되었을 때 가능하다....
말을 지우면 드러나는 행위
카프카의 침묵은 대사보다는 행위에, 내용보다는 형식에, 서사보다 표현에 전념하도록 만든다. 말보다 높은 데시벨의 침묵은 의도와 목적을 가진 행위를 통해 그 의미가 시각화(형식화)되었을 때 가능하다. “너의 말이 공허하지 않게 하고, 너의 침묵이 소리를 잃지 않도록 하라.” 스타니슬랍스키의 명령이다. 말과 서사를 끊고 침묵에 이르러야 드러나는 행위의 미학! 그리고 그 행위들이 빚어내는 찬연한 미장센과 앙상블! <카프카>는 연극이라는 장르적 형식이 시각적 스펙터클과 음악적 대위법의 완결체라는 것을 증명하는 희귀한, 그러면서도 적나라한 사례이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드디어 키릴 세레브렌니코프가 왔다!
1. 키릴을 러시아 연극계 황태자 자리에 앉힌 것은 작년에 서거한 모스크바예술극장 예술감독 올레크 타바코프였다. 2002년 모스크바에 입성한 이 ‘똘끼’ 넘치는 연출가는 순식간에 연극계를 뒤흔들었다. 최고 수준의 연극 인프라를 가진 모스크바예술극장 초빙연출가가 되자 키릴은 아방가르드 전사이자 예술계 이단아로서 종횡무진 활약을 펼쳤다. 2012년 ‘고골-센터’ 예술감독이라는 날개를 달자 그의 비상은 더욱 눈부셨다. 성큼성큼 내딛는 그의 발걸음은 마치 21세기 러시아예술의 지형도를 그리는 거인을 닮았다.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uznayvse.ru
1.1. 연극뿐만 아니었다. 볼쇼이극장에서 올린 발레 <우리 시대의 영웅>(2016)과 겔리콘에서 만든 오페라 <차아드스키>는 황금마스크 최고상을 차지했다. 2012년 제작한 영화 <배신>은 베니스영화제 황금사자상 후보에 올랐고, 2016년 <사도>는 칸영화제 프랑수아 샬레 상을 수상했으며, 빅토르 최를 다룬 <레토>(2018)는 국내에서도 큰 호응을 얻었다. 공연예술계의 그랜드슬램도 모자랄 판이다.
1.2. 키릴의 승승장구에 제동이 걸린 건 2017년 ‘제7스튜디오’ 횡령 사건. 정부지원금으로 실험극 육성 프로젝트를 관장하던 그는 횡령 주범으로 체포된다. 구금, 조사, 기소, 가택 연금이 이어졌고, 보호 감찰이 해제된 것도 불과 지난 9월이다(출국 금지 상태라 당연히 방한할 수도 없었다). 지난하고 지루한 법정 공방이 얼마나 이어질지 모르는 지옥 같은 나날들이다.
1.3. 그의 약력을 길게 나열한 것은 2016년 초연된 <카프카>가 마치 그의 이후 운명에 대한 예언처럼 읽히기 때문이다. 1년 넘는 가택 연금. 입이 있어도 말할 수 없었고, 몸이 있어도 움직일 수 없는 유폐된 신세. 영혼까지 탈탈 터는 검찰 수사와 범죄자란 낙인. 촬영장과 극장에 갈 때마다 허가를 받아야 하는 얽매인 처지. 무의미와 광기의 세계에 대항해 고립과 소외로 저항했던 카프카의 삶은 최근 3년간 키릴의 삶에 그대로 포개졌다. “세상의 광기 앞에서 나 자신의 광기를 보여주겠다.”고 선언했던 카프카의 노기는 키릴의 것과 다를 수 없었다. 공연 말미 카프카가 들고 나온 K라는 문자는 키릴의 머리글자와 달리 보이지 않는다. 두 K에게 세계는 감옥이다.
경찰에 체포되는 키릴 ⓒpostnews.ru
1.4. 키릴이 선포한 공연의 모토는 “우리 모두가 카프카이다.” 메타포가 아니라, 정확한 예언이었다. 느닷없는 체포(『소송』)와 하루 아침에 벌레 같은 범죄자가 된 신세(『변신』)라니. 배경, 혹은 전조가 없었던 건 아니다. 2018년 4선 대선을 앞둔 푸틴 대통령은 여론지형을 다듬어야 할 시점이었다. 키릴이 어떤 인물이었던가. 2008년 러-그루지아 전쟁에 반대했고, 급진적 페미인디밴드 ‘푸시 라이엇’ 사면을 청원하는가 하면, 집회 자유 보장과 성소수자 인권보호 운동에 앞장섰다. 정부가 공중파 방송의 거짓 선동을 앞세워 국민을 우민화한다고 비판하기도 했고, 문화·예술·교육 예산의 확충을 주장하면서 정부의 무능과 무관심을 질타하기도 했다. 그런 차에 예술가 특유의 허술한 돈 관리가 검찰의 마수에 걸렸다. 한쪽에선 예술계의 부패가 확인됐다며 핏대를 세웠고, 다른 한쪽에선 비판적 예술가에 대한 잔인한 복수극이라고 항변했다.
황금마스크 4관왕 키릴 ⓒMetro новости
1.5. 그의 과감한 도발은 정치 활동에 그치지 않는다. 연극·영화 <사도(師徒)>에서는 전체주의에 저항하지 못하는 사회적 위선을 꼬집었고, 정부에 노골적인 비난을 퍼붓는 모스크바예술극장의 <숲>에서는 푸틴을 흉내 내는 불순한(?) 장면을 넣기도 했다. 발레 <누리예프>(2017)는 그 자체로 거대한 스캔들이었다. 소련을 탈출한 발레리노이자 동성애자로 알려진 누리예프는 조국을 등진 배신자의 대명사. 게이바를 연상시키는 장면과 발레 사상 최초의 완전 나체 장면 때문에 문화부 장관이 초연을 연기하라고 명령할 정도였다. 발레에 대한 모독이라는 힐난까지 들었던 <누리예프>는 올해 황금마스크 축제에서 무려 3개 상을 휩쓸었으니, 러시아란 나라는 정말 한 길 사람 속보다 깊고 깊은 곳이다. 하나 더. 키릴은 올해 연극 <소비극>(小悲劇)으로 연극 연출상까지 받았으니, 이는 서로 다른 분야에서 4개의 황금마스크상을 수상한 초유의 기록. 호사다마인가, 새옹지마인가. 평생을 삶-감옥에 갇혀 기계 부품처럼 살다가 사후에야 명성을 누린 카프카의 전기는 최근 키릴이 겪은 롤러코스터 여정과 그리 다르지 않다. 예술이 정치를 이길지 지켜볼 일이다.
영화가 멈춘 곳에서 시작하는 연극
2. 이 공연의 가장 큰 특징은 카프카의 침묵이다. 더 정확히, 발화 행위의 박탈이다. 말할 기회를 주지 않거나 다른 배역이 대신한다. 카프카의 작품과 편지, 일기 등에서 대사를 가져왔기 때문에 배역을 맡은 배우들이 그것을 대독하면서 내레이터 역할을 맡는 방식은 평범하다. 하지만 <카프카>는 카프카의 직접 발화를 방해하고 가로채면서 침묵을 강제한다. 생전에 『변신』을 포함해 일부 작품만 출판 되었을 뿐더러 그마저 혹평과 외면 일색이었던 그의 창작세계는 침묵이 무색하다. 오토 피크 기자가 녹음기를 들고 인터뷰를 시도해도 카프카는 말을 않는다. “카프카는 음성녹음을 남기지 않았습니다.”(오토 피크). 카프카는 글을 남겼지 소리를 남기지 않았다. 작가에게 글 외의 언어는 침묵이다. 이 얼마나 명징한 규정인가! 예술가에게 예술 이외의 소리는 소음이다. 키릴은 손발이 묶인 가택연금 상태로 침묵을 강요당하고 있지만, 어차피 그의 목청에 주어진 것은 예술 언어이다. 카프카의 침묵은 어떤 소리보다 강력한 예술 언어이자, 어떤 설득보다 간명한 예술 강령이다.
2.1. <카프카>의 첫 장면은 카프카의 목소리를 대신할 성우를 선택하는 과정이다. 연극적으로 말하면, 배역들과 카프카와의 조율(tuning) 절차라 볼 수 있다. 배역들이 카프카의 목소리를 대신할 거라는 Intro쯤. 영화적으로 보면 무성영화의 후시녹음 형식인데, 이게 흥미롭다. 사진예술의 진화 형태였던 무성영화가 연극의 생생함을 침범하는 계기가 된 것이 유성영화의 출현이었다. 1920년대 나온 유성영화는 촬영된 영상에 성우가 대사를 입히는 후시녹음 형태였는데, <카프카>는 바로 그 시대의 영화 제작방식을 양식화한다. 양식화는 한 시대(혹은 한 장르)의 기술, 정서, 분위기, 취향 등을 차용하는 예술적 기법인바, 1920년대 초기 유성영화의 양식화는 시대 정서의 호출뿐만 아니라, 영화미학의 이데올로기적 효과까지 포괄하는 기도이다. 뭔고 하니, 유성영화의 출현으로 인해 관객들은 배우의 행위보다는 대사에, 이미지보다는 소리에, 미장센보다는 서사에 몰두하게 되는데, 이 현상은 이미지 예술로서 영화의 정체성을 훼손하기에 에이젠시테인도, 채플린도, 초기 히치콕도 심히 반대했다. 새로운 예술형식인 영화가 연극을 닮아가는 현상은 퇴행이며, 대사보다 행위에서 더 강력한 극적 긴장감이 생성된다고 믿었던 것이다. 이런 반대에도 불구하고 유성영화가 득세하게 된 것은 행위와 대사의 일치가 가져오는 사실성과 그것이 주는 감정이입의 효과 때문이었다. ‘소리’의 조작이 허구를 사실로 받아들이게 만드는 이데올로기적 장치가 된 것이다.
2.2. 입 모양과 소리를 일치시키는 이러한 영화史적 진화를 연극으로의 퇴행이라 꼬집은 에이젠시테인의 지적에 주목하자. <카프카>는 연극 무대에 영상 장치를 도입함으로써(키릴이 애용하는 기법이기도 하다) 유성영화의 퇴행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 유성영화가 행위에서 대사(=서사)로의 전환을 보여준다면, <카프카>는 행위와 대사를 분리하여 행위를 도드라지게 만든다. 유성영화의 퇴행을 모방함으로써 연극의 강점을 부각하는 것이다.
ⓒ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2.3. 클로즈업 촬영기법은 스크린의 이미지가 카메라라는 기계장치의 결과물이라는 고백이자 폭로이다. 동시에 관객은 누군가를 근접 응시했을 때의 체험을 떠올리기도 한다. 무대 위 배우의 몸과 스크린의 과도한 클로즈업의 병치는 들뢰즈가 말한 ‘얼굴화’의 전형이다. 관객은 무대 미장센에서 이탈하여 카프카의 심리라는 정서적 세계로 탈출(탈영토화)한다. 카메라의 기계성이 만들어낸 스크린의 거대한 얼굴 이미지는 우리를 심리라는 검은 구멍으로 도약하게 해준다. 균질하고 매끈한 현실의 표면에 균열(검은 구멍)을 일으켜 새로운 지각과 사고를 창출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천 개의 고원』에서 얼굴성(=클로즈업)이라는 추상기계를 언급하면서 카프카의 단편 『블룸펠트, 나이든 독신자』를 인용한다. 여기에 흰 벽과 검은 구멍을 오가는 탁구공이 등장한다. 무의미한 하루하루를 반복하는 블룸펠트의 탁구공은 현실 세계의 질서와 논리를 파괴하는 상징이다.
2.4. <카프카>의 흑백 영상은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의 <카프카>(1991)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현실에 대한 색다른 인식이 카프카 문학의 백미인 만큼, 추악하고 무미건조한 현실은 흑백으로, 생성과 창조의 공간인 상상 세계는 천연색으로 표현한 것. 카프카가 누구인가? 가족과의 불화, 체코에서 자란 유대인에 독일어로 소설을 쓴 모순적 정체성, 억지 직업, 파혼을 비롯한 불행한 사생활, 고독한 요절 등 삶 자체가 잿빛이었다. 문학은 유일한, 마지막 생명줄이었다. 키릴은 <백치들>(라스 폰 트리에 감독, 1998)을 ‘연극적 도그마’란 기치 아래 무대화한 적이 있기에 <카프카> 또한 소더버그 감독의 영화와 무관할 수 없으리라.
2.5. 이렇게 해서 흰 가벽과 탁구공, 검은 구멍(=양동이), 흑백 유성영화, 클로즈업, 들뢰즈(그는 『카프카』란 책을 썼다)라는 코드 연쇄가 완성된다. 연극 무대에 영상을 쓸 때는 이런 합목적적인 다층적 의미망을 구축해야 한다. 이렇게 복잡하게 얽힌 기호적 실타래는 영상 사용의 필연성을 보장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상은 소음이자 흠집이자 방해물이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주문을 외워보자, “우리는 카프카”
3. <카프카>의 설정, 즉 배역들이 카프카의 목소리를 고루 나눈다는 작품의 기본 골격을 동조(同調)라는 측면에서 살펴보자. 무대 위 배역들은 카프카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분신이다. 배역인 동시에 분신(이라는 또 다른 배역)! 오토 피크를 맡은 배우는 공연 말미에 자신은 사실 오토 피크가 아니라 <성>에 등장하는 한 배역에 불과하다고 고백한다(“저는 배우예요.”라고 말하지 않았다!). 배역이 또 다른 배역을 연기한 것이다. 이 공연의 구상과 실현은 <카프카>의 한 배역이 감행한 (가상적) 모험이다.
3.1. 배우는 현실에 위치하고, 배역은 (연극적) 가상에 산다. 카프카에게 현실은 없었다. 그는 문학적 가상 속에서 살았다. 그는 K라는 이니셜로 『성』의 측량기사가 되고, 『소송』의 요제프가 되고, 『변신』의 잠자가 되고, 『판결』의 벤데만이 된다. 벤데만의 Bende는 “Kafka와 같은 수의 철자를 지니고 있으며, 모음 e가 Kafka에서 모음 a와 같은 위치에서 반복되고 있다.”(카프카의 일기 중). Samsa도 Kafka의 별칭과 다름없다. 카프카 소설의 배역들은 작가 자신을 겹쳐놓은 문학적 도상이었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3.2. <카프카>에서도 배우는 없고, 오직 배역만 있을 뿐이다. <카프카>의 세계에서는 모두가 배역이다. 연출가 키릴 또한 카프카의 목소리에 동조된 배역이다. 공연장에 착석한 우리도 카프카의 배역이자 동조된 존재다. 카프카의 편지를 대독하는 배역들처럼 관객도 카프카의 편지를 대독한다. 관객은 의자 밑에 숨겨진 편지의 수신자가 되어 카프카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분신이 된다. 결국 “우리는 모두 카프카이다.”
3.3.편지의 일부를 보자. “세상의 광기 앞에서 나 자신의 광기를 보여주겠다. 그러면 나와 세계는 같은 언어로 말하기 시작할 것이다.” 자신의 광기를 드러내는 것이 카프카가 글을 쓰는 의미이다. 그때 나와 세계는 같은 음으로 同調한다. 이것이 유성영화 형식이 보여주는 이데올로기적 동일화 효과이다. 갈지자 자막과 정신없는 행위에도 불구하고 <카프카>에서 묘한 감흥을 느꼈다면, 우리는 같은 음으로 조율된 것이다. 카프카의 광기와 <카프카>의 광기에 의해!
관객에게 전달된 편지 ⓒ백승무
3.4. 이처럼 카프카의 침묵은 목소리의 공유이자 카프카와 한 몸 되기의 전제이다. 카프카의 몸은 누구나[누구든] 스쳐가는 신체, 누구나[누구든] 관통하는 형상이 된다. 이것은 연극예술의 구경(究竟)이다. 말로 하는 연극이 아니라, 몸으로 체험하는 연극, 일부를 위한 속삭임이 아니라, 모두를 위한 보여주기! 오토 피크가 말한다. 세이렌의 노래에서 탈출하는 사람은 있을 수 있지만, 세이렌의 침묵으로부터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고. 의미인즉슨, 카프카의 목소리에서 벗어날 수는 있지만, 우리는 그의 침묵에서는 결코 벗어날 수 없다. 그의 휑한 눈동자를 보았는가? 영상 프레임에 갇혀 관객에게 자신의 심리를 내주고 마는 그의 공허한 시선을 기억하는가? 마지막 장면에서 두 명의 세이렌이 흥얼거리는 ‘Tennessee Waltz’가 들리는가? 그 아래에서 부조리한 현실을 관조하는지, 천연색 가상세계를 꿈꾸는지 모를 그의 마지막 침묵을 목격했는가? 대저, 작품의 외양과 연출의 의도는 이렇게 절묘하게, 이토록 심도 있게 결합해야 한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거대한 교향악
4. <카프카>의 압도적 매력은 역시 형식에 있다. 키릴 공연의 형식미는 섞이고 찢기고 엉킨 개별적 요소들이 의미의 총합을 향해 점진적으로 형태를 갖춰가는 건축학적 구성에 있다. 인물, 무대, 텍스트의 착종은 피할 수 없고, 거기에서 극적 긴장과 볼거리를 견인하는 모순과 충돌의 그로테스크가 비롯된다. 러시아연극 특유의 심리발산, 영상 활용, 라이브 음악과 노래, 일인다역(코러스), 마이크 기계음 등도 키릴이 즐기는 레테르이다. <카프카>에서 무엇보다 도드라진 기법은 다층적 콜라주! 마치 잡지에서 오려낸 다양한 이미지들을 여러 겹으로 덧붙여 새롭고 낯선 풍경을 만들어내듯이 무대 요소들은 기발하게 해체·선택·조합되어 장면을 만들어간다. 평범한 동작이나 익숙한 연극관습조차 콜라주의 맥락과 만나면 강렬한 대조와 충돌을 야기한다. 그 다층적 의미·이미지의 겹이 요동치듯 출렁이며 볼거리의 섬광을 뿜어낸다.
4.1. <카프카>는 ① 『변신』, 『소송』, 『성』 등 자신의 주요 소설을 집필하게 된 전기적 배경과 ② 그 속에 습윤된 카프카의 기괴한 상상력과 심리세계, ③ 또 그걸 설명하는 오토 피크 기자의 해설 층위로 나뉘어 있다. 예를 들어, 아버지 배역을 맡은 배우는 ①에서는 카프카를 억압하는 완고함을 연기하다가, ②에서는 카프카의 편지나 작품을 읽는 상상 속 역할을 하다가 ③에서는 오토 피크의 해설을 구현하는 코러스가 된다. 무대 또한 극중극 공간, 분장실, 연주공간으로 분리된다. ①, ②, ③을 연기한 배역은 극중극 공간을 벗어나 분장실에서 배역을 준비하는 배우(역할을 하는 배역)로 전환된다. 침대와 책상, 소파가 놓인 극중극 공간이 오만가지 변신을 하는 것은 당연지사. 공간의 의미화와 상징화를 위한 상식적 관례는 모조리 증발한다. 등·퇴장로나 점유공간 따위의 무대 문법은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공간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다양한 형태와 용도로 변모한다. 집이 되고 거리가 되고 보험사 사무실이나 수영장 탈의실이 된다. 심지어 카프카의 방은 시공을 뚫고 순식간에 ‘카프카 박물관’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소송』의 두 감시인 배역이 도착한 곳은 카프카란 작가의 박물관이더란다).
4.2. 문제는 이런 무대 요소들의 해체·조립과 요소들 간의 충돌·결합이 다층적 시공간 상에서 매끄럽고 리듬감 있게 진행되는 경이로움이다. 잡다한 무대 도구들과 부산스러운 동선, 다양한 이미지들이 어지럽게 종횡하지만, 매 장면 비범하고 조화로운 미장센이 빛을 발한다. 여남은 배우들의 이합집산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유려하다. 음색과 음역이 다른 배우들이 구사하는 충돌의 화성법과 모순의 대위법은 어느새 완벽한 다성악적 교향곡을 빚어내고 있다. 무질서의 질서화이자 불규칙의 규칙화! 그로테스크 미학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아, 교향곡 운운은 메타포가 아니다. 레티타치보에 가까운 대사, 잠시도 중단없이 관객의 호흡을 통제하는 ‘밀당’ 리듬, 뮤지컬도 울고 갈 가창 장면, 분위기를 장악하는 악기연주, 이것은 진정 교향곡이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4.3. 가벽에 투사된 영상 이미지 또한 단순함과 단일함을 거부한다. 이 가벽은 카프카가 채워나간 원고지를 의미하기 때문에 그 속에는 카프카의 내면과 심리적 비밀이 고스란히 담긴다. 그래서 카프카를 주시하는 핸드헬드 카메라 영상이 주를 이루지만, 1차 대전 장면 같은 다큐 영상도 등장하고, 2막에선 음파라든가 기하학적 이미지들이 투사되기도 한다. 이는 카프카의 욕망과 갈등, 충동, 공격성, 우울, 억압 등 정신분석학적 증후를 현시하는 심리적 표상이겠다.
4.4. 서사는 카프카의 어린 시절부터 임종 순간까지 연대기적 흐름을 뼈대로 하지만, 모티프나 상징 차원에서 반복과 역전이 끼어들기도 한다. 친구 브로트가 원고를 태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장면이 먼저 오고, 원고를 태워달라는 카프카의 전언이 나중에 나오는가 하면, 카프카의 죽음을 상징하는 관(합판)이 중간에 두어 번 끼어들기도 한다. 블룸펠트의 탁구공은 첫 장면부터 등장하고, 잔인한 현실을 상징하는 마리 아브라함은 수시로 카프카를 옥죈다(산재로 사망한 남편의 보험금을 받지 못해 굶주리던 그녀는 자신의 딸을 교살하고 만다). 그녀는 가방에서 팽이를 꺼내 카프카에게 전해주는데, 바로 소설 『팽이』의 그것이다. 소설 속에는 팽이의 성질을 인식하지 못하는 철학자가 등장하는데, 카프카에게 주변 세계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부조리 자체이다.
4.5. 카프카의 유일한 대사는 “나는 이 세상을 순수함과 진실함과 견고함으로 이끌고 싶다.” 자신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온갖 불순한 상상에 스스로 두려워하고 고통스러워하지만, 그 해괴한 상상은 실상 현실도피나 외면이 아니라 현실을 껴안으려는 발버둥이자 안간힘이었다. 세계의 광기와 공포에 온몸이 감응하여 토악질하듯 고통스럽게 쏟아낸 것이 그의 소설이다. 세계를 순수와 진실로 정화하고자 했던 소박한 바람.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원고는 타지 않는다
5. 법정 스님은 사후 자신의 책을 출판하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책은 대화의 방편이고 소통의 수단이니, 육신이 사라진 바에야 존재 이유가 없다는 뜻이리라. 저자도 없는데 왈가왈부하는 것은 당사자로선 찜찜할 터. 바흐친도 유사한 논리였다. 예술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바흐친은 주체가 실천과 참여를 통해 예술과 삶을 통일시켜야 한다고 웅변했다. 주체와 타자 간에 대등한 목소리에 기반한 수평적 대화가 그 요추이다.
5.1. 반면, 개인과 사회의 공시적 관계보다는 시간이 매개된 통시적 관계를 중시한 이도 있다. M. 불가코프는 “원고는 불타지 않는다.”고 말했다. 스탈린에게 탄압을 받았던 불가코프는 사회와의 대화 자체가 불가능했다. 믿을 건 예술의 불멸성이었다. 변변찮은 작가 ‘나부랭이’였던 카프카도 상황은 다르지만 비슷한 결론에 도달한다. 원고를 태우라는 부탁은 타지 않을 것에 대한 우려이다. 예술의 불멸성을 믿는 또 다른 경우이다.
5.2. <카프카>에는 수차례 소각의 테마가 반복된다. 1막 소제목이 ‘침묵’이라면, 2막은 ‘모든 것을 불태워라.’ 카프카의 종이가 불타기도 하고, 아버지 가게에 불이 나기도 하고, 책을 태우기도 하고, 피크가 녹음테이프를 불 속에 집어넣기도 한다. 불은 정화이자 완전한 소멸이다. 마지막 죽음 장면의 가벽은 거대한 백지. 말도 글도 없는 세계이고, 모든 오염이 정화된 순수공간이다. K라는 머리글자만 그것이 카프카가 응시하는 상상의 세계임을 보여준다.
ⓒАлекс Йоку. Гоголь-центр
6. 글 말미에 부쳐: 아쉬움이 없는 건 아니다. 2막에서 콜라주 기법이 약화·단순화되면서 템포-리듬이 급변한다. 카프카의 죽음을 준비하는 영면 의식이겠지만, 1막의 화려한 교향악을 상기하면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몇몇 에피소드는 맥락을 더듬어가기 힘든 지점도 존재한다. 볼거리에 취하다가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 형식과 내용의 결속이 느슨해진 경우랄까. 마지막으로, SPAF의 자막은 최선인가? 기술적 문제는 극복할 수 없는 건가? 반복된 실수는 실력이다. 쓰게 곱씹을 일이다.

 
카프카
일자
2019.10.03.(목) ~ 10.04(금)
장소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
연출/예술감독
키릴 세레브렌니코프
극작
발레리 페체이킨
안무
예브게니 쿨라긴
음악감독
안드레이 폴랴코프
영상예술
일리야 샤갈로프
의상 디자인
키릴 세레브렌니코프,폴리나 그레치코
조명 디자인
오스카르스 파울리니슈
무대 감독
올가 파블류크
전자 음악
드미트리 가린
책임 프로듀서
예카테리나 이사코바
조연출
예카테리나 코스튜코바
기술감독
일리야 레이즈만
음향 감독
안톤 페쉰
음향 기술자
표도르 그리쉰
영상 엔지니어
란 만델리슈탐, 미하일 먀스니코프
조명 기술자
레나 페렐리만, 세르게이 쿠체르
메이크업 아티스트
엘리자베타 슈미트, 마이야 레스니첸코
의상 관리
안나 반추기나, 잔나 아나슈키나
무대소품 제작 책임
블라디미르 샤블로노프
무대소품 관리
발레리야 미티나, 베로니카 세르게예바
탭댄스 안무
알리크 압둘라예프
톱연주 교육
스베틀라나 메드베데바
무대기계 조정
알렉산드르 코르차긴, 이고르 아브람킨, 알렉산드르 세코치힌
출연
세묜 슈테인베르그, 오딘 바이론, 이고르 고렐리코프, 일리야 로마슈코, 올렉 구신, 이리나 비보르노바, 리타 크론, 이리나 브라기나, 율리야 로보다, 니키타 쿠쿠슈킨, 스베틀라나 마므레셰바, 안톤 바실리예프, 세르게이 갈라호프, 예브게니 산가드지예프, 드미트리 주크, 안드레이 폴랴코프, 세르게이 갈라호프, 이고르 고렐리코프, 세라핌
고골센터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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