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丙소사이어티 <애국적 광분>

[작품리뷰]‘丙-되기(becoming)’의 역동성, 정치성 - 그들이 역사를 드러내는 방식

이경미_연극평론가
174호 2019.12.19
1930년 어느 날, 평양에 살고 있는 윤희덕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내용인 즉,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 문성효가 오랜 투병 끝에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1930년 어느 날, 평양에 살고 있는 윤희덕은 샌프란시스코 한인교회로부터 편지 한 통을 받는다. 내용인 즉, 미국으로 돌아간 남편 문성효가 오랜 투병 끝에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다는 것. 윤희덕은 남편의 미국 주소록을 뒤져 그가 왜, 어떻게 죽었는지 알고 싶다는 편지를 차곡차곡 써서 보낸다. 그 과정에서 편지의 수신인은 한인 교회 권사 양원덕에서, 노천백, 넬슨 코놀리로 늘어난다. 문성효의 미국에서의 삶의 한 부분을 이루었던 그들은 현재 다른 곳에서 각자의 삶을 살고 있다.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이들과 편지를 주고받는 사이, 윤희덕은 그들의 기억 조각을 통해 그녀가 몰랐던 문성효와 마주하게 된다.
1.
연극 <애국적 광분>의 텍스트는 역사에 기대어 창작된 허구가 아니라, 1908년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더럼 화이트 스티븐스라는 미국 외교관 저격 사건에 기반을 두고 구성된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외교 고문이었던 스티븐스는 일본이 대한제국을 지배하는 것이 정당하다고 거듭 변호했던 인물이다. 미국의 한인 사회는 분노했고, 결국 그를 암살하기로 결정한다. 많은 사람이 애국을 부르짖으며 자발적으로 지원했는데, 전명운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사건 당일, 전명운이 쏜 총이 빗나가면서 암살계획이 수포로 돌아갈 위기에 처한다. 바로 그때 어디선가 홀연히 장인환이란 사람이 나타났고, 그가 쏜 총에 스티븐스는 그 자리에서 즉사한다.
문제는 그 누구도 장인환이 총을 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평소 말이 없었던 데다가 어디에서건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없었기에, 한인사회는 그가 정확히 어떤 사람인지도 알지 못하고 있던 상태였다. 그는 현장에서 체포, 구속된다. 당시 그의 변호를 맡았던 사람은 한인이 아닌 미국인 변호사 넬슨 코놀리였다. 최종변론에서 코놀리가 배심원의 감정에 호소하기 위해 언급한 것이 쇼팬하우어의 저 ‘애국적 광분’이라는 단어였다. 장인환이 일종의 비정상적인 정신질환을 앓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로 인해 장인환은 사형판결을 면하고 구속 수감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리고 오랜 수감 생활을 끝낸 장인환은 평양으로 돌아온다. 평양의 조선인들은 그를 애국지사라며 환대하고 가정을 꾸려 안락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그 과정에서 윤희덕은 장인환과 결혼을 하게 된다.
2.
일찍이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예술이 불가능하다’고 했다면, 자크 랑시에르는 ‘오직 예술만이 아우슈비츠를 드러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예술에 대한 랑시에르의 질문은 특히 그것이 역사와 연관될 경우, 항상 어떻게 하면 역사와 현실의 표면을 헤집어 역사 안에 자리를 갖지 못한 자들, 말을 할 수 없었던 자들, 심지어 우리가 사라지게 만든 자들을 보고 듣게 할 수 있는가 하는 것으로 모아진다. 이를 위해 그는 이제는 예술이 스스로 자신의 고유한 거짓말을 털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컨대 예술은 더 이상 역사에 대해 허구의 이미지를 얹기보다, 오히려 지금까지 모든 수사의 이미지들이 만들어낸 가상(simulacre)으로부터 그 역사 안의 모든 신체와 장소, 시간을 끌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진정한 정치와 민주주의는 우리의 그 모든 정치들과 그 모든 민주주의들과 단절할 때 비로소 가능해지는 것처럼, 진정한 역사를 가능하게 하는 예술의 힘 또한 잘 정돈된 연대기적 역사에 대한 재서술이 아니라 오히려 내용으로나 형식 모두에 있어 그것과의 단호한 단절 및 균열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3.
‘병(丙) 소사이어티’는 그들의 연극 <애국적 광분>에서 예술에 대한 랑시에르의 이 요구를 그들 특유의 ‘병(丙)스러운’ 시선으로 풀어낸다. 이때 ‘병(丙)스러움’이란 그들의 이전 작품을 통해 충분히 확인했듯, 바로 갑(甲)과 을(乙), 이쪽과 저쪽,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사방으로 거침없이 자유롭게 열린 자발적이고 능동적인 유영자로서의 타자스러움이다. 그것은 소위 중심을 흔드는 힘이자, 온갖 이분법적 경계 속에 머물며 딱딱해진 우리의 무감각을 흔들어 깨우는 일종의 파동 같은 것이다. 2018-2019년 그들의 ‘신토불이(身土不異)’는 바로 그 파동들의 모음인 바, 이번에는 그 파동으로 역사에 다가간다. 그리고 가시적인 것과 비가시적인 것, 즉 존재와 비존재 사이의 모든 분할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창작된 허구가 아니라 철저히 사실에 기반을 두고 그것을 슬쩍 비틀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선 윤치복을 윤희덕으로, 장인환을 문성효로, 전명운은 이제 한인사회를 떠나 홀로 세탁소를 운영하며 평범하게 살아가는 노천백으로 각각 다르게 호명해 극장으로 불러낸 것은, 100여 년 전 사건의 시간과 공간, 인물의 고유성에 갇히지 않기 위함이다. 또한 인물과 인물 간의 직접 대화가 아닌 편지라는 매개된 소통의 방식을 선택한 것은, 당사자들 간의 공간과 시간, 감정적 거리를 벌려 사건을 객관적 관점에서 재구성하려 했기 때문이다. 결국 이러한 거리두기를 통해 <애국적 광분>은 일제강점기 모든 항일 독립운동의 근간이 되었던 저 애국의 실체를 조심스럽게, 하지만 능청스럽게 건드린다. 그 과정에서 그 안에 접혀 있는 것 혹은 감긴 것 하나하나가 무대 위에 펼쳐진다.
연극은 장인환이 그때 왜 그 자리에 나타났었는지, 왜 총을 쏘았는지에 대해 묻지 않는다. 그보다는 ‘그 이후’, 즉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장인환이란 한 주변적 존재를 마주한 당시 미주 한인사회의 태도에 주목한다. 양원덕, 노천백, 넬슨 코놀리는 자신들의 편지를 통해 실로 엄청나게 많은 말들을 쏟아낸다. 그들의 사랑, 그들의 종교, 그들의 조선, 그들의 애국, 그들의 정의, 그들의 자유... 그리고 그 안에서 그들은 문성효라는 인물을 각자의 관점과 이해에 따라 연신 의미화한다. 그런데 무대 위의 문성효는 정작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떤 표정도 보이지 않은 채, 온갖 말들로 채워진 무대 위에 가만히 서 있는가 하면, 천천히 걸음을 옮길 뿐이다. 그런 문성효는 자신의 주변으로 쌓이는 무수한 말들 중 어느 것에도 응대하거나 반응하지 않는다. 일종의 텅 빈 기표라고 해야 할까. 배우들이 공연 시간 내내 작정하고 의도적으로 구사하는 더없이 유창한 영어 역시 점점 공허하게 다가온 것도 그 때문이다. 그 영어에서는 오히려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환상, 그 환상에 기댄 일종의 자기 수사 같은 것만이 연신 묻어날 뿐이다.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관객들은 윤희덕과 함께 그들이 말하는 저 선(善)하고 정의로운 것의 실체에 다가간다. 그들 공동체의 바깥을 맴돌며 존재감조차 없던 이 주변인을 ‘애국지사’라는 이름으로 껴안아 자신들에게 소속시키는 과정에서 그들 안에 발생했을 어떤 당혹감과 불편함을 마주한다. 그들끼리 공유한 시각에서 보자면 장인환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정상이 아닌’ 존재였다. 그래서 자신들의 ‘애국’ 역시 이 불편한 존재인 장인환과 공유할 생각이 없었다. 장인환의 애국은 자신들의 애국과 같지도, 같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그들 중 누구도 장인환의 변호를 맡지 않았던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고.
사실 장인환이 수감생활을 마치고 평양으로 오게 된 것도 그들의 치밀하게 계산된 ‘밀어내기’였다. 물론 평양에서도 장인환은 여전히 주변적 존재를 벗어나지 못했다. 윤희덕과 나름 자신의 삶을 찾고자 했지만, 애국지사와 살인자라는 두 축 사이에서 떠돌다가 다시 미국으로 내몰려지고, 그렇게 죽어 서둘러 매장되고 만 것이다.
4.
그렇게 <애국적 광분>은 한때 저마다의 올바른 가치와 이념을 내세운 말들이 말한 것을 토대로, 그리고 그 말들이 의도적으로 말한 것, 아무 생각 없이 말한 것, 일종의 기념비처럼 말한 것까지 촘촘히 모두 되짚어본다. 그들은 소위 연극의 언어를 빌어 모범적인 사례들에 말과 몸을 얹지 않는다. 그때 발생하는 연극의 공동체로 역사의 공동체를 재확인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기록된 이야기와 모범적 사례들이 주장하는 저 효과로부터 말과 몸을 떼어내어 그 안에 작동하는 힘들의 실체를 냉정하게 되짚는다.
최근 작품들에서 일관되게 실천되고 있는 ’병(丙)소사이어티‘의 ‘병(丙)스러운’ 미학이 의미 있는 것은, 그것이 세상 모든 안과 밖의 경계를 지우고, 저 ‘우리’라는 정체성의 범주를 흔들기 때문이다. 과거와 현재를 통틀어 비가시적인 것 아래 감춰진 가시적인 것을 깨워 그것을 강요된 비존재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말과 몸의 연출이라고나 할까. 관객에게는 실로 커다란 즐거움이자 무엇보다 소중한 자기성찰의 통로임이 분명하다.

[사진 제공: 丙소사이어티]

Patriotic Insanity : 애국적 광분
일자
2019.11.20(수) ~ 11.24(일)
장소
서울 용산구 이태원로 242 현대자동차 건물 2층
출연
권형준, 송하늘, 유이든, 하상민, Martin Boswell
작/연출
손영규
드라마터그
송이원
조명디자인
서가영
무대디자인
김재란
무대미술
김승희, 김주영
무대감독
박진아
무대지원
김정민, 정현주, 강길우, 문태환
하우스테마
안창모
기술지원
서승한
자문
허지우
번역
채푸름
丙소사이어티
관련정보
http://www.playticket.co.kr/ticketDetail.html?idx=10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