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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Y <항구의 사랑>

잃어버린 사랑을 찾아서

장영_극작가
179호 2020.05.14
객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을 때 조성모의 ‘상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이힐 세 켤레에 운동화 한 켤레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한다. 음악을 들으며, 관객들은 과거를 현재에서 목격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객석에 자리를 잡고 가방을 내려놓을 때 조성모의 ‘상처’가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하이힐 세 켤레에 운동화 한 켤레가 무대와 객석을 구분한다. 음악을 들으며, 관객들은 과거를 현재에서 목격할 준비를 마치게 된다. 2000년대 초반을 사는 소녀들이 2020년의 극장에 등장한다. 과거가 현재에서 부활하는 순간이 도래한다. 나무 바닥에 가지런히 벗어둔 신발 네 켤레, 이곳은 점점 모래사장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연극 속에서 소녀들은 항구에 산다.
소설이 연극이 될 때, 그리고 연극만이 할 수 있는 것
연극 <항구의 사랑>은 소설『항구의 사랑』을 강윤지 연출이 각색하고 무대화한 공연이다. 소설『항구의 사랑』의 세계는 준희(백혜경 역)가 과거의 경험들을 차분하게 재해석해나가는 목소리로 채워진다. 즉 소설 속 세계는 1인칭으로 해석되어 과거형으로 쓰인다. 연극 <항구의 사랑>은 김세희 소설가의 ‘기억하려는 시도, 되살리려는 시도, 말해 보려는 시도, 더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시도’(소설『항구의 사랑』 작가의 말 中)를 연극만이 할 수 있는 방식으로 보충해나간다. 소설에서는 화자 준희가 현재의 시점에서 과거의 경험을 파고들어 재해석하는 방식으로 ‘공정하게 바라보기’를 시도한다면, 연극에서는 원작의 ‘과거형’ 문장을 ‘현재형’으로 각색하여 과거를 현재에 부활시키고, 인물들과 관객이 이를 함께 목격하게 함으로써 ‘공정하게 바라보기’를 시도한다.
소설의 세계를 무대 위로 옮겨오는 실험에서 설레는 일들이 발생한다. 연극화를 통해 ‘2000년대 초반 목포의 여자 고등학교’라는 원작의 시공간적 분위기는 관객들의 몸에 감각적으로 옮겨 붙는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음악들과 항구의 소리가 담긴 음향의 힘이 유달리 크다는 인상을 받았다. 연극화를 통해 준희뿐 아니라 인희, 민선(강서희 역), 규인(박소진 역)도 몸과 목소리를 획득한다. 엄밀하게 따지자면 관객들은 준희의 기억을 보는 것이지만, 현실에서 생생히 움직이는 다른 인물들의 목소리와 존재감이 준희의 해석에 지속적으로 개입하는 것을 느낀다. 이 기묘한 개입이 ‘공정하게 바라보기’의 연극적 시도를 가능케 한다.
‘인희’를 공정하게 바라보기
준희는 ‘남자를 흉내 내는’ 것처럼 느껴지는 인희를 한심해하고, 부끄러워하고, 미워한다. 너무 선명한 감정을 드러내 위험하게 느껴지는 인희, 과거의 인희를 계속 무대 위로 불러와 공정하게 바라보려는 시도가 이 극을 관통하는 뼈대가 된다. 원작소설과는 달리 연극은 인희의 갑작스러운 방문 장면으로 시작된다. 2007년 6월. 대학생이 된 준희 앞에 갑자기 인희가 나타난다. “나 지금 너희 학교 근처야!” 준희는 인희와 아주 멀리 떨어져 앉는 것으로 연출된다. 인희는 준희가 단절하고 뛰어 넘어온 과거를 다시 현재로 불러오려 하고, 준희는 계속 회피하고 거부한다. 결국 인희는 “우리 고등학교 때 말이야, 그거 다 뭐였을까?”라는 질문을 던지고 떠난다. 인희가 첫 장면에서 던진 이 질문은 관객들에게도 고스란히 넘겨진다. 관객들은 ‘그게 다 뭐였는지’를 생각하면서, 현재에서 부활한 과거를 바라보게 된다.
초등학교 6학년, 피구에서 계속 공을 맞던 준희에게 인희가 외친 말은 “똑바로 봐!”였다. 인희에게서 보호받는 느낌을 받던 준희는, 신체검사 날 인희의 가슴을 보고 도망친다. 이후 준희는 이반이라고 분류되고 여자와 사귄다는 인희를 피한다. 준희의 친구 규인은 칼머리에 피어싱, 펑퍼짐한 교복 치마 밑에 체육복 바지를 입은 인희를 가리켜 “저런 애들은 ’진짜‘가 아니야”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진짜’는 누구일까?
원작소설에서 어른이 된 준희는 당시 유행했던 ‘동성애’와 ‘팬픽’이 연결되어 연구된다는 것을 알고 놀라워한다. 연구작업 안에서 소녀들은 ‘팬픽이반’이라는 용어로 불리고 있다. 하지만 소설 속에서 준희는 “내 안에서 그 두 범주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지 않았다”고 말한다. (김세희,『항구의 사랑』, 35~36쪽) 유행처럼 동성애 팬픽을 읽었기 때문에, 소녀들이 동성애를 시도한 것이라는 이 가정은 마치 ‘그땐 다 미쳤었어’라는 준희의 발언과 유사한 맥락일지도 모른다. 소설과 연극 모두에서 이러한 시기를 언급하면서도, 전복을 가능하게 하는 지점들을 포착할 수 있었다. 유행처럼 ‘팬픽’을 읽고 ‘이반’이 되는 시기가 지났어도, 누군가는 계속 여자와 사귄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짧은 머리를 하고, 힙합 바지에 커다란 워커를 신고 나타나는 인희에 대한 묘사가 발화된다. 그러니까 ‘가짜’를 구분하는 일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초등학교 피구 시간에도, ‘팬픽이반’으로 불리는 시간에도, 그다음에도 인희는 계속 인희였다. 마침내 인희를 공정하게 바라보게 되면, 인희는 ‘남자를 흉내내는’ 가짜가 아니라, ‘인희처럼’ 입고 ‘인희처럼’ 행동하던 사람으로 기억될 수 있다. 그리고 준희를 오래 좋아한 ‘진짜’ 마음을 볼 수 있다.
고3이 된 준희가 인희와 키스한 다음, 인희를 남겨두고 도망치는 장면에서 이 연극은 달리는 준희뿐 아니라 남겨진 인희를 함께 보여준다. 인희는 마치 큰 잘못을 저지른 사람처럼, 그 자리에 그대로 남겨져 있다. 언제나 선명하고 솔직하게 감정을 발화하던 인희가 어떤 얼굴로 아파하고 있는지를, 우리는 연극을 통해 공정하게 목격하게 된다.
이 연극에서의 인희는 ‘항구의 소리’와 함께 육박해오는 ‘과거’이자, 준희가 ‘퀴어’로서 느꼈던 선명한 감각을 소환하는 ‘몸’이자, 묻어버린 ‘감정’ 그 자체처럼 느껴진다. 그 감정은 민선 선배에 대한 감정이면서, 인희에 대한 부정과 매혹의 감정일 수도 있다. 다만 그 감정들은 인희가 현실로 육박해오기 전까지 재해석되지 않았다.
마침내 연극에서만 볼 수 있는 마지막 장면에서, 준희는 다시 들려오는 항구의 소리와 함께 인희에게 보내는 편지를 쓴다. 준희는 인희에게 ‘너처럼 살고 싶지만, 네가 되고 싶지 않았’음을 말한다. 그리고 “나 민선 선배를 사랑했어” 라는 고백이 이어진다. 준희가 인희를 공정하게 바라보기 시작할 때, “나 너를 기억해. 이제 너를 너로 기억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준희는 민선 선배와의 역사를 사랑의 역사로 마침내 수용하게 된다.
우리가 알아, 우리가 봤어
퇴장이 없는 대신, 배우들은 자신이 등장하지 않는 장면에서 사건 밖의 목격자로서 무대 위에 노출되어 있다. 내 자리에서는 민선 역할의 강서희 배우가 주로 보였는데, 민선이라는 캐릭터로서 존재하고 반응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없었던 곳에 그녀가 존재한다는 것, 결코 알 수 없을 준희의 마음을 관객과 함께 지켜본다는 것, 때로는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는 것. 이것은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기적의 순간이었고, 큰 위안으로 다가왔다. 한편 준희를 제외한 세 명의 배우가 준희의 친척인 상미나 (준희의) 대학 선배들의 대사를 번갈아 가며 읽을 때, 같은 몸을 가진 이 인물들이 언제나 ‘준희’의 역사를 함께 살았던 것 같은 다정한 기분도 느끼게 되었다.
준희와 절교한 다음에도, 관객과 함께 꾸준히 준희를 지켜보고 있었던 규인은 인희에게서 시작되어 준희에게로 옮겨 온, ‘그거 다 뭐였을까?’라는 질문에 원작에는 없는 대답을 해낸다. ‘아무것도 아닌 거 아니었던’ “그 시절, 그때, 네 마음. 내가 알아 내가 봤어.” 규인의 이 또렷한 말은 그들의 모든 시절을 함께 목격한 관객으로서 오롯이 동의할 수 있는 말이었다. 우리는 그들의 세계에 있었고, 그들과 함께 보았다. 그게 다 뭐였냐면, 그건 다 사랑이었다. 우리는 항구에서 사랑을 배웠다. 항구의 사랑은 아름다웠다.
#참고한 글들
김세희,『항구의 사랑』, 민음사, 2019
모리스 블랑쇼, 『도래할 책』, 그린비, 2011
정우숙, 「소설의 연극화에 나타난 공연성 연구를 위한 시론 : 『한씨연대기』와 『슬픔의 노래』를 중심으로 본 한국현대연극의 경우」, 『한국연극학』16 (2001) : 65-97.

[사진 제공: 극단Y ⓒ 이미지 작업장_박태양]

항구의 사랑
일자
2020.04.16.(목) ~ 04.25.(토)
장소
신촌극장
원작
김세희
각색/연출
강윤지
출연
강서희, 강다현, 박소진, 백혜경
조명디자이너
홍유진
음향디자이너
목소
오퍼레이터
이수림
사진
박태양
그림
강예지
제작
극단Y
관련정보
www.facebook.com/theatresinchon/posts/3383405508353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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