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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 해인 X 프로젝트타브(TAV) <문밖에서>

이모들의 사랑 얘기 들으며

윤명숙
185호 2020.08.20
그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면 하얀 토끼풀꽃이 생각나면서, 청아한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떠오를 것이다. “생~각 나~안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1970년대 포크 가수 은희가 불러 대히트친 ‘꽃반지 끼고’는 숙자 이모에게 아름다운 추억이자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노래이다. 숙자 이모는 기지촌 생활 중에 만났던 ‘영철...
그 노래의 반주가 흘러나오면 하얀 토끼풀꽃이 생각나면서, 청아한 여자 가수의 목소리가 떠오를 것이다. “생~각 나~안다 그~ 오솔길, 그대가 만들어준 꽃반지 끼고...”. 1970년대 포크 가수 은희가 불러 대히트친 ‘꽃반지 끼고’는 숙자 이모에게 아름다운 추억이자 이루지 못한 슬픈 사랑 노래이다. 숙자 이모는 기지촌 생활 중에 만났던 ‘영철’과의 추억에 잠기며 노래를 부르다 눈시울을 적시며 그만 목이 멘다. 은희만큼이나 청아한 목소리로 노래를 부르다 고개 숙인 ‘숙자 이모’ 대신 무대에서는 합창이 이어진다. “다정히 손잡고 거닐던 오솔길이 이제는 가버린 아름다운 추억, 루루루루 루루루루 루루루루.” 이 슬프고 애잔한 노래에 실린 숙자 이모의 사랑 이야기에 무대에서도 지켜보는 관객도 마음 아파하며 공감한다.
이 장면을 보며 나는 문득 용수 할매를 떠올렸다. 그녀는 일본군‘위안부’ 피해 생존자이다. 그녀 역시 대만 신죽 위안소에서 만나 자신에게 도시코라 이름 붙이고 출격 전날 노래를 가르쳐준 ‘독코타이(特攻隊)’ 군인에게 첫사랑의 감정을 느꼈다고 했다. 이 이야기는 90년대 중반쯤이려나, 이용수 선생이 참석했던 증언집회 뒤풀이 자리에서 나는 처음 들었다. 그 자리는 화기애애하고 유쾌했다. 거기에서 그녀가 독코타이가 가르쳐준 군가조의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았다. 아직 인생의 쓴맛을 모르던 젊은 시절의 나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의 입을 통해 불리우는 일본 군가조의 노래가 듣기 싫었다. 이후 이용수 선생이 부르는 그 노래를 어딘가의 뒤풀이에서 몇 번 더 들었는데, 언젠가부터 그 노래도, 그녀의 첫사랑 얘기도 잊고 있었다. 그 사이 30년이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이용수 선생의 두 번의 기자회견(5/7, 5.25) 때문에 한 무리의 네티즌들에 의해 “영혼결혼식”이 소환되어 이용수 선생이 조롱과 악성 댓글에 시달렸던 것을 본 직후라서 무대에서의 이 장면은 내게 무척 경이로운 경험이었다.

어떻게 이렇게 자연스럽게 말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걸까. <문밖에서>에서 보여주는 숙자 이모와 미군과의 사랑 이야기는 어째서 미군‘위안부’의 피해자성을 들먹여지는 일 없이, 누구에게든 있을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위화감 없이 받아들여질 수 있었을까?

숙자 이모의 사랑 이야기가 처음 연극무대에 등장한 것은 2016년 10월 평택에서 상연된 <그대 있는 곳까지>이다. ‘미군‘위안부’ 할머니들의 쥬크박스 뮤지컬’이라는 부제가 붙은 이 공연은 2017년 서울여성플라자에서 재공연을 했고 나는 이때 숙자 이모의 사랑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다음 해에 숙자 이모들이 출연하는 무대가 뮤지컬에서 연극으로 장르가 바뀌면서 <문밖에서>가 상연되는데, 이때까지만 해도 연극의 중점은 미군‘위안부’ 피해 여성들의 트라우마 치유가 목적이었다.
‘우리를 이용하러 왔냐’고 날카롭게 반응하던 이모들이 치유의 터널을 지나온 흔적은 이번 <문밖에서>에 여러 장면으로 나타난다. 연출가의 설명에 따르면 이모들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기지촌 생활에 대해서 ‘이건 이런 게 아니야’ 라면서 먼저 설명해 주거나 ‘뭐든 다 써도 돼’라고 얘기했다고 한다. 숙자 이모는 관객과의 대화에서 예전에는 가슴에 돌덩이가 무겁게 있었는데 연극을 하면서 돌덩이가 잘게 부서지고 흩어져 가벼워졌다고 말했다. 경희 이모는 “이 나이에 연극하는 것이 행복이고 출세죠, 생전에 이런 기회가 있을까 싶었는데 늦게 행복을 누리고 있”다고 했다.

이러한 치유의 과정과 시간이 있었기에 이번 <문밖에서>는 기지촌에 대한 예민한 사안들을 다룰 수 있지 않았을까. 예를 들어 미군 전용 클럽에 오갈데 없다는 고향 후배를 소개한 이야기, 1992년 1월 기지촌 여성의 자치회인 ‘국화회’ 창립총회 당일 스케치, ‘위안부’라는 말이 싫다는 여성들의 의견을 받아 꽃 이름으로 모임 이름이 붙게 되었다는 이야기, 몽키하우스라고 불리던 낙검자 수용소 이야기 등. 다만 이러한 이야기가 무겁게 연극을 구성하지는 않았다. 이양구 연출가는 “기지촌 여성의 삶을 보여주기(재현) 하려고 했다기보다 당사자가 꼭 사람들 앞에서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를 중심으로 구성하는 한편 그런 얘기들이 그대로 받아들여지기 힘든 사회적 맥락을 고려”해서 무대 연출이나 구성 흐름을 통해 별도 장면처럼 만들었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문밖에서>의 2020년 버전에는 연출가와 배우, 숙자 이모, 향자 이모, 경희 이모와 조시현, 최설화 등 연극배우들 사이에 오랜 시간 축적된 관계가 있었고, 그 이해와 신뢰 덕에 예민한 장면도 함께 그려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이러한 이해와 신뢰는 <문밖에서>를 보러온 관객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고, 그래서 그들은 숙자 이모의 사랑 이야기에 피해자성을 소환하지 않을 수 있었고, 젊은 날 있을 수 있는 사랑 이야기로 들을 수 있었던 거라고. 숙자 이모를 숙자 이모 그대로, 향자 이모를 향자 이모 그대로, 경희 이모를 경희 이모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누구의 인생이든 아름다운 순간들과 후회스러운 순간, 슬프거나 억울한 순간, 기쁘고 행복한 순간들로 이루어진다는, 이 보편적인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진 건 연출의 힘이기도 했을 것이다. 동시에 이러한 태도는 일본군‘위안부’ 피해자에게도 필요하다. 그들을 있는 그대로의 삶으로 받아들이는 것, 이해하는 것, 스테레오 타입의 피해자성을 소환할 게 아니라 다양한 피해자를 보면서 피해자성의 폭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공연을 보고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감상이다.

이양구 연출가와는 오래전 '위안부' 문제를 매개로 알게 되었다. 언젠가 그가 쓰고 연출할 연극에서 일본군‘위안부’를 어떻게 그려낼지 궁금하고 또 기대된다. 그는 ‘위안부’ 문제는 알면 알수록 어렵다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지도 모르지만, 나이를 먹어가는 연출가가 만든 연극을 꼭 보고 싶다는 희망사항이 있다.

[사진 제공: 극단 해인·프로젝트타브(TAV) ⓒ이강물]

문밖에서
일자
2020.07.25. ~ 2020.08.01/dd>
장소
두산아트센터 스페이스111
출연
김숙자, 김경희, 권향자, 김지원, 김시영, 한철훈, 조시현, 최설화, 박인영, 이나리, 노유나
작·연출
이양구
프로듀서
김진이
무대디자인
조경훈
조명디자인
고귀경
음향디자인
목소
영상디자인
이재환
의상디자인
김미나
분장디자인
장경숙
그래픽디자인
김유나
조연출
예일
무대감독
방태현
홍보
한민주
제작
극단 해인, 프로젝트 타브(TAV)
관련정보
https://www.doosanartcenter.com/ko/performance/143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