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이민경 <피리부는 사람들>

[작품리뷰]SF 서사가 꿈꾸는 연극

김민관_아트신 편집장
174호 2019.12.19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야외마당에서 진행된 <피리부는 사람들>은 대체로 입구에서 생방송 형식으로 세 명의 퍼포머(조의진, 주혜영, 박재용)가 전 지구적 기후 변화에 대한 여러 전문가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신’하여 전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2050년, 지연된 현재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야외마당에서 진행된 <피리부는 사람들>은 대체로 입구에서 생방송 형식으로 세 명의 퍼포머(조의진, 주혜영, 박재용)가 전 지구적 기후 변화에 대한 여러 전문가와 사람들의 이야기를 ‘수신’하여 전달하는 형식을 띠고 있다. 이야기는 오른쪽 스크린에서 국어 혹은 영어 자막으로, 곧 배우가 말하는 언어와 다른 하나의 언어로 동시 번역되어 송출된다. 이러한 역할들의 끊임없는 변신, 곧 하나의 역할로 고정되지 않은 배우들의 연기는 소위 우리가 티브이에서 보던 외화 더빙 방송을 상기시킨다.

이러한 방송은 일종의 작위적인 삽입의 형태임은 분명하다. 이는 2050년의 “멸종저항의 날 31주년 기념식”을 맞아 시도된 2019년의 메모리로, 등장 이후 자기소개가 끝난 세 명은 관객 모두와 2050년에서 2019년으로의 “퇴행”을 시도한다. 이들은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는 일종의 명상적 의식을 거친 이후 퇴행 버튼을 누른다. 공연을 벗어나는 질문, 혹은 공연 바깥의 질문, 곧 ‘어떻게 (2019년인데) 2050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은 ‘어떻게 (2050년인데) 2019년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다름 아닌데, 이들은 다시 2050년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명상과 함께 눈 감았다 뜨는 것으로.

두 가지 시간대는 어떤 환경의 물리적 변화 없이 이어진다. 이는 이 미래 시점에 놓인 공연이 오히려 진실한 것임을 방증하는데, 우선 미래 재현에 대한 오류와 허점을 애초에 차단한다. 또한 이 도약은 오직 명상을 통해 가능한데, 어쩌면 미래의 우리는 홀로그램으로 현실을 자각하는 단계에 이르러 있는 것이다. 또는 생생한 홀로그램이 현실 그 자체인 정도로 영상의 선예도가 높아진 시대가 된 것이다. 한편, 비물질적인 인지 방식은 시공간을 초탈하는 선(禪)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이루는데, 미래에 많은 부분에서 정신(뇌)과 연동된 사이버네틱스적 기계 장치들이 세계로의 유연한 확장성을 가져갈 것으로 추정해볼 수 있는 것이다―앞서서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는 그리고 아무런 물리적 변화도 가시적으로 일으키지 않는 퇴행 버튼은 마음의 결단적 신호가 기계 장치에 주문을 건 것에 가깝다.
사실 2050년 현재, 2019년으로 간다는 것은 2019년 당시의 자료 영상을 본다는 것, 이들의 말에 따르면 “접속”한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단순하게 말하면, 2050년의 시점은 2019년에서 추측한 2050년의 시점이겠다. 반면 2050년에서 본, 2050년이 매개된 2019년의 시점은 2019년을 새롭게 조각한다. 공연과 함께 나눠준, 이민경이 2050년 11월에 썼다는 기후 환경 위험을 설파하는 동명의 회보 <피리부는 사람들>은, 미래의 시점이 2019년 현재로 당도했다는 퇴행적 SF적 서사를 만들려 하는데, 그 밑에 실린 데이빗 스프렛과 이안 던롭이 쓴 ‘호주 국립기후복원센터 정책 보고서: 실존적인 기후 관련 안보 위기―시나리오적 접근’은, 2019년에서 본 2050년에 대한 미래 예측에 있어 시나리오 기법을 사용하고 있다.

전 지구적 질서의 물리적인 변화와 같은 사례는 먼 미래에 대한 추정을 가능하게 하는데, 결과적으로 2019년의 암울한 미래에 대한 전망을 계기로 인류의 범지구적 환경 보호의 노력이 현재와 같은 모습을 보존하게 했다는 게 <피리부는 사람들>의 전제인 것이다. 사실상 2019년과 2050년 사이에는 어떤 시간의 기록도 없다는 점에서 두 시간대는 어떤 간극도 드러내지 않고 연장되어 있다. 2050년의 메모리는 2019년의 메모리만큼이나 일종의 선예도 높게 송출 가능한 자료 영상의 형태로(만) 남게 될 것이다. 이는 시간이 사라지지 않고 정보 데이터로 치환됨을 의미하며, 유일하게 2050년 미래의 달라진 질서를 드러내는 이러한 아카이브적 시간은 사실 2019년 현재의 시간관이기도 한 것이다. (같은 방식으로 1990년으로 ‘퇴행’하는 게 얼마든지 가능하다.)
‘연극’을 다시 수행하기
<피리부는 사람들>은 가정될 수 없는, 또는 존재할 수 없는 시간을 현전시키는 데 있어, 어떤 물리적 변화도 가정하거나 모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다만 그것을 마법적 주술의 수행과 역할 놀이의 연기술로 대체한다는 점에서 연극적이다. 미래의 시간을 다루는 이 공연은 그런 측면에서, 미래에 대한 이야기(재현)가 아니라 그것을 어떻게 공연으로 가능하게 하는가의 형식적 탐문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 연극이 전 지구적 기후 변화에 대한 위험에 공감하지 않거나 그것을 소재주의적으로만 차용했다고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오히려 그러한 비판에는 일방향화된 계도적 메시지가 ‘진실로’ 성립할 수 있느냐의 물음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그렇게 성립한다고 했을 때 관객은 과연 존재하는가라고 반문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세 명의 배우들이 이어폰을 끼고 거기서 들려오는 것을 따라 하고, 자막은 그 말을 과거의 것으로 또는 대본화시킨다는 것을 상기해보자. 결과적으로 이어폰과 자막이 모두 짜인 구성 값으로, 퍼포머는 들려오는 소리와 싱크를 맞추며 대본을 복기하는 자가 된다. 퍼포머는 말의 내용을 전달하는 고유한 역할로 수렴하는 대신, 역할을 수여하는 말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따라잡음으로써 연기(延期)하는 역할 대행자임을 지시하며, 역할 자체의 부재와 허구성, 동시에 배우로서의 진실성을 드러내는 것이다. 동시에 퍼포머들은 역할들이 상정하는 어투를 적절하게 흉내 내야 하며, 역할은 그 어투로써 보존된다는 점에서 이들은 연기(演技)를 연기(演技)한다. 그것은 그 자체로 진실하기보다 그것과 싱크를 맞추기 위한 성실한 노력 차원에서 결국 진실하다.

우리가 우리 앞에 놓인 배우의 연기를 의심하기 시작한다면, 곧 역할과 배우의 거리를 발견하게 된다면, 우리는 연극의 투명성을 제고하고 연극의 내용에서 빠져나와 다른 몰입 상태를 맞게 된다. 역할이 투영하는 리얼한 현실 세계에 침잠하기보다 역할을 연기하는 퍼포머의 표면이나 연극이 지시하고자 하지 않은 다른 부대적인 것들에 주의를 빼앗기게 된다. <피리부는 사람들>의 퍼포머들이 역할을 연기(延期)하며 연기(演技)하는 것이라면, 그들의 현존은 역할과 역할을 맡은 퍼포머 스스로 간의 틈에 있다. 그리고 관객은 역할들의 말의 내용(의 진실함)이 아니라 이들이 그 역할을 어떻게 따라 하는지의 연기술 자체를 본다. 그것은 무엇보다 어색할 수밖에 없다.

스크립트는 끝나지 않으며 앞서 나가는 동시에 뒤따라온다. 퍼포머들은 이 난관을 어떻게 헤쳐나갈 것인가. <피리부는 사람들>은 말을 읽기 위한 자막이 아니라, 말에 우선하는 자막으로써 그것에 입을 맞추어야 하는 퍼포머의 부박한 존재론을 명시한다. 이러한 자막의 강제는 들려오는 목소리와의 동기화가 우선되었을 것이라는 강력한 추정에 의한다. 말과 자막의 시차는 들려오는 목소리와 말과의 시차만큼을 증명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왜 ‘피리 부는 사람들’일까. 실제 이 셋은 하나의 길을 따라 걸으며 3도 화성을 이룬다. 후반부에 이르러 일렬로 선 채 입구 공간을 벗어나기 시작해서 관객 뒤쪽으로, 다시 레지던시 야외 공간 바깥의 길을 걸어가기 시작하고, 제일 앞 사람이 말을 하면 뒤에 두 사람은 순차적으로 메아리처럼 이를 따라 하는 것이다. 스크린(의 자막)을 벗어난 목소리는 앞사람에게 붙잡힌 두 사람으로 늘어진다. 애초에 배우가 입구에서 나오면서 극장은 닫히고 연극이 시작된다. 관객은 입구의 문을 열고 등장한 이어폰을 낀 세 명의 배우를 야외에서 마주하는데, 여기서 극장은 정박된 스크린에 가깝다면, 이러한 스크린은 셋의 이동으로 해체되며 극장의 정면은 반전되며 극장의 질서는 새로이 재구축된다―관객은 실제 돌아앉는다. 이어 퍼포머 셋 역시 찢어져 객석 곳곳에 침투하기에 이른다. 회보에 나오는 가팔라지는 미래의 기후 변화 그래프가 측정 불가능한 파국적 사태임을 이야기한다면, 파국에 대한 내용은 파격의 형식으로 대체된다.

‘피리부는 사나이’의 대열에 합류하면서 자막은 사라지지만, 여전히 하나의 목소리가 (인이어in ear로 들리고) 이들을 지배하고 있다. 목소리와 입 모양의 합치(되지 않음의 은폐)는 유성영화가 출현한 이래 유구한 전통이었다. 다른 한편, 목소리와 입 모양의 합치(를 의심할 수 없음)는 연극이 출현한 이래 유일한 전통이었다. <피리부는 사람들>은 영상의 자막을 지시하는 실제 성우들을 일종의 스크린으로 본다는 점에서 영화적이며, 각자의 역할로서 대사를 실시간으로 말한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연극적이다. 자막은 한국어로 할 때는 영어로 또는 일부 영어로 말할 때는 한국어로 나오는데, 이는 이 퍼포먼스가 교양 다큐멘터리의 전형을 장르로서 흉내 내고 있음을 가리킨다. 이러한 장르로서의 그럴싸함은 이 작업의 형식을 만들며 또한 그에 걸맞은 메시지를 발신한다. 곧 다큐멘터리는 위기를 맞은 지구에 대해 인류가 자각해야 함을 계몽적으로 설파한다. 하지만 그 메시지는 그 장르적 형식 자체로 또한 수렴한다. (‘저것은 다큐멘터리를 재현하는 것, 곧 다큐멘터리를 위한 다큐멘터리야!’)

싱크 맞추기로서의 연극, 아니 필연적인 싱크 맞추기의 실패를 전시하는 퍼포먼스는, 연극을 내파하(려)는 어떤 과감하면서 어설픈 시도가 된다. 들리지 않는 목소리, 또는 곧 들려질 목소리는―이를 관객은 자막으로만 ‘듣는’ 셈이다.―이들이 절실하게 듣는, 자신의 일방적인 상대 역할로서 존립한다. 그것은 대단히 아이러니한 것이다. 상대방의 목소리가 관객에게는 들리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것이 자신의 목소리가 되어야 한다는 것. 회화(會話)의 차원에서 근본적으로 성립하는 연극은 이렇게 연극의 반절을 잘라내며 그 연극의 반절을 구현하기 위해 애쓰는 배우들의 어설픈 시도로부터 위태로운 토대 위에 서 있다. 물론 처음에 주혜영이 사회자의 위치를 자처해 다른 두 패널의 이야기를 매개하나 그 역시 곧 여러 역할로 변화하며 매개자의 역할을 상실한다.
일렬에서 해체된 퍼포머들은 관객 사이사이 앉아 관객들에게 눈을 감을 것을 종용하고 각자의 호흡에 집중하도록 유도한다, 2050년으로 다시 돌아오기 위해. 보는 것에서 기원한 극장(극장의 어원 ‘theatron’은 아시다시피 ‘본다’는 동사에서 나왔다)을 성립시키기 위해 이를 행위의 연장으로 봐야 할지 또는 그 명상적 유도 흐름의 주술에 눈을 이완시킬지는 관객 각자의 수행의 몫으로 놓인다. 이는 실제 관객의 차이를 생산하며, 다른 두 관객의 분절된 양상으로 수렴한다. 눈을 감지 않은 관객은 2019년에 머물러 있는 것인가. 눈을 감은 관객은 2050년으로 점프할 수 있는 것인가. 2050년에 도착했다는 말은 그 합치되지 않은 예외적 관객들로 인해 성립될 수 있는 것인가. 눈을 떴건 뜨지 않았건 역시 아무런 물리적 변화가 없다. 하지만 무언가 달라진 것 같다면 세계는 재조립된 것일 것이다. 그것이 공연을 따라 도착한 2050년일 것이고, 동시에 2050년을 2019년에 다루는 가장 완벽한, 아니 유일한 방법일 것이므로. 다시 말해 2050년을 체감하는 유일한 방식일 것이므로. 하지만 연극은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실제 아무런 변화 없음을 확인하며 변화된 마음만을 안고 나가는 것.

[사진 제공: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김재범]

피리부는 사람들
일자
2019.11.29(금) ~ 11.30(토)
장소
국립현대미술관 창동레지던시 앞마당
기획 및 연출
이민경
어시스턴트
윤자영
출연
조의진, 주혜영, 박재용
음향감독
장태순
조명감독
공연화
프로덕션 코디네이터
이민성
프로덕션 및 기술지원
apparat/US
관련정보
http://www.mmca.go.kr/artStudio/reviewDetail.d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