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체열람전>
[작품리뷰]공간과 전시
김송요
175호
2020.0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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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 얘기를 하는 공간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인가, 얘기인가, 한다는 행위인가, 공간인가? 말장난 같을 수도 있지만, 읽는 사람마다 시선이 먼저 가거나 되뇌었거나 밑줄 그은 데가 다를 법하다......
사랑 얘기를 하는 공간이 있다고 해보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랑인가, 얘기인가, 한다는 행위인가, 공간인가? 말장난 같을 수도 있지만, 읽는 사람마다 시선이 먼저 가거나 되뇌었거나 밑줄 그은 데가 다를 법하다. 사랑이라 각별하다는 사람, 이야기가 중요하다는 사람, 발화의 행위가 핵심이라는 사람, 아니 그것들은 다 ‘공간’을 설명하는 말들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모두가, 개중 하나라도 빠지면 다른 말이 되기 때문에, 결국 모든 단어가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입체열람전 포스터
뜬구름 잡는 소리 같지만 어쩌면 '전시'는 (이를테면) ‘사랑’, ‘얘기를’, ‘하는’, ‘공간’을 분절적으로 소비당하는(?) 작업일지도 모른다. 공연이 블랙박스 밖으로 나온 만큼 전시도 화이트큐브 바깥으로 나왔음에도, 그리고 물리적인 부피감을 갖는 작품이 그것이 놓인 공간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음에도, 때로 공간은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영향력은 낮게 평가된다. 사랑 얘기를 하는 공간에 사랑 얘기만 있고 ‘한다’와 ‘공간’은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이다. 때론 반대로 강렬한 공간이 전시장으로 쓰이면서, 공간 볼륨이 작품을 압도하는 존재감을 뿜어낼 때도 있다. 그럴 때 사랑 얘기는 개미만한 소리로 속삭여진다. 텍스트 비평과 인상비평,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정치적 메시지를 오가면서도, ‘극장 경험’에 비견될 ‘전시장 경험’은 여전히 연약하다는 생각이 든다.
전시의 구성요소에 주변환경과 전시공간이 포함된다면,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전시를 보는 것은 그 구성요소의 비중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닌가 싶다. 명동의 옆구리 언덕에 있는 극장은 1975년 문을 연 이래 여러 차례 여닫기를 반복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공간과 바깥의 풍경은 변화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와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을지로는 재개발의 그림자와 인스타그램의 호기심 사이에서도 공구상으로 차 있다. 갤러리는 신축했지만 아래의 극장은 객석이 늘어났을지언정 이전과 비슷한 공기를 내뿜는다.
전시의 구성요소에 주변환경과 전시공간이 포함된다면, 삼일로창고극장에서 전시를 보는 것은 그 구성요소의 비중을 생각해볼 수 있는 경험이 아닌가 싶다. 명동의 옆구리 언덕에 있는 극장은 1975년 문을 연 이래 여러 차례 여닫기를 반복했고 지금에 이르렀다. 공간과 바깥의 풍경은 변화했지만, 여전히 사람들은 성당에서 크리스마스 미사와 천막농성을 하고 있다. 을지로는 재개발의 그림자와 인스타그램의 호기심 사이에서도 공구상으로 차 있다. 갤러리는 신축했지만 아래의 극장은 객석이 늘어났을지언정 이전과 비슷한 공기를 내뿜는다.
이번 전시는 정주영의 책 『소극장 연극 시맨틱 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를 기반으로 1975년 문을 연 에저또창고극장과 그 이후 운영된 삼일로창고극장, 나아가 극장의 아카이브에 대해 여러 방식으로 이야기한다. 참여작가는 소리, 소설, 논문, 게임의 형태로 시맨틱 아카이브를 재해석하거나 재현한다. 우선 입구에서 석대범의 <락앤롤 보트 혹은 동아시아 무선 연맹>의 헤드셋을 착용한다. 아주 단순하고 거친 표현이지만, 시각은 봐서 익숙한 거고 청각은 안 들어도 아는 것이라고 한다. 이미 본 것을 또 봤을 때 친숙함을 느낄 순 있어도 처음 본 것은 무조건 낯설지만―그래서 기시감이나 미시감 같은 말도 있는 것일 테고―소리는 처음 들어본 것이어도 앞부분의 전개를 참조해 미리 뒷부분을 짐작하고 청세포를 배치해 받아들일 수 있다고. 떠도는 주파수를 가로채어 들으면서, 어떤 소리가 이어질지 상상하면서, 매뉴얼대로 버튼을 눌러 반복되는 뚱땅거림과 함께 안쪽으로 들어선다. 한번 송출된 라디오 전파는 인간이 사라진 뒤에도 영원히 우주를 떠돈다는, 스산한 낭만의 이야기가 어떻게 불쑥 내 귀에 도청장치와 연결되는지 생각하면서.

김효래×윤여준의
곧장 꺾으면 김효래×윤여준의 를 플레이할 수 있다. 극장 지하에서 살며 수많은 역할로 연극에 참여한 ‘김정민’ 심이 캐릭터다. 상상된 인물 김정민은 심즈가 됨으로써 오히려 현실세계에 실존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딘가에 있을 “김정민”이 이 ‘김정민’의 모델인 것만 같다. 완전히 뜻대로 조작되지 않는 김정민 심은 꽤 정교한 심즈 세상 안에서 3D 모노드라마를 선보인다. 돈이 좀 더 있었으면 굴뚝을 바꾸고 싶다고 생각하다가 이미 삼일로창고극장과 떨어져 독자적인 이미지와 서사를 갖게 된 A00109의 존재에 새삼 놀라기도 한다.
바로 옆엔 <스물여덟 개의 각주와 세 개의 인용과 열세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진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과 방향으로 이 전시와 공간을 이해하게끔 만든다. 페이지마다 본문 이상의 길이를 차지하며 서술된 각주는 전시의 출발지점인 『소극장 연극 시맨틱 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를 환기하면서 온오프라인의 연극 아카이브, 데이터, 극장에서부터 연극인의 건강과 맥주와 연극의 무용함과 논문의 쓸모와 치맥을 오가며 이야기 가능한 것들을 연결한다. 중철하고 펀칭해서 벽에 매달아둔 글들은 대롱대롱 벽면에 그림자를 만들면서 전시의 앞뒤, 또는 시맨틱 아카이브의 전후에 (쩌렁쩌렁이라기보다는 속살거리는) 매니페스토가 된다.
바로 옆엔 <스물여덟 개의 각주와 세 개의 인용과 열세 개의 질문으로 이루어진 결론>이 기다리고 있다. 기대하지 않았던 방식과 방향으로 이 전시와 공간을 이해하게끔 만든다. 페이지마다 본문 이상의 길이를 차지하며 서술된 각주는 전시의 출발지점인 『소극장 연극 시맨틱 아카이브 구축에 관한 연구』를 환기하면서 온오프라인의 연극 아카이브, 데이터, 극장에서부터 연극인의 건강과 맥주와 연극의 무용함과 논문의 쓸모와 치맥을 오가며 이야기 가능한 것들을 연결한다. 중철하고 펀칭해서 벽에 매달아둔 글들은 대롱대롱 벽면에 그림자를 만들면서 전시의 앞뒤, 또는 시맨틱 아카이브의 전후에 (쩌렁쩌렁이라기보다는 속살거리는) 매니페스토가 된다.

김봉곤의 소설 「선샤인 보이스」의 입체조형물
코너를 돌면 김봉곤의 소설 「선샤인 보이스」가 등장한다. 전문이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뜯어서 눈금선대로 접는다. 완성본은 허공에 가운데가 둥근 전구 보양으로 빈, 그래서 수학적으로는 아마 다면체라고 부를 수 없게 된 형태로 떠 있다. 이야기는 각진 모양새를 하고서도 데굴데굴 굴러서 발치에 도달한다. 지하 극장에 나부끼는 햇볕 같은 목소리와 직사광선에 빛이 바랜 사람들, 닐 사이먼의 동명 희곡 속 보드빌 페어를 생각하면서 글을 읽는다. 인물은 잘 접혀 다면체 아닌 다면체가 된 소설처럼 구멍이 뻥뻥 뚫려 있기도 하고, 구체적인 모서리를 갖고 있기도 했다. 그가 을지로의 조명상가와 삼일로 언덕배기를 지나 성당으로 걸어가는 길을 상상하면서, 서울을 동 단위로 쪼개어 묘사하는 세상에서 왜 삼일로는 그러지 않았는지 잠시 생각했다. 이야기가 구체화하는 세상에 대해서도 생각한다. 그 사람이 구체적일수록 타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희한하게도 어딘가에 살아 있을 것이라고, 나와 같은 세상을 목격하며 매일을 견디고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더 가까이 여기는 마음에 대해서. 연극을 보고 나와 ‘그 사람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겠지’ 상상하면 기분이 좋아진다는 관객의 마음과 시맨틱 아카이브가 어떻게 닮았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특정 시대의 활동을 증언할 수 있는 ‘기록되지 않은 인물’을 보여주는 ‘발견’의 아카이브”가 바로 시맨틱 아카이브라는 구절과 함께.
입체를 열람한다는 것은 뭘까. 이 전시에서는 아마도 원본이 된 텍스트를 여러 각도에서 열람했음을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부차적으로 생산되는 의미의 여부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입체란 건 뭘까. 정면이 존재하는 페인팅이나 객석 내 정해진 자리에서 보아야 하는 공연과는 다른 걸까. 하지만 결국 페인팅이 걸린 벽에 바싹 붙어 두툼하게 완성된 마띠에르를 보고 독백하는 인물의 옆얼굴에 드리운 그림자를 보고 바닥의 마스킹을 보듯이, 모든 것은 입체열람의 가능성을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면면을, 양감을, 오목하고 볼록한 부분을 들여다보는 시선 그 자체가 어쩌면 극장-전시장이 갖고 있는 속성일지도 모른다.
나오기 직전 데이터 센터에서 키워드를 갖고 아카이브를 검색한다. 시맨틱 아카이브라는 형태로 묶인 기록들은 반드시 촘촘하기보다는 때로 성글다. 서로를 느슨하지만 끊어지지 않는 인력으로 잡아당기는 작품들 사이 관계도와도 닮았다. 작은 둥지, 또는 돔, 오래된 신전 같기도 하고 SF영화의 조종칸 같기도 한 공간에서 이전의 기록을 들춰보다가 밖으로 나선다. 보여서 보는 것과 독해하는 것, 들려서 듣는 것과 청취하는 것 사이를 오고가며 시청각을 펼쳐두고, 에… 저, 또… 단어를 고르고 문장을 정리하면서, 불현듯 스치는 기억을 이야기에 포개면서 한 바퀴를 돌면 출구로 가는 계단이 등장한다. 내려가기 전 잠시 다시 사방을 둘러본다. 전시장이고, 삼일로창고극장이고, 서울인 여기가 있다. 쉬지 않고 이야기하는 공간과 전시가 있다.
[사진제공 : 김송요]
입체열람전
- 일자
- 2019.12.17(화)~2020.01.05(일)
- 장소
- 삼일로창고극장 갤러리
- 작가
- 김봉곤, 김슬기, 김효래, 윤여준, 석대범
- 기획
- 허영균
- 데이터 제공 및 분석
- 정주영
- 공간 연출
- 석대범(HBM)
- 공간 설치
- 이미소(HBM)
- 그래픽 디자인
- 파이카
- 웹디자인
- 류태석
- 제작 설치
- 김용현(스튜디오 에어)
- 프로듀서
- 김지우(남산예술센터 PD)
- 삼일로창고극장
- 운영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