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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희 <욘 포세의 ‘가을날의 꿈’을 읽는 여자>

연극과 퍼포먼스의 언저리를 더듬으며

김신록_배우
178호 2020.04.16
신촌극장에서 <욘 포세의 ‘가을날의 꿈’을 읽는 여자>를 직접 구성/연기한 ‘극단 동’의 김문희 배우가, 공연이 끝난 바로 다음 주에 같은 극장에 올라간 <위치와 운동>(필자가 구성/실연했다)을 보러 왔다. 연세대학교 앞 버스정류장으로 함께 걸어가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신촌극장에서 <욘 포세의 ‘가을날의 꿈’을 읽는 여자>를 직접 구성/연기한 ‘극단 동’의 김문희 배우가, 공연이 끝난 바로 다음 주에 같은 극장에 올라간 <위치와 운동>(필자가 구성/실연했다)을 보러 왔다. 연세대학교 앞 버스정류장으로 함께 걸어가며 짧은 대화를 나눴다.
신록
제가 선배님 공연을 두 번 봤어요, 본 공연 시작 일주일 전 내부 시연 때 한번, 마지막 공연 때 한 번. 두 공연이 설계가 거의 같은데도 완전히 다른 공연 같았거든요? 시연 때는 ‘사랑하는 남자의 부재 속에서 살아가는 여자의 하루하루’가 이미 아주 오래돼서 낡고 건조하고 빛바랜 느낌이 들었어요. 그래서 차 한 번 마시면 하루, 문 한번 열었다 닫으면 한 달, 화장 한 번 하면 1년, 10년, 자리에 한 번 누웠다 일어나면 50년, 100년이 지나는 기분이었어요. ‘아, 저 여자는 평생, 어쩌면 영원히 죽지도 않고 저렇게 살았겠구나’ 싶었어요. 인물보다는 시간이 보였다고 할까요?
그런데 마지막 공연 때는 남자의 부재에 대해 여자가 느끼는 감정이 여전히 현재 진행형인 것처럼 축축하고 진했어요. 그래서 시간보다는 오히려 인물의 상태나 감정이 더 두드러져 보였어요. 첫 공연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연습 단계에서 의도적으로 수행의 축을 옮기신 건가요?
김문희는 무대 위에 테이블, 의자, 스탠드 조명, 신문, 화분, 커피포트, 컵, 노트북, 작은 탁상 거울과 화장용 파우치, 행거 등을 가져다 놓고 한 여자가 살고 있는 작은 방을 보여준다. 소품이나 대도구는 전부 배우 본인의 방이나 극단 연습실이나 신촌극장에 원래 있는 것들을 가져왔다. 극장의 조명기나 스피커를 통해 만들어지는 연극적인 효과는 일절 없고, 필요에 따라 배우가 직접 스탠드를 켜고 끄거나 노트북으로 음악을 튼다. 극장 출입구부터 무대에서 옥상으로 열리는 문과 창문들, 그리고 화장실까지, 실제 다세대 주택의 옥탑에 지어진 신촌극장의 장소성을 별다른 연극적 설정 없이 그대로 활용한다.

여자는 방에서 할 수 있는 사소한 일상의 행동들, 화장하기, 옷 갈아입기, 차 마시기, 음악듣기, 고양이 밥 주기 등을 반복적으로 수행하는 중간 중간에 습관처럼 욘 포세의 ‘가을날의 꿈’의 부분 부분을 읊조리듯 읽는다. 대사는 말 그대로 들릴 듯 말 듯해서 관객은 이 극이 말이나 대사, 혹은 서사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을 금방 눈치 챌 수 있다. 무대 위에 있는 사람이 어떤 환영 속의 인물을 연기하지 않을 것이지만 그렇다고 100% 배우 자신을 연기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 역시 안다. 배우는 공연 소개에 ‘어떤 환영이나 환각 없이 민낯의 무대, 연극과 퍼포먼스의 구분이 없는 것을 하고 싶었다’고 썼다.
시연에서 배우는 ‘지각-정서-행동’으로 이어지는 ‘감각-운동 도식’에서 벗어나 텅 빈 행위의 연쇄들을 수행했다. 예를 들면, ‘화장하다가-책을 읽다가-차를 마시다가-고양이 밥을 주다가-다시 화장을 하는 것’은 어떤 논리적인 개연성이나 정서의 결과물로서 행동들의 연쇄가 아니고, 단절되고 나열된 텅 빈 행위들의 느슨한 결합이었다. 그 결과 무너진 감각-운동의 세계를 뚫고 ‘시간이 스스로 드러나면서’, 사건을 진전시키는 간접적 시간이 아닌 ‘절대적이고 순수한 시간’이 전면에 드러났다.1) 60분 동안 행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차이와 질적 변화는 실제보다 시간을 확장시켜 ‘영원’에 대한 감각을 주었다.

이에 반해 마지막 공연 때는 배우에게 어떤 상태와 감정이 이미 있는 채로 극이 시작되었고, 그래서인지 똑같은 행동의 연쇄가 ‘그리워서’, ‘외로워서’, ‘고독해서’ 등의 정서적인 이유에 의한 결과물로 보이면서 관객으로 하여금 시간보다는 이별 후의 상황, 고독한 여자라는 인물, 그 인물이 고독해서 취하는 행동에 더 집중하도록 만든 게 아닌가 싶었다. ‘남자가 떠나서-고독하고-그래서 음악을 듣는다’는 식의 감각-운동 도식이 작동하면서, 수평적으로 나열되었던 행위들이 사건 전후, 지각 전후의 수직적 인과로 연결되는 듯했다. 그래서인지 시연이 전시나 퍼포먼스에 가까웠다면 마지막 공연은 연극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문희
의도를 바꾼 건 아닌데 그냥 그렇게 됐던 것 같아요. 저도 그것 때문에 공연하면서 고민이 많았어요. 그런데 이번 작업은 그간 대극장에서 해왔던 공연들처럼 매번 플랜을 정확하게 수행해서 전달해야 할 바가 명확한 경우가 아니라서, 매 공연마다 되어지는 대로 좀 내버려 둬봤어요.
김문희는 극단 동에서 오랜 시간 ‘신체행동연기’라 이름붙인 연기술을 탐구해왔고, 재작년과 작년에 남산드라마센터에서 공연했던 <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은 김문희를 포함한 극단 동 배우들에 의해 극단의 연기술이 밀도 있게 구현되었다는 평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이번 공연에서 김문희는 ‘에쮸드’라 불리는 사실주의 연기의 기본 훈련법에 의존해 단순한 행동과 제스처의 연쇄로 극 전체를 구성하고 별다른 연기적 시도를 하지 않는다. 연습 초반 사석에서 ‘특별한 연기술을 구사하지 않는 것이 목표’라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김문희는 극단 밖에서 오롯이 혼자만의 시간을 보내며 그동안 극단에서 해 왔던 것을 안 해보는 것, ‘하지 않는 것’을 연습하는 중이었다.
신록
그렇군요. 저도 공연하면서 비슷한 경험을 하고 있어요. 극적으로 성취해야 하는 허구적 서사의 맥락이 중요하지 않을 때, 혹은 허구적 상황이나 관계의 전달, 극적 리듬이나 에너지 사이즈나 감정적 밀도의 구현, 극적 긴장감 조성 등이 수행의 지향점이 아닐 때, 그러니까 배우가 그려내야 하는 일종의 ‘외적인 그래프’가 선명하지 않을 때, 배우는 수행 결과의 동일성을 어떻게 보장할 수 있을까 혹은 보장해야 하는가, 이런 고민이 들어요.
문희
그러니까요. 줄거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무대도 좁고 관객하고도 너무 가까우니까 나 혼자 미리 계획했던 걸 하는 게 이상한 거예요. 지금 있는 사람들과의 반응이나 상태에 따라 흘러가는 게 더 그 순간의 진실인 것 같고. 그런 경우에는 그냥 그 감각을 따라갔어요.
텍스트가 전달하는 메시지가 중요하지 않을 때, 견해 대신 감각을, 감정(affection) 대신 정감(affect)을 전달하고자 할 때 배우는 어떤 과정을 통해 행동을 설계하고 수행해야 할까.2) 이미 계획된 플랜은 현재의 감각에 따라 얼마만큼 변이되고 새롭게 생성될 수 있을까. 우리는 어디까지 시도해볼 수 있을까.
전통적으로 연극은 허구의 상황이나 극적 환영에 기대어 있고 퍼포먼스는 현장의 관객과 퍼포머의 직접적이고 실제적인 상호작용에 더 열려 있는 것이라면, 김문희는 이번 공연을 통해 ‘연극과 퍼포먼스의 구분이 없는 것’이 무엇인지 더듬어 찾아보려 했던 것 같다. 어쩌면 매 공연이 감각적으로 많이 달랐을 것이고, 어쩌면 소위 말하는 공연의 톤 앤 매너도 일정치 않았을지 모른다. 신촌극장이 김문희라는 배우에게 작업을 제안했을 때는 연극의 만듦새보다는 배우의 탐구 과정에 지지를 보낸 것일 것이다. 김문희는 자신의 연기 인생에서 처음 시도하는, 스스로 구성하고 연기하는 1인극을 만들고 실연하면서, 그로토프스키가 말한 ‘부정법’처럼, 기술을 쌓고 반복하는 대신 ‘저항과 장애를 버리는 것’을, ‘그것을 하고 싶다’는 생각 대신 ‘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물리치는 것’을3) 연습한 것 같다.
  1. 김호영, 『영화이미지학』, 문학동네, p.452-453 참조
  2. 오길영, 『포스트미메시스 문학 이론』, 느티나무책방, p.365-366 참조
  3. 예지 크로토프스키, 『가난한 연극』, 교보문고, p.21-22 참조

[사진제공: 신촌극장 ⓒ박태준]

욘 포세의 '가을날의 꿈'을 읽는 여자 X 김문희
일자
2020.3.25.(수) ~ 3.29(일)
장소
신촌극장
구성/연기
김문희
영상/사진
박태준
진행/오퍼
정은혜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theatresinchon/posts/332948033374588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