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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희와진아가 <한없이 멜랑꼴리>

한없이 멜랑꼴리해도 되는 9시간

장영_극작가
187호 2020.09.24
선희와진아가’는 퍼포먼스 <한없이 멜랑꼴리>를 ‘일요일 오후부터 밤까지 함께 녹아내리며 다소 생경하고 이상한, 그러나 자신 안에 있었던 멜랑꼴리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와 ‘한없이 멜랑꼴리’라는 제목. 코로나 블루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 시대, 그리고 서로와 연결되기 위해 노트북을 켤 수밖에 없는 이 시대와 가장 닿아있는 공연이라 생각했다.
‘선희와진아가’는 퍼포먼스 <한없이 멜랑꼴리>를 ‘일요일 오후부터 밤까지 함께 녹아내리며 다소 생경하고 이상한, 그러나 자신 안에 있었던 멜랑꼴리를 들여다보는 작업’이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온라인에서 실시간으로 진행되는 퍼포먼스와 ‘한없이 멜랑꼴리’라는 제목. 코로나 블루로 많은 이들이 힘겨워하는 시대, 그리고 서로와 연결되기 위해 노트북을 켤 수밖에 없는 이 시대와 가장 닿아있는 공연이라 생각했다. 연극이 취소되었다는 문자를 연달아 받던 나날에, 이 온라인 퍼포먼스를 만났다. 미래에 대한 불안과 부정적 감정들을 부단히 억누르던 시기였고, 매일 더 긍정적인 생각과 함께 비현실적인 낙관도 해보려던 때였다.
하지만 비현실적인 낙관은 아주 작은 계기로도 쉽게 무너지기 때문에, ‘자신 안에 있었던 멜랑꼴리를 들여다보는’ 퍼포먼스를 관객으로서 마주한다는 게 겁이 나기도 했다. 막막하고 해결되지 않는 나의 어둠 속에서, 허구의 층위 없이, 타인이 꺼낸 내밀한 어둠을 마주하는 예술 경험은 우리에게 무엇을 남기게 될까?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그러다 관객들에게 ‘마음을 열고’ 접속하기를 조심스레 요청하는 퍼포머들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오래 웅크려있던 마음을 열고, 용기를 내 유튜브를 켰다.
<녹는점> 공연 장면
<녹는점> 공연 장면
먼저 <녹는점>(오후 12:00-1:00)의 시간. 5명의 퍼포머가, 5개의 화면에 나타났다. 그들은 같은 시간대 각자의 공간에서 혼자 있었다. 퍼포머 지구의 화면에는 게임기에서 나는 뿅뿅 소리가 가득했다. 종종 뭔가를 견디기 어려운 사람처럼, 무릎을 모아 앉아 발을 구르고 바닥을 긁으며 아-하고 소리를 지르기도 했다. 퍼포머 선희는 욕조에서 옷을 입은 채 물속에 앉아, 계속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었다. 한때 따뜻했던 물이 다 식어버린 뒤에도, 그곳에서 나갈 수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윤경은 버티기 어려운 자세를 유지하다 쓰러졌다. 온몸으로 시간을 견디고 있는 것 같았다. 진아는 멜랑꼴리에 대한 텍스트를 빨래 건조대에 달아두었다. “최근 6개월간 이전보다 더 무력감이나 외로움, 우울감을 느끼시나요?”, “우울은 돌아옵니다” 같은 말들이었다. <녹는점>을 10분 정도 보자마자, 내가 퍼포머들이 드러내는 멜랑꼴리에 이미 동화되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화면 밖의 내가 화면 속 퍼포머들의 영향을 받아, 멜랑꼴리한 상태로 녹아 들어가는 것에 조금의 저항도 생겼다. 그 상태에서 한동안 빠져나오지 못할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편으론 이 퍼포먼스에 나를 맡겨 크게 영향을 받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한없이 멜랑꼴리한 것, 차라리 그것이 이 시대를 사는 사람의 내적 진실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는 자각 때문이었다.
<연쇄시간살해사건> 공연 장면
<연쇄시간살해사건> 공연 장면
가운데 화면에는 퍼포머 지혜가 배치하고 허물어뜨리는 사물들의 이미지가 계속 드러났다. 지혜는 계속 천을 접었다 폈다 하고, 아몬드 브리즈로 라떼를 만든다. 솔방울 두 개를 더하자, 홈카페 인스타그래머들이 올리는 이미지처럼 아름답게 보였다. 지혜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허물어뜨리고, 사물들을 다르게 배치하고, 계속 사진을 찍었다. 이 행위가 계속 반복되는 것을 바라보며, 점점 지혜의 행위가 고되고 권태로운 일에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슬픔과 우울의 감정이 함께 작동하고 있는 것 같았다. “상실한 대상 혹은 상실된 내면의 정면을 응시하지 못하고 … 파편화된 이미지, 비유, 에피소드를 찾아다니며 자아의 슬픔을 연장시키고는 하는1) 멜랑꼴리커 특유의 감각이 느껴졌다. 오후 03:00-04:00에 진행된 퍼포머 지구의 <연쇄시간살해사건>에서도 멜랑꼴리커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지구는 많은 취미를 위해 구입했던 많은 물건을 방안에 늘어놓고 있었다. 지구는 방치되고 용도를 잃은 이 다양한 사물들을 모아 테이프로 엮기 시작하는데, 시간을 철저히 낭비하는 것처럼 보이며 완성이나 성취도 목표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내일을 맞이하기 위해서, 지구는 계속 물건들에 테이프를 감는다. 사람들의 얼굴이 그려진 종이, 나무판, 고무장갑, 보면대 등이 무작위로 연결되자 마침내 하나의 작품처럼 보였다. 지구는 이렇게 시간을 살해하며, 내일을 기다린다고 했다. (오후 4:00부터 5:00까지 진행된 <외면>에서 지구는 <연쇄시간살해사건>에서 만든 것을 또다시 해체하고 있었다.)
<항우울 레시피> 공연 장면
<항우울 레시피> 공연 장면
<녹는점>에서 분리된 채 한없이 멜랑꼴리했던 퍼포머들은 오후 01:20-02:00 <항우울 레시피>부터 서로에게 연결된다. 그들은 각자의 공간에서, 하나의 레시피대로 ‘녹차카레떡볶이’를 만들었다. ‘우울할 땐 트립토판의 함유량이 많은 달걀노른자가 좋다’와 같은, 계란의 효능이 텍스트로 나타났다. 퍼포머들이 ‘녹차카레떡볶이’를 만드는 동안 배경음악으로 ‘메타모르포젠 23대의 현악기를 위한 현악합주곡’이 나오고 있었다. 2차 세계 대전 말기, 대공습으로 인해 파괴된 도시. 과거를 송두리째 잃어버린 괴로움 속에서 이 현악합주곡을 작곡했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에 대한 설명도 제공된다.
오후 1:30 경에 ‘상 차리기’가 시작되었다. “좋아하는 것들을 상 위에 놓아보세요. 화분, 초, 그림, 사진, 조각, 인형, 책, 무엇이든 좋아요. 고양이는 좋지 않다”라는 텍스트가 나타나면 선희는 작은 식물과 작은 도자기 동물 인형들을 늘어놓고, 지혜는 맥주를 놓고 마신다. 지혜 옆에는 연기상 트로피가 있다. 옷장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의를 찾아와 입고, 공양을 받는 기도를 하고, ‘떡볶이를 비행기에 태워서 입에 넣어주세요’라는 텍스트와 함께 모든 퍼포머가 스스로를 먹인다. 저작 운동을 하다가, 퍼포머들이 참지 못하고 결국 웃음을 터뜨린다. 이 모든 행위를 정말로 ‘함께’하고 있기 때문에 웃게 되는 순간 같았다. 그런 그들을 보고 나도 웃게 되었고, <항우울 레시피>부터는 점점 심각한 마음을 내려놓게 되었다. 그러자 그들과 일상을 함께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고, 작곡가 이상욱의 ‘불결한 왈츠’를 들으며 다같이 <낮잠>을 자니 어른들을 위한 캠프에 온 기분도 들었다. 일요일이었고, 자신에게 별 뜻 없이 한 시간의 낮잠을 허용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퍼포먼스는 우리가 자신에게 가장 엄격하기 때문에 잘 허용하지 않는 일들을 열심히 하게 하고, 허용하지 않는 감정들을 느끼게 해주고 있었다. <외면> 때에는 화면을 틀어놓고, 청소를 하고 빨래를 널고 일기를 쓰는 등 개인적인 일을 하면서 그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삼킬 수도 없는 것 그리고 함께 있고 싶은 밤> 공연 장면
그리고 오후 8:00, 마지막 퍼포먼스 <말할 수 없는 것 그러나 삼킬 수도 없는 것 그리고 함께 있고 싶은 밤>에서 퍼포머들은 감정적으로 가장 깊게 연결된다. 2020년 1월부터 퍼포먼스 당일까지 이어지는 퍼포머 선희의 일기에 대해, 다른 퍼포머들이 선희의 제스쳐에 맞추어 각자 반응한다. 선희가 코로나 시대를 사는 연극배우의 일상과, 환경변화에 대한 걱정과, 관계에서의 상실 그리고 회복의 구체적인 경험을 공유한다. 선희가 느껴왔고 현재 느끼고 있는 감정들과 퍼포머들의 감정이 화면을 넘어 공명한다.

선희는 우울과 불안과 슬픔, 또 그만큼 많은 다독임과 다짐들이 함께 적힌 과거의 일기를 읽는다. 현재의 퍼포머들과 현재의 선희가, 선희의 과거 감정들에 개입한다. 영원히 딱딱하게 굳어있을 것만 같은 과거에 대한 해석을, 퍼포먼스 차원에서 개입하며 변화시킨다.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이어지는 끝없는 생각과 그로 인한 솔직한 감정들을 일기로 꺼내놓은 선희는 네 가지 제스쳐를 통해 다른 퍼포머들의 개입을 요청한다. 선희의 말을 반복하기, 연상되는 단어나 문장 말하기, 반대되는 의미의 말하기, 선희의 말이 들려지지 않도록 덮기. 퍼포머들은 각자의 공간에 있지만, 동시에 선희의 요청에 따라 선희에게 공감하고, 선희의 주의를 환기하고, 그를 방어하고, 선희의 생각에 반대되는 말을 함으로써 선희로부터 선희를 보호했다. 어느새 지구가 울고 있다. 지혜도 울고 있다. 문득 그들의 감정이 친밀하게 느껴졌고, 더 이상 두렵지도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관객으로서 일요일의 9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내며, 나 역시 화면을 넘어 그들과 접속하고 위로받고 있었던 것이다. 무언가를 잃어버렸다는 느낌이 든다면, 구멍이 뚫린 자리에 머무를 시간을 조금 더 허용해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해야 한다고. 오래 외면한 감정들에게, ‘선희와진아와상욱과지구와지혜와윤경과윤석이’ 말을 걸어준 어느 일요일의 9시간을 기억하며.
참고한 글들
박상수. "애도와 멜랑콜리 연구: 애도와 멜랑콜리의 이론적 지형과 문학적 재현의 윤리를 중심으로." 상허학보 49.- (2017): 107-147.
정끝별. "21세기 현대시와 멜랑콜리의 시학." 한국문예창작 11.1 (2012): 5-37.

[사진 제공: 선희와진아가]

한없이 멜랑꼴리
일자
2020. 09. 06. 12:00~21:00 라이브 스트리밍 퍼포먼스
기획
배선희
연출
김진아
음악
이상욱
영상
최윤석
구성/출연
배선희, 김진아, 이지혜, 지구, 허윤경
제작
선희와진아가
관련정보
https://www.facebook.com/SunheewaJinahga/posts/1704722046346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