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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이상 레지던스연구 <방랑의 기술記述>

잃어버린 방랑을 찾아서

이재이
182호 2020.07.09
방랑을 기술記述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적절할까. 태초의 방랑자 카인에게 신이 허락한 표식, 끝없는 방랑의 자유와 안위를 보장한 그 표지에 관해 묻는다면, 목숨을 건 열두 번의 모험 끝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 시작과 끝의 결과 값이 같은 방랑-운동의 목적과 의미에 관해 묻는다면&...
방랑을 기술記述할 수 있을까. 만약 그럴 수 있다면, 어떤 형식으로 기술하는 것이 적절할까. 태초의 방랑자 카인에게 신이 허락한 표식, 끝없는 방랑의 자유와 안위를 보장한 그 표지에 관해 묻는다면, 목숨을 건 열두 번의 모험 끝에 간신히 집으로 돌아온 오디세우스에게 시작과 끝의 결과 값이 같은 방랑-운동의 목적과 의미에 관해 묻는다면, 과연 어떤 대답이 돌아올까. 방랑에 적합한 형식과 내용이 있을까. 무엇보다, 방랑은 왜 기술되어야 할까.
목표지점을 정하고, 최단거리의 이동경로를 따라 움직인다. 그 지점에 이르면 좀 더 높은 또 다른 목표지점을 설정하고 또 다시 가장 빠른 경로로 이동한다. 일반적인 삶은 그렇다. 효율적인 경제를 따르는 시공의 축과 상승을 지향하는 안정적인 직선.
그러나 방랑은 다르다. 그것은 목표지점 없이 움직이거나 정지하며, 낙서하듯 이어지는 산발적인 이동경로는 추적하기도 어렵다. 지금의 좌표를 회의하고 - 나는 어떻게 이곳에 왔는가 - 우연의 산물로서가 아닌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를 현재의 좌표에 기입하고 - 나는 왜 이곳에 있는가 - 의미에 따라 변화하는 시공의 상상적 축들을 가늠하면서 - 나는 어디로 가는가 - 방랑은 주저하고 망설인다. 부유하고 부딪친다. 방랑은, 최종 의미가 주어지는 종착지, 철학의 세계에 도달하지 못한 채 서성이고 웅성이는 끝에서 두 번째 세계, 크라카우어가 역사의 세계라고 일컫는 바로 그 ‘대기실’ 안에 있다.
운동하는 원점, 방랑
<방랑의 기술>은 서로 다른 예술 영역에서 활동하는 다섯 작가(강하늘, 손옥주, 신승렬, 이소영, 전강희)가 반년간 홀로 또 함께 방랑을 수행하며 그것의 흔적을 공간 안에 기술한 실험적인 프로젝트다. 출발지점에는 이소영 작가(안무가·무용수)의 ‘일렁임’이 위치한다. 일렁임은 일상적 몸짓 속에 잠재된 춤의 내적 움직임으로, 춤 이전과 이후에 동시에-연속적으로 발생한다. 작가는 자신의 몸-텍스트에 새겨진 춤의 근원을 거슬러 올라가며 방랑한다. 일렁임이 발생하는 순간들/지점들을 기술하고, 일렁임이 이는 자신의 몸짓을 선線의 기호로 그려나간다. 물질적인 일렁임들은 추상적인 선에 의해 비워지고, 일렁이는 작가의 몸은 스스로에 의해 대상화되어 소거된다.
손옥주 작가(공연학자)는 현재의 자아가 걸쳐져 있는 물리적/상상적/위상학적 지형에 대해 탐구한다. 큐알코드 에세이로 기술되는 그의 방랑은 “내가 나인 채로, 내가 아닌 채로” 말하는 균열의 지점에서 이루어진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숱한 ‘나’들이 생성되고 소멸한 지점들로의, 길고 깊은 여정. “낯선 영혼이 내 피와 살에 스며들어 내 안에 고착되어 있던 나를 내 바깥으로 빼내어주는 동안, 나는 그 낯선 영혼에게 내 몸의 일부를 내어주어야만 한다. 이제 내 안에는 더 이상 나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자아의 공고함이 부서지는 이러한 균열의 지점들에서, 전강희 작가(드라마터그)는 자기동일성을 끊임없이 지연시키는 자기-차이의 계기들을 발견해낸다. 그는 노마드적인 걷기를 통해 방랑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처음엔 일상을 채우는 소소한 감각들을 활자로 공유하기 위해서였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걷기는 타인의 삶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되었다고, 그는 말한다. “내가 태어난 장소, 부모님 혹은 나의 지역은 내가 선택한 것이 아닌, 운명에 내던져진 것이었지만 결국 인간은 의지를 갖고 자신이 있어야 될 곳을 찾아가잖아요.” 뿌리를 내리는 대신 경계선을 넘는 이들, 돌아오더라도 더 멀리 가고자 하는 이들, 강하늘 작가(배우·사운드디자이너)가 아이슬란드에서부터 ‘home’을 향해 방랑하는 타인들의 삶을 채집하는 동안 신승렬 작가(무대미술가)는 유목민들의 이동, 그 근원의 역동을 추적한다. 수단인 동시에 목적이며 또한 숙명이기도 한 삶으로서의 이동. 지속적인 변화를 통해 항상성을 유지하는 자연처럼, 그들은 거주하기 위해 이동하고, 이동하기 위해 거주하며 날마다 다른 동일한 삶을 지속해나간다.
방랑을 지속하는 힘, 기술記述
<방랑의 기술> 연구가 한창 진행되던 지난봄, ‘우란5경’에서 다섯 작가와 함께 표현 매체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다. 작가들은 각자의 방랑-질료를 어떤 형태로 물질화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다른 감각을 지향하는 각자의 질료들을 2차원의 종이 지면이라는 지정된 형식 내에 어떻게 담아낼 수 있는지, 만져지는 방랑, 접촉함으로써 접속되는 타인의 방랑은 어떻게 만들어내야 하는지.
그리고 프로젝트 발표일에 초대받은 한 명의 방랑자로 그곳을 다시 방문했다. 에세이, 일기, 인터뷰, 에피소드, 드로잉, 사진, 도면, 망점, 이미지, 영상, 인용구, 번역문…… 매체와 언어가 다른 다섯 작가의 방랑이 섞이고 엮인 낱장의 종이 텍스트들. 방랑자들이 스스로 선택한 경로에 따라 움직일 수 있도록 방랑의 동선에 최적화된 3차원 공간의 조형. 정련된 그러나 미완의 형태로 타인의 개입을 기다리는 기술記述의 공백.
우란5경으로 진입한 방랑자들에게는 50분간 홀로 공간을 배회할 자유가 주어진다. “당신은 지금 어느 길에 있나요?”, “누구와 함께 있나요?”, “방랑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쏟아지는 질문 세례를 받으며, 그들은 공간 속 공간들의 틈과 겹을 이리저리 거닌다. 그리고 낱장의 방랑을 하나씩 모으는 수집가로, 방랑의 순서와 배열을 결정하는 편집자로, 같거나 다른 기억을 소환하여 기술의 공백을 완성하는 창작자로, 그리하여 방랑을 일구어낼 방랑의 주체로, 공간의 바깥으로 나선다.
어쩌면 방랑은, 자신의 의지로 선택한 내 존재의 상상적 기원, 있으면서 없고 없으므로 있어야 할 미지의 공간으로의 끝없는 여정인지도 모른다. 의미화 되지 못하는 그 공간을 향해 뻗은 몸짓, 열망, 이동은 온전히 기술할 수 없으나, 기술의 불가능성을 감내하는 불완전한 말하기와 구멍 난 글쓰기는 방랑을 지속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 어느 특별한 순간에 계시를 받듯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일상적 삶의 도처에 박힌 미세한 결절 지점들에서 넘어지면서, 미끄러지듯 시작되는 것이라면, 그것이 방랑이라면, 크고 작은 결절 지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기술의 힘이다. 방랑의 기술은 또한 기술의 방랑이기도 하다.

[사진 제공: 우란문화재단]

방랑의 기술 記述
일자
2020.06.11.(목) ~ 06.13.(토)
장소
우란문화재단 우란5경
구성/연출
강하늘, 손옥주, 신승렬, 이소영, 전강희
그래픽디자인
류가은
오브제제작
애픽(APIC)
프로듀서
박예슬
프로젝트매니저
한주연
기술감독
우준상
PR
허지원
하우스매니저
안수현
그래픽디자인
VISTADIA
사진
STUDIO SIM
영상
뱅필름
관련정보
http://www.wooranfdn.org/program/yisang_view.jsp?idx=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