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애니타 홀랜더 <나의 생존 가이드>

[작품리뷰]세상이라는 무대 위에서 살아내기

최희범
174호 2019.12.19
지난 12월 7일 이음 해외 공연 쇼케이스의 첫 작품인 '나의 생존 가이드'(STILL STANDING: a musical survival guide for life’s catastrophe)를 보았다. '나의 생존 가이드'는 애니타 홀랜더가 작, 연출, 출연을 도맡아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 1인 뮤지컬 형식의 공...
지난 12월 7일 이음 해외 공연 쇼케이스의 첫 작품인 >나의 생존 가이드>(STILL STANDING: a musical survival guide for life’s catastrophe)를 보았다. <나의 생존 가이드>는 애니타 홀랜더가 작, 연출, 출연을 도맡아 자전적 이야기를 풀어낸 1인 뮤지컬 형식의 공연이다.
첫 만남
무대로 걸어 들어오는 그녀의 발걸음은 힘차고 당당하다. 절뚝이는 걸음걸이로부터 일순간 그녀가 가진 장애가 이 걸음과 관련된 것임을 알아차린다. 그녀의 ‘아무렇지 않음’ 때문일까, 나는 근거 없이 그녀의 장애가 소아마비 ‘정도’일 것이라 추측한다. 이 모든 판단이 순식간에 이어지고, 내 머릿속에 어떤 인상을 남긴다. 무대 중앙에 놓인 높은 의자에 앉은 그녀는 자신의 왼쪽 다리를 벗는다. ‘아!’ 순간의 정지. 하지만 나 역시 ‘아무렇지 않게’ 아니 어쩌면 ‘아무렇지 않은 척’ 그녀를 다시 바라본다.
잘 들리지 않는 영어지만, 노래하는 배우의 모습을 보고 싶어서 듣기 평가를 하는 비장함으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그녀의 노래를 보고 듣는다. 중간 중간 자막을 흘금거리는데 괜히 컨닝하는 기분이 드는 건 내가 너무 긴장했기 때문일까. 어쨌든 애니타와 나 사이의 언어적 장벽(disability)을 넘을 경사로가 되어주는 자막의 존재가 샘물과 같다. 무대 오른쪽으로 수어 통역사님이 함께 보인다. 다른 누군가에게는 그의 존재가 샘물처럼 느껴질 것이다.
‘살아내기’ 장인
애니타가 죽은 자신의 친구 마이클이 남긴, 아직도 여전히 자신의 귓속에서 맴도는 질문에 대해 노래하며 공연이 시작된다. 죽기 전 에이즈 진단을 받은 마이클은, 암 투병 끝에 왼쪽 다리를 절단하고 여전히 살아내고 있는 애니타에게 물었다. “How did you get from there to here?” 직역하자면, “너는 어떻게 거기에서 여기로 올 수 있었어?” 이 글을 쓰면서 처음에는 이 문장을 “너는 어떻게 괜찮아질 수 있었어?”라고 단순하게 의역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직역으로 바꿔 쓴다. “거기”(there)와 “여기”(here)는 도대체 어떤 자리들일까. “괜찮다.”, “괜찮지 않다.”는 말 정도로 묘사될 수 있는 곳일까?
등장하는 순간부터 얼굴에 스며있던 엷은 미소를 그대로 머금은 채, 그녀는 노래와 이야기를 이어간다. 가사를 통해 나는 그녀가 암 투병 끝에 다리 절단 수술을 받았음을 알게 된다. 이 여성은 ‘살아내기/생존’(survival)의 장인일 것이라는 생각이 스쳐간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에게는 한 두루마리의 생존 전략이 있다. “다리에 무슨 문제가 있었냐?”고 묻는 누군가에게 “아무 문제도 없어요. 원래 이래요.”라고 답한다는 그녀는, 문제를 ‘문제적’으로만 보지 않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 엄마는 인어”라고 노래하는 딸을 비롯한 가족과 친구들, 사랑,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아우르는 유머러스한 태도와 음악 그 자체. 이 모든 것들은 그녀가 ‘여기’, 그녀의 삶의 현장과 이 무대 위에서 ‘살아내도록’ 만드는 것들이다.
삶에서의 생존 장인인 애니타는 ‘무대 위에서 살아내기/현존’(presence)의 장인이기도 하다. 그녀가 걷고, 두 다리로 서고, 한 다리로 서고, 자신의 의족을 어깨에 걸치고, 노래하고, 말하고 피아노를 연주하는 모든 순간에, 그녀의 현존은 더없이 편안하고 자연스럽다. 눈에 잘 띄는 장애를 가진 이로서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받는 것에는 이골이 날 만큼 익숙한 그녀지만, 그녀가 배우로서 너무도 편안하게 무대 위에 존재하는 것은 이러한 익숙함과는 별개의 일이다. 16년 이상 활동한 숙련된 배우로서 그녀가 전문성을 가진 ‘일’인 것이다.
애니타가 보여주는 배우로서의 전문성과 탁월함은 그녀가 구사하는 기술의 종류 내지 범위와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4옥타브의 음역을 소화하는 가수도, 2옥타브의 음역을 지닌 가수도, 수어 노래를 하는 가수도 자신이 가진 기술에 대한 노련함과 전문성을 가질 수 있다. 그녀는 의족을 벗고 한 발로 서서 노래를 부르며 균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좌우로 지그재그 움직여야 하지만, 그 흔들림 자체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또 다른 평형의 상태였다. 두 발로 서기에 익숙한 대다수의 사람은 두 발바닥 위에서 우리 몸의 무게중심이 매 순간 미세하게 흔들리며 균형을 잡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쉽게 잊고 산다. 그녀는 한 발로, 나는 두 발로 끝없이 흔들리고, 끝없이 균형을 잡기 위해 애쓰고 있다. 무대 위 지금, 여기에서 애니타는 장인의 기술과 여유로운 태도로 우리를 자신의 리듬으로, 자기 이야기로, 자신의 감정과 고통과 유쾌함으로 초대하는 ‘가이드’ 그 자체였다.
고통과 절망까지도 생의 위로가 되는, 여기
애니타가 종종 찾아오는 환상통에 대해 노래한다. 하지만 사실 그녀는 그 고통을 온전히 묘사할 수 없다. 그녀의 고통은 설명할 수 없고, 왜 시작되었는지, 언제 끝날지 모르기에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이 느끼는 것에 근접한 어떤 고통의 이미지를 묘사하지만 이는 결국 그녀가 실제로 느끼는 고통의 중심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미끄러진다. 그런데 문득, 그녀가 이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낀다”고 고백한다. 죽고 싶을 만큼의 고통으로 인해 더욱 또렷해지는 살아있는 몸과 존재에 대한 인식. 이 아이러니함이 예리하게 내 마음을 찌른다. 죽음과 삶이라는 고통의 두 얼굴을 통해 나는 비로소 애니타의 고통과 마주한다.
오전 3시, 그녀는 자기 안에서 무언가가, 어떤 답답함이, 어떤 분노가, 어떤 슬픔이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그녀는 더 이상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다. 친구의 존재가 절실하지만, 친구를 깨우고 싶지는 않다. 동이 트지만, 분노와 슬픔은 여전히 그녀의 옆에 있다. 그녀의 안에 있다. 피아노 위에 앉은 애니타의 작은 몸을 푸른빛의 조명이 감싸고 있다. 어슴푸레한 새벽이, 차갑게 식은 마음이 그 푸른빛에 담겨 있는 듯하다. 조금 전에 씩씩하게 자신을 살아가게 하는 것들을 노래하던 이는 어디에 있는가?
고통과 절망에 있어서 어떤 강도를 따지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보자. 나는 그녀가 겪는 ‘정도의’ 고통과 절망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다. 내가 겪는 고통과 절망은 그저 괜찮지 않은 정도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저 살아야 하기에 품는 희망 없는 낙관 앞에서, 죽어야 할 이유만큼 살아야 할 이유 역시 잘 찾지 못한다. 이런 이유 없음이 뭔가 염치없게 느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상상도 못 할 고통과 삶의 절망을 노래하는 애니타의 모습에서 나는 나의 얼굴을 본다. 그리고 뜨거운 어떤 것이 내 안에서 자라나는 것을 느낀다. 이 열기가 내 몸과 맘을 안에서부터 덥혀준다. 그녀는 자기 삶의 가장 절망적인 어떤 순간을 노래하고 보여주고 있지만, 나는 외려 살아있음의 감동을 느낀다. 이렇게 그녀의 존재는 나에게 위로가 된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고통과 절망마저도 생존의 전략 중 하나일지 모른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은 고통과 절망은 애니타에게 다시 찾아오고 또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이것들을 ‘극복’하려 하지 않고 그것들의 지나감을 바라보며, 수많은 마이클들에게도 그렇게 얘기해준다. 그렇다고 그녀가 해탈한 초인의 모습으로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녀는 자신이 새벽 3시에 절실히 필요로 했을, 또 마이클에게 자신이 되어 주고 싶었을 가까운 친구의 모습으로, 우리의 옆에 나란히, 한 다리로 굳건히 서서, 무게를 실어 이야기해준다. “I’m still standing here.”

[사진 제공: (재)한국장애인문화예술원]

나의 생존 가이드
일자
2019.12.05(목) ~ 12.07(토)
장소
이음센터 5층 이음아트홀
창작/출연
애니타 홀랜더 Anita Hollander
관련정보
http://www.i-eum.or.kr/u2/index.busan?contentId=29&bbsId=BBSMSTR_000000000042&nttId=25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