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린피그 <동시대인>
현재는 끊임없이 사라진다, 그리하여 세계는 마침내 나타날 것이다
김민관_아트신 편집장
178호
2020.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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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동시대인>은 동시대인의 어떤 표본들을 현시하는 방식을 택한다. 곧 무대 전체를 덮는 거실, 교실, 자취방, 버스정류장 등 실내와 실외를 아울러 현실의 장소를 구성하는 배경들은 뭉뚱그려진 채 무대 전면으로 노출되어 있고, 학생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90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출현하는 45개의 장면은 A에서...
연극 <동시대인>은 동시대인의 어떤 표본들을 현시하는 방식을 택한다. 곧 무대 전체를 덮는 거실, 교실, 자취방, 버스정류장 등 실내와 실외를 아울러 현실의 장소를 구성하는 배경들은 뭉뚱그려진 채 무대 전면으로 노출되어 있고, 학생부터 노인까지 남녀노소 90명의 각기 다른 인물들이 출현하는 45개의 장면은 A에서 B로 차례로 연결되거나 특정한 맥락을 형성하지 않는다. 그들이 나누는 대화는 미시적 일상들이다. 결과적으로 이러한 사건들은 인과관계를 갖지도 않는다. (이를 연결하는 건 그 바깥의 무엇이다.) 여기서, ‘동시대’는 상위 개념으로 종합되기보다 구체적 사례들로 주어짐으로써 그 정의를 유예한다. 각각의 사례는 제각각으로 분쇄되지만 특별한 하나의 사건으로 ‘분별’되지는 않는다.
45개의 장면은 길이의 차원에서도 변별점이 크지 않으므로, 이를 45개의 영상 클립들이 섬네일로 표면화된 유튜브 같은 웹 플랫폼 상에서의 하나의 창으로 비유하면, 어떤 하나를 먼저 클릭해도 극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독립된 양태들의 집합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한 동시 녹음으로 중계/중개되는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사운드는 증폭(되어 잘 매개)된다면 스크린은 이를 온전한 양태와 시야로 확대하기보다 변형(하여 매개를 방해)하기도 한다.
때로 무대는 스크린 상에서 기녹화된 영상으로 대체되고 사운드는 붐 마이크에서 마이크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 깊숙한 무대에서 먼 거리의 장면까지 잘 들리게 하는 마이크 효과는, 결과적으로 그 모두의 말을 비슷한 감도로 ‘들리게’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론 사운드가 연극적인 발성보다 자연스러운 일반인의 발성 효과를 담보하게 하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초점은 <동시대인>이 리얼리즘보다는 ‘리얼’을 다루는 태도의 차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해석으로 작품을 수렴시킬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는 현실을 투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확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현실은 그 전에 들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매개는 곧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듣는다는 환상의 차원에 근접한다.
45개의 장면은 길이의 차원에서도 변별점이 크지 않으므로, 이를 45개의 영상 클립들이 섬네일로 표면화된 유튜브 같은 웹 플랫폼 상에서의 하나의 창으로 비유하면, 어떤 하나를 먼저 클릭해도 극의 구조가 바뀌지 않는 독립된 양태들의 집합이라고 바꿔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장면들은 대부분 카메라와 마이크를 통한 동시 녹음으로 중계/중개되는데,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사운드는 증폭(되어 잘 매개)된다면 스크린은 이를 온전한 양태와 시야로 확대하기보다 변형(하여 매개를 방해)하기도 한다.
때로 무대는 스크린 상에서 기녹화된 영상으로 대체되고 사운드는 붐 마이크에서 마이크로 대체되기도 하는데, 일차적으로 깊숙한 무대에서 먼 거리의 장면까지 잘 들리게 하는 마이크 효과는, 결과적으로 그 모두의 말을 비슷한 감도로 ‘들리게’ 한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여기서 물론 사운드가 연극적인 발성보다 자연스러운 일반인의 발성 효과를 담보하게 하는 측면도 생각할 수 있지만, 오히려 이러한 초점은 <동시대인>이 리얼리즘보다는 ‘리얼’을 다루는 태도의 차원을 중시한다는 점에서 단순한 해석으로 작품을 수렴시킬 가능성이 크다. 마이크는 현실을 투영하는 게 아니라 현실을 확대해서 들을 수 있는 것으로 만든다. 현실은 그 전에 들을 수 없는 것이었으므로, 이러한 매개는 곧 들을 수 없는 것들을 듣는다는 환상의 차원에 근접한다.

반면 카메라는 관객석에서 볼 수 없는 시야와 각도를 제공하지만 클로즈업된 특정한 신체 일부분을 보여주거나 함으로써 일반적인 또는 일상적인 구도에서 과도하게 벗어나며 현실과의 긴장 관계를 초래한다. 애초에 인물들은 찍힐 수 있고 들릴 수 있다는 점에서 무대 정면을 향할 필요가 없는데, 카메라에서 전달되는 스크린은 이것이 잘 매개될 수 있다는 환상을 깨뜨린다. 카메라는 그 태생적 기능, 무언가를 잘 기록/보존하는 장치로서 (파편적 현실 공간들이 접합돼 시공된) 무대의 물리적 크기를 연장하는 대신, 그 무대가 온전히 전달될 수 없는 것임을 인지시키는 데 이른다.
아무 말 없이 영상을 찍는, 그리고 촬영을 철회하고 재개하는 카메라맨은 스태프의 현시로서보다 이 바깥의 온전한 관찰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의 그의 위상―그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한 자리에 붙박이게 되며 현실의 위치를 점하지만 이를 조망하지는 못한다―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일상 바깥에 있는 인식되지 않는/않았을 인물을 드러낸다. 나아가 카메라는 유령 목격자, 곧 관객의 시선과 다르게 기록, 현상되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기록의 목적성 없는 사물의 투명한 시선으로서 동시간 개입되지 않을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명하게 그 존재를 환상으로 적시한다.
아무 말 없이 영상을 찍는, 그리고 촬영을 철회하고 재개하는 카메라맨은 스태프의 현시로서보다 이 바깥의 온전한 관찰자가 될 수 없는 현실에서의 그의 위상―그는 다른 배우들과 마찬가지로 한 자리에 붙박이게 되며 현실의 위치를 점하지만 이를 조망하지는 못한다―을 나타내는 동시에 그 일상 바깥에 있는 인식되지 않는/않았을 인물을 드러낸다. 나아가 카메라는 유령 목격자, 곧 관객의 시선과 다르게 기록, 현상되게 할 것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그 기록의 목적성 없는 사물의 투명한 시선으로서 동시간 개입되지 않을 우리의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는 점에서 투명하게 그 존재를 환상으로 적시한다.

동시대인은 파편적 시각, 그리고 파편적 시간으로써만 드러난다. 45개의 장면에 출연하는 인물들에게는 하나같이 이름이 부여되지 않는데, 이는 이들이 관찰로써만 가시화될 수 있는 존재임을 의미하는 듯하다. 우리는 그들의 맥락과 전후 배경을 알 수 없고, 그를 통해 이들을 해석하거나 이입할 근거를 찾기도 어렵다. 영화로 따지면 엑스트라만이 있다. 그리고 앞선 이 작품의 유일한 정의, 유예된 정의가 솟아나는데, 이는 (카메라가 아니라) 유일하게 현상과의 거리를 벌려 사후적으로 이를 종합하는 (데 아마도 실패할 수밖에 없는) 존재인 관객이 (그 등장인물이 아니라) 동시대인일 수 있다는 것이다.
연출이 인용하고 있기도 한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할 수 있”는 “동시대인”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동시대인>을 본다면, 작품에서 하나의 장면은 나타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 곧 어떤 식으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장면의 단독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카메라라는 매개 장치는 어쨌든 현실이 반영되고 있음, 관찰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한편, 반영될 수 없는 현실 자체, 그리고 사실 현재가 기록되지 않았을 무엇임을 환기하게 한다.
반짝이는/사라지는 파편들의 <동시대인>은 관객에게 수월하게 수용될 수 있는 대신, 언뜻 관객이 그것들을 더 집요하게 감각해야 함을 요청하는 듯한데, 그 보기의 감각은 매우 지루한 시간을 겪는 것과 다름없다. 사실 45개의 장면을 통해 쌓이는 건 동시대인의 들여다볼 수 없는 본질이 아닌 스치는 표층이고, 장면들이 일관되게 두께 없음으로 치환됨으로써, 그 표층이 본질임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일상 자체가 아니라 일상에서 내재화된 의식들이 발설된다. 차라리 인물들의 대화에서 주목할 만한 건 그 단편적 내용이 가진 맥락보다 차라리 말(표면)과 속마음(심연)이 시차 없이 교차하여 전개되는 형식 자체에 있는데, 따라서 말과 속마음은 마구 섞이고 그 차이는 희미해진다. 그 중첩된 표현의 양태에서 일관되게 심드렁하고 때로 경멸이 따르기도 하는 냉소주의, 그리고 피상적 세계관이 목격된다.
연출이 인용하고 있기도 한 철학자 아감벤(Giorgio Agamben)의 “우리를 향하지만 우리에게서 무한히 멀어지는 빛을 지각할 수 있”는 “동시대인”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것으로 <동시대인>을 본다면, 작품에서 하나의 장면은 나타나고 이내 사라진다는 점, 곧 어떤 식으로도 다시 나타나지 않는 장면의 단독성에 주목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카메라라는 매개 장치는 어쨌든 현실이 반영되고 있음, 관찰되고 있음을 인식하게 하는 한편, 반영될 수 없는 현실 자체, 그리고 사실 현재가 기록되지 않았을 무엇임을 환기하게 한다.
반짝이는/사라지는 파편들의 <동시대인>은 관객에게 수월하게 수용될 수 있는 대신, 언뜻 관객이 그것들을 더 집요하게 감각해야 함을 요청하는 듯한데, 그 보기의 감각은 매우 지루한 시간을 겪는 것과 다름없다. 사실 45개의 장면을 통해 쌓이는 건 동시대인의 들여다볼 수 없는 본질이 아닌 스치는 표층이고, 장면들이 일관되게 두께 없음으로 치환됨으로써, 그 표층이 본질임을 드러내기에 이른다. 일상 자체가 아니라 일상에서 내재화된 의식들이 발설된다. 차라리 인물들의 대화에서 주목할 만한 건 그 단편적 내용이 가진 맥락보다 차라리 말(표면)과 속마음(심연)이 시차 없이 교차하여 전개되는 형식 자체에 있는데, 따라서 말과 속마음은 마구 섞이고 그 차이는 희미해진다. 그 중첩된 표현의 양태에서 일관되게 심드렁하고 때로 경멸이 따르기도 하는 냉소주의, 그리고 피상적 세계관이 목격된다.

곧 우리가 목격하는 동시대인은 세계에 대한 태도를 드러낸다. 이들은 세계와 대면하거나 이를 변형하는 주체가 아니다. 고귀한 인격, 원대한 목표, 숭고한 행위 의지 따위는 없다. 영웅은 없다. 첫 번째 대화에서 두 명의 도우미 중 한 명이 몰래 도망가려던 걸 발견한 다른 도우미가 이를 제지하다 결국 자기도 가겠다고 하며 둘이 방향을 달리해 가기로 순식간에 합의를 이루는 과정은 단적으로 이를 드러낸다. <동시대인>은 그간 맞춰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초점을 극단적으로 변경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유예의 판단과 결정의 태도, 대강 그런 거겠지 하는 심드렁한 세계에 대한 인식 이후, 자막으로 장면들의 사이사이, 그리고 마지막 순간들이 응결되는데, 자막의 내용은 냄새의 후각적 묘사나 풍경 일부로 점철된다. 마시고 있던 커피 향, 음식 냄새, 땀 냄새 등이 부상하는 대신, 그리고 중반 즈음부터 몇 개의 풍선이 계속 스크린 상에서 부상하는 대신, 스크린 앞의 풍선은 위에서부터 점차 커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보이지 않는 냄새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대기에 뒤섞이리라는 것,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상적 환유물이 무대 위의 풍선이다. 향에 대한 들리지 않는 언어(자막)는 단편들로 구성된 세계의 투명성과 진공 상태를 주장한다. 각각의 세계는 응결되어 유예된다. 주로 후각에 집중된 또는 촉각적인 미학적 과잉의 그 기술 형태는, 그 보이지 않음을 인위적으로 잡아두는 헛손질에 가깝다.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묘사만이 있다. 자막의 언어는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머물러 있게 한다.
어떻게든 되겠지 하는 유예의 판단과 결정의 태도, 대강 그런 거겠지 하는 심드렁한 세계에 대한 인식 이후, 자막으로 장면들의 사이사이, 그리고 마지막 순간들이 응결되는데, 자막의 내용은 냄새의 후각적 묘사나 풍경 일부로 점철된다. 마시고 있던 커피 향, 음식 냄새, 땀 냄새 등이 부상하는 대신, 그리고 중반 즈음부터 몇 개의 풍선이 계속 스크린 상에서 부상하는 대신, 스크린 앞의 풍선은 위에서부터 점차 커지며 아래로 떨어진다.
보이지 않는 냄새들은 어떤 식으로든 하나의 대기에 뒤섞이리라는 것, 곧 보이지 않는 타인들과의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증명하는 상상적 환유물이 무대 위의 풍선이다. 향에 대한 들리지 않는 언어(자막)는 단편들로 구성된 세계의 투명성과 진공 상태를 주장한다. 각각의 세계는 응결되어 유예된다. 주로 후각에 집중된 또는 촉각적인 미학적 과잉의 그 기술 형태는, 그 보이지 않음을 인위적으로 잡아두는 헛손질에 가깝다. 세계에 대한 해석이 아니라 묘사만이 있다. 자막의 언어는 세계를 전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머물러 있게 한다.

인물들이 감지하는 그러나 지나치고 마는 천둥소리와 같은 불안한 징후, 가라앉는 풍선, 반대로 부상하는 풍선은 각각 무엇을 말하는가. 장면은 닫혀 있고 그 안에 인물들은 갇혀 있지만, 세계의 경계는 그렇게 분명하게 상존함을 드러낸다. 하나의 풍선은 스크린만큼 커지지만, CG로 처리되는 화면 위의 풍선은 인위적으로 삽입되는 것으로, 세계(스크린)의 경계에서 사라진다. 사실상 공원에서 백혈병 아이들을 위한 자선음악회가 곧 열린다는 연극의 시작 당시의 방송, 그리고 이후 그것이 진행되고 있음을 알리는, 간간이 장면들에서 흘러나오는 바이올린 연주 소리, 또 학교 종소리, 천둥소리, 제트기 소리 등은 세계에 대해 각 장면에서 파편적으로 공유되는 배경이다.
따라서 하나의 세계가 (희미하게) 접근되고 있고 동시에 (온전하게) 접근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세계에는 동시대인의 파편적인 삶이 감추어져 있다. 역설적으로 그 감추어진 삶들을 밝히는 순간들로써 커다란 세계의 원-장면은 사라진다. A와 B의 동시간적 공존만이 사실 존재했을 것이다. 무수한 파편들이 어지럽게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세계.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세계. 커다란 풍선은, 마침내 바닥에 닿는 풍선은 나타날 수 없었을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며, 동시에 나타나지 않은 세계의 이면을 이야기한다.
따라서 하나의 세계가 (희미하게) 접근되고 있고 동시에 (온전하게) 접근되지 않고 있다. 하나의 세계에는 동시대인의 파편적인 삶이 감추어져 있다. 역설적으로 그 감추어진 삶들을 밝히는 순간들로써 커다란 세계의 원-장면은 사라진다. A와 B의 동시간적 공존만이 사실 존재했을 것이다. 무수한 파편들이 어지럽게 제각각의 소리를 내는 세계. 그래서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을 세계. 커다란 풍선은, 마침내 바닥에 닿는 풍선은 나타날 수 없었을 하나의 세계를 보여주며, 동시에 나타나지 않은 세계의 이면을 이야기한다.

어떻게든 세계는 종합되어야만 할 것이다. 동시대인(들)의 세계가 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개별자들의 총합은 결코 그 세계의 온전한 양태가 아니다. 이 안에서는 어떤 의미도 구성되지 않고, 각자의 미래(상) 없는 현재만이 있다. 나아갈 곳도 나아질 바도 없는 삶들의 나열만이 그들의 의식 세계를 점거한다. 그리고 거기에 부착되는 심미화된 삶에 대한 기술만이 존재한다. 그들은 분명 세계를 이따금 감지하지만, 거기로 나아가지는 못한다. 따라서 유령처럼 맴도는 노이즈, 맥락을 어느새 벗어나 떠돌던 그 사운드, 따라서 상징화될 수 없이 세계의 흔적을 기술하는 지표로서의 언어, 그리고 이따금 출현하는 의인화된 풍선들을 따라가는 것만이 온전한 세계(의 윤곽)를 그릴 것이다. 그렇다면 보고 듣는 것을 증폭하거나 묘사하던 무대 위 장치들, 그리고 삶의 내용은 이 희미한 징후들에 대한 맥거핀 같은 것 아니었을까.
<동시대인>은 어쩌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그러나 너무나도 뚜렷하게 출현했던 희미한 존재(의 세계)를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굳이 각 배역과 같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재현에 침잠되는 대신, 재현의 바깥으로 부상하며. 어쩌면 먼 그 시차가 우리의 동시대임을, 동시에 그 멀어지는 희미한 빛을 동시대에 감각하는 존재가 동시대인임을 이르며.
<동시대인>은 어쩌면 우리로부터 사라지는 그러나 너무나도 뚜렷하게 출현했던 희미한 존재(의 세계)를 여전히 이야기하고 있는 것 아닐까. 굳이 각 배역과 같이 그 이름을 부르지 않더라도. 재현에 침잠되는 대신, 재현의 바깥으로 부상하며. 어쩌면 먼 그 시차가 우리의 동시대임을, 동시에 그 멀어지는 희미한 빛을 동시대에 감각하는 존재가 동시대인임을 이르며.
[사진제공 : 그린피그]
동시대인
- 일자
- 2020. 3. 28(토) ~ 4. 2(목) ※ 4.2(목) 관객 없이 영상 녹화
-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대극장
- 출연
- 강학수, 권태건, 김원태, 박경은, 박지아, 신상훈, 신재환, 이동영, 이민정, 이재혜, 이주형, 이지원, 임진웅, 정양아, 정연종, 조은원, 최귀웅, 최문석, 최지현
- 작
- 전성현
- 연출
- 윤한솔
- 조연출
- 정유진
- 무대디자인
- 신승렬
- 조명디자인
- 김형연
- 의상디자인
- 김경희
- 작곡/사운드디자인
- 이민휘
- 영상/음향 기술감독
- 윤민철
- 영상촬영
- 한문희
- 촬영보조
- 조우경, 권창민
- 목소리출연
- 송정화
- 무대감독
- 홍준석, 손세리, 김동영
- 기획
- 이윤숙
- 티켓
- 노지희
- 홍보
- 박보람
- 그래픽디자인
- 워크룸
- 그린피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