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7 <어슬렁>
우리가 비로소 취약해질 때
장영_극작가
180호
2020.06.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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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갑작스러운 전염병의 시대,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경계하는 동물들처럼 타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날들. 감염자인지도 모르는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타인과 자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얼굴을 감추고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끝을 믿어보려 하지만, 서서히 적응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아주 이상하...
이 갑작스러운 전염병의 시대, 마스크를 벗지 않은 채 경계하는 동물들처럼 타인의 눈을 바라보고 있는 날들. 감염자인지도 모르는 자신 혹은 타인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타인과 자신을 해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해 얼굴을 감추고 긴장을 유지하고 있다. 그 끝을 믿어보려 하지만, 서서히 적응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아주 이상하고 막막한 날들이다.
우리처럼 이상하고 막막한 시대를 사는 그들, 자연과 영미
처음 <어슬렁>을 만난 건 아주 흐린 날이었다. 극장 안에는 문을 열지 말라는 건물주의 메시지가 붙어있었다. 연극 속에서 이 공간은 ‘신촌의 건물 4층에 있는 조소 교실’로 설정되어 있다. 실제 신촌극장의 공간적 특성을 반영해 쓰인 희곡이었기 때문에, (‘환상적인 순간’을 보여주는 장면들이 많은 극임에도) 이 연극은 자꾸만 마치 현실인 것처럼 마음으로 들어온다. 아주 고요한 가운데 마스크를 쓴 ‘이자연’(배우 옥자연)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자연은 곧장 테이블 위에 눕고, 4층까지 올라와 조금 피곤해진 사람처럼 조용히 쉰다. 이 첫 장면으로부터 연극 속 자연이 관객과 같은 날씨를 공유하고 있다는 확신, 연극 속 시간이 실제의 시간과 동시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성을 바꾸었지만, 극에서 배우들의 실제 이름을 드러낸다는 점까지도 환상과 현실의 경계를 쉽게 허물고 있다. 이들이 현실의 사람들, 이 이상하고 막막한 시대를 함께 사는 사람들이라 느껴졌기 때문에, 이 극은 먼 ‘이야기’로만 느껴지지 않았다.

예의 바름과 지나침 사이, 자꾸만 폭발하는 사랑의 주체들
휴식을 마친 자연이 인체 두상 소조 작품을 테이블로 옮기고 나서, 점토를 자른다. 잘린 점토가 낙하하는 순간, 마스크를 쓴 ‘서영미’(배우 하영미)가 들어선다. 예고 없는 기적의 순간, 두 사람은 코로나로 인해 클래스가 취소된 줄 모르는 상황에서 각자 그곳에 온다. 먼저 인사를 건네는 영미, 결국 자연도 인사를 한다. 예의 바른 언어를 쓰는 사랑의 주체들이, 두려운 침묵 속에 자신을 조금씩 드러내기 시작한다.
사랑하는 사람은 … 정념의 혼란을 (그 소용돌이를) 어느 정도로 감추어야 할지를 자문한다. 그의 욕망, 절망, 간단히 말해 그의 지나침을. -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70p
마스크를 쓴 영미와 마스크를 쓰지 않은 자연, 마스크를 쓰지 않느냐고 묻는 영미의 질문에 방어적으로 대답하는 자연. 코로나에 걸리지 않은 두 사람은, 결국 무대에서 마스크를 벗고 대화를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이름에 대해, 장묘재단의 직원인 자연과 이 건물의 건물주였던 ‘동수저’ 영미의 정체에 대해 알게 된다. 하지만 사실 이들의 대화는 순조롭지 않다. 대화는 자주 멈추고, 어긋난다. 무기가 없는 두 손을 자주 들어 보이듯, 자신의 말을 자주 철회하고 사과한다. 그동안 그들은 계속 소조를 하고 있다. 조심스럽고 계획적인 자연과 달리, 영미는 종종 엄청난 영감을 받는 것처럼 미친 듯이 움직인다. (그러면 자연이 웃는다). 긴 침묵의 시간이 찾아오면, 그들은 말을 하고 있지는 않으나 몸으로 서로의 존재에 반응한다. 두 배우는 무대 위에서 그 긴 침묵을 오롯이 다 견뎌낸다. 그리고 관객이 예상치 못한 몇몇 순간, 두 인물은 지나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발작적인 움직임으로 폭발한다.
내가 내 언어로 감추는 것을 몸은 말해버린다. … 내 몸은 고집 센 아이이며, 내 언어는 예의 바른 어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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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일련의 긴 언술적인 긴장(‘나의 예의 바름이’)이 갑자기 전반적인 발작 증세로 폭발할 수 있다. - 『사랑의 단상』, 74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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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여 일련의 긴 언술적인 긴장(‘나의 예의 바름이’)이 갑자기 전반적인 발작 증세로 폭발할 수 있다. - 『사랑의 단상』, 74p
자연이 에스뻬라레(Esperare)라는 노래를 틀면, 한국어로 번역된 구애의 노랫말이 무대의 벽에 이미지로 드러난다. 오직 영미와 자연만이 관객이 듣지 못하는 이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영미의 몸은 위로 떠 오르고, 가사는 자연의 당혹스러운 얼굴로 옮겨붙어 빠르게 스친다. 자연은 이 구애의 텍스트와 함께 폭발한다. 한편 자연에게 ‘멋지다’고 말하던 순간의 영미는 얼굴과 머리를 감싸 쥐고 발작적인 움직임을 보인다. 영미의 ‘지나친’ 마음이 결국 첫 사랑니의 통증과 함께 상징적으로 터져 나온다. 이들은 자신이 사랑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보여주고 있는, 역설적인 사랑의 주체들이다.

우리가 비로소 취약해질 때, 우리는 함께 코코모로 갈 수 있다
이 극의 대화가 갖는 미덕은, 그들이 점점 예의 바름의 가면을 벗고 서로에게 계속 취약성을 드러낸다는 점 때문이다. 나이가 많고 몸이 아픈 엄마와 함께 사는 영미, 그리고 장묘재단에서 일을 하는 자연. 두 사람은 아픈 사람과 죽은 사람들에게 연결되어 있다. 인간이 별수 없이 취약하다는 것은, 사랑을 시작하는 일을 두렵게 만든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을 수밖에 없는 생의 진실을 되새기게 하는 세상이지만, 다행히 극 중 영미에게는 인물들이 ‘사랑에 빠지도록 내버려 두는’ 극작가 친구가 있다. 그래서 생에 첫 사랑니가 난 영미는 ‘충치일지도 모른다’라는 자연의 말에, “전 사랑니 맞아요.”라고 외칠 수 있고, 자연에게도 단 하나의 사랑니가 희망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정전된 공간에서 은밀하고 내밀한 치과 치료와 사랑니에 관한 대화를 주고받으며, 그들은 지나친 마음을 드러내고, 비로소 취약해지고, 서로의 취약함을 받아들이며 연결되기 시작한다.
극에서 영미는 The Beach Boys의 ‘kokomo’ 라는 노래에 맞춰 춤춘다. ‘kokomo’와 함께 영미가 먼저 바다를 본다. 영미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정말로 그녀가 지금 바다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미가 바다를 보면, 자연도 바다를 본다. 두 사람은 같은 색의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시기를 사는 관객에게는 참 드물고, 귀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설유진 연출이 자신의 극에서 보여주는 구애의 장면들, 다른 여성 인물에게 사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여성 인물들의 존재는 상투적인 이 세계를 아예 새로운 곳으로 느껴지게 한다.
극에서 영미는 The Beach Boys의 ‘kokomo’ 라는 노래에 맞춰 춤춘다. ‘kokomo’와 함께 영미가 먼저 바다를 본다. 영미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정말로 그녀가 지금 바다를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영미가 바다를 보면, 자연도 바다를 본다. 두 사람은 같은 색의 바다를 보고 있는 것만 같다. 타인과 연결될 수 없는 시기를 사는 관객에게는 참 드물고, 귀하고,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설유진 연출이 자신의 극에서 보여주는 구애의 장면들, 다른 여성 인물에게 사랑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는 여성 인물들의 존재는 상투적인 이 세계를 아예 새로운 곳으로 느껴지게 한다.

극의 마지막 장, 두 사람은 (건물주인 영미 덕분에) 옥상 문을 열고 나간다. 현실과 환상의 소리가 겹친다. 정전으로 인해 어두워진 공간에 있던 두 사람이, 햇빛이 있는 바깥으로 나가면 ‘실제로 두 사람이 나눴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는’ 녹음된 대화가 들려온다. “넌 어슬렁거리면서 내게로 와” 이때 배우들은 아주 조용히 신촌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다. 극의 초반, 자연은 너무나 낯을 가리는 나머지 거의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인다. 그리고 이 극이 끝날 때쯤 자연은 정말로 환히 웃는다. 이 극은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얼마나 뒤바꿔놓을 수 있는지를 증명한다. 두 사람이 이전의 삶을 끝마치고 다음의 삶을 시작하게 만든 이 독특한 대화를 들으러, 세 번이나 극장에 갔다. 그때마다 가면을 쓴 나의 삶으로부터 휴가를 떠날 용기를 얻어 오고는 했다. 그러니 그들은 아마도 코코모로 갔을 것이다. 그래서 이 연극이 끝난 뒤에도 나는 불 꺼진 내 방에서 바다에 있는 그들을 볼 수 있다. 벌써 그들이 그립다.
#참고한 글들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東文選, 2004.
브레네 브라운, 안진이 옮김, 『마음가면』, ㈜도서출판 길벗, 2016
롤랑 바르트, 김희영 옮김, 『사랑의 단상』, 東文選, 2004.
브레네 브라운, 안진이 옮김, 『마음가면』, ㈜도서출판 길벗, 2016
[사진 제공:907 ⓒ박태준]
어슬렁
- 일자
- 2020.05.14.(목) ~ 05.22.(금)
- 장소
- 신촌극장
- 출연
- 옥자연, 하영미
- 극작/연출
- 설유진
- 안무
- 하영미
- 음향/영상
- 목소
- 조명
- 신동선
- 의상
- 강기정
- 무대감독
- 박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