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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만발극장 <스푸트니크>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묻는다

유혜영
191호 2020.11.19
극장에는 특정한 무대 없이 의자만 가득했다. 공간의 중앙을 두르며 산발적으로 배치된 객석은 관객을 뿔뿔이 흩어놓지만, 왠지 평소보다 서로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내 옆에 선명하게 드러나던 빈 의자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 있어서였을까, 객석 사이의 벌어진 공간마저 곧 등장할 배우들이 채워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극장에는 특정한 무대 없이 의자만 가득했다. 공간의 중앙을 두르며 산발적으로 배치된 객석은 관객을 뿔뿔이 흩어놓지만, 왠지 평소보다 서로 더 가까이 있다고 느끼게 한다. 내 옆에 선명하게 드러나던 빈 의자를 눈으로 직접 확인하지 않을 수 있어서였을까, 객석 사이의 벌어진 공간마저 곧 등장할 배우들이 채워줄 거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객석의 배치는 확실히 작년 초연 때와는 다른 방식으로 관람에 영향을 줄 것이었다. 올해 우리의 극장경험이 급속도로 달라져버렸으니까. 나는 각각 떨어져 앉았다기보다는, 함께 모여 있다는 감각으로 공연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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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찾아 나서는 사람들
등장부터 배우들의 얼굴에는 생각의 무게랄지, 삶의 무게가 상당하다. 완전히 혼자 있을 때만 드러나는 무표정. 이름을 알 수는 없었지만, 이들이 겪고 있는 상황,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의 불행은 상당히 구체적으로 전달된다.
해외 출장으로 채워진 삶을 살아온 20년 경력의 무기회사 직원은 ‘사내복지’ 차원의 심리 상담을 받는다. 처음엔 회사가 자신을 의심하는 거라 생각해 비협조적이었지만, 회사와 함께 오랜 시간 성장해온 본인이 최근 몇 년간 갑자기 멈춰버린 것 같다는 속내를 털어놓게 된다. 문제가 될 만한 걸 찾을 수 없으니 해결할 수 없고, 그러니 일을 쉴 수도 없다.
무기회사 직원을 담당하는 심리상담사에게 상담소란 원하는 연구원에 들어가기 위해 잠시 머무르는 정도로만 의미가 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과의 대화를 매뉴얼로 버티며, 자신의 채용을 좌우하는 교수의 이름으로 논문을 쓰고, 저 멀리 미국의 황량한 컨벤션 센터에서 열린 학회에서 발표까지 성공리에 마친다. 하지만 바로 눈앞에 있다고 생각했던 보상은 허무하게 또 멀어져 간다. 멍청하게 앉아서 바다를 바라보고 싶어진다.
상담사를 학회장까지 태워다 준 우버 기사는 버려진 해변을 떠나 돈을 벌기 위해 군에 입대하고 내전을 겪는 타국으로 파견되어서는 오직 집에 돌아갈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 우연히 사귄 난민 친구에게 미국으로 돌아가면 생과일주스 가게를 차릴 거라는 꿈을 고백하기도 하지만, 죽이고 또 죽어 나가는 생명을 지켜봐야 하는 일에 점차 스스로 소멸된다.
하루아침에 마을과 집과 가족을 모두 잃고 동생의 닌텐도와 둘만 남겨진 난민은 미군이 지키는 보호소를 탈출한다. 미국이나 유럽에서의 풍족한 삶을 상상하기도 했지만, 수개월에 걸친 아슬아슬한 여행 끝에 겨우 한국에 도착한다. 한국으로 오는 마지막 공항에서 만난 무기회사 직원의 도움으로 무사히 비행기를 탈 수 있었다. 드디어 ‘살 곳’에 도착했다고 생각했는데, 보호소 근처에서 듣던 총소리가 이곳 공항에서도 들려온다.

희미하게 연결된 인물들의 삶의 궤적은 ‘사실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다’는 익숙한 모티브를 떠오르게 한다. 다만, 공연은 감춰졌던 연결 고리를 드러내거나 이용해 그다음 사건을 만들거나, 극대화하는 데는 관심이 없다. 이 네 명의 인물이 관객과 함께 극장에 모인 이유는 서로의 연결성보다는, 모두가 ‘집 밖’에 있다는 공통된 상황 때문이다. 지금 있는 곳이 집이 아니거나, 집을 찾고 있거나, 집으로 가는 중이거나, 집으로 갈 날을 기다리며 홀로 덩그러니 애쓰는 사람들. 공연 내내 예측할 수 없는 배우의 동선에 긴장하고, 뒤섞인 장면의 시간 순서를 재배열하기 위해 몸과 뇌를 부단히 움직이는 관객들도 나름의 의미에 이르기 위해 불편을 감수하고 있다는 점에서 다르지 않다.
공연은 어디론가 ‘맞는’ 곳, 안전한 곳, 익숙한 곳으로 이제 그만 가고 싶은 불안한 에너지로 휩싸인 이 외로운 사람들에게 어디로 가는 길이냐고, 누굴 만났냐고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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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한 만큼만 갈 수 있어
‘착한 직업’이 갖고 싶은 군인은 본인 어머니의 병세를 호전시켜준 한 상담사를 떠올리며 심리상담사가 바로 그런 직업이라고 믿지만, 택시에 탄 상담사는 자신도, 자신의 일도 그런 타입은 아니라고 말한다. 난민은 미국에 가서 화려하고 배부른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아메리칸드림을 믿지만, 미국에서 살아온 군인에게도 그건 영화 같은 이야기다. 상담사가 선망하는 연구원의 삶은 어떨까, 그곳은 정말 편안한 집이 되어줄까? 단지 돈이 필요해서 지원한 일이 생명에게 총부리를 겨눠야 하는 것인 줄 몰랐던 군인처럼 연구원에도 상담사가 감당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을지 모른다. 집이 여기저기 있다고 말하는 무기회사 직원에게 가장 집 같았던 곳은 어디였는지를 묻지만, 그는 끝까지 대답하지 않는다. 이쯤 되면 집으로 가는 길, 그 자체가 오해인 것은 아닐까.

가보지 못한 세상에 대한 막연한 정보와 경험 또는 기대는 공연에서 인물들이 여정을 계속하도록 하는 동력 중 하나다. 그러나 그 정보와 경험과 기대가 사실은 전부가 아니라는 것, 스스로 왜곡하고 조작한 이미지일 수 있다는 것, 아무리 몸을 움직이고 시선을 돌려봐도 내 자리에서는 배우의 등밖에 보이지 않는 순간이 반드시 있다는 사실을 몰라야만, 또는 모른척해야만 가던 길을 계속 갈 수 있다. 그런 여정에서 맺는 타인과의 관계 또한 오직 나를 중심으로 상대를 계속 오해하는 방식으로만 작동한다.

배우들은 단 한 번도 서로를 바라보지 않는다. 같은 시공간에서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시선은 서로가 아닌 다른 어딘가를 향해있다. 인물들은 상대방이 누구인지 보다 내가 어떻게 느끼는지 즉, 내가 상대방 또는 이곳을 원하는지 아닌지에만 집중하는 것처럼 보인다. 1인용 의자에 앉아, 자신의 세계를 벗어날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맺는 관계란 임시적이거나 피상적일 뿐이다. 그러다 문득, 해가 떨어지기 직전처럼 노랗고도 붉은빛이 강렬하게 분사되는 한 곳을 배우들이 차례로 응시한다. 어디를 보는 걸까. 각자가 도달하고 싶은 어딘가였을까. 우주여행의 꿈을 품고 솟아오른 스푸트니크는 아니었을까. 스푸트니크는 귀환이 불가능한 상태로 설계된 채 발사된 우주선이었다.

귀환이 불가능할지언정, 공연은 이 앙상한 관계망이 사람들을 전혀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가능성을 남기기도 한다. 수년간의 노력이 물거품이 된 순간에 심리상담사는 공항으로 향하던 택시를 돌려 해변으로 가줄 것을 부탁한다. 우버 기사는 기꺼이 그렇게 해줄 것이다. 난민이 계획에도 없던 한국에 도착하게 된 것도 결정적으로 무기회사 직원의 호의 덕분이었다. 물론, 그렇게 인도된 새로운 세상은 무기회사 직원의 말처럼 좋은 선택이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난민의 말처럼 우리는 선택해 본 적이 없을지도 모른다. 선택했다고 믿어왔다면, 그 또한 오해일지 모른다. 이 글의 상당 부분이 나의 오해인 것처럼.
본문3
결국 길 위에 멈춘다 하더라도
공연의 주석처럼 덧붙여진 에필로그에서 우주선 스푸트니크에 탑승했던 강아지 라이카가 등장한다. 라이카는 분명히 말한다. ‘여기가 싫어. 여기는 내가 있을 곳이 아니야.’ 실제로 라이카는 스트레스 때문에 비행이 시작된 후 몇 시간 만에 생명이 끊어졌다고 발표되었다. “우주를 여행한 최초의 생명체”라는 설명은 우주선의 창문 밖으로 아름다운 지구를 바라보는 낭만적인 라이카의 모습을 상상하게 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스푸트니크에 대한 이미지 또한 별다른 정보 없이 갖게 된 오직 내 입장에서의 오해일 뿐이다.

스푸트니크가 우리가 도달하고 싶은 안전한 집을 은유한다면, 공연은 우리가 스푸트니크에 관해 알고 있는 것이 실은 거의 없거나 왜곡된 것은 아니겠냐고 의심한다. 게다가 누군가 더 많은 진실을 알고 있다 하더라도 우리가 그들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나 자신이라는 한계를 벗어나기 어려울 거라고. 집을 찾아가는 길은 그런 식으로 운행된다고.
공연이 정의하는 삶은 이토록 차갑고 슬프다. 글쎄,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어딘가에 도달하기를 원하고 또 관계 맺기를 그만두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렇게 모여 앉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이유는 뭐였을까. 공연은 그저 잠잠히 이 비극적인 사람들의 여행을 관망할 뿐이다.

[사진 제공: 상상만발극장]

스푸트니크
일자
2020.11.05. ~ 2020.11.15
장소
서강대학교 메리홀 소극장
작/연출
박해성
출연
선명균, 문현정, 김세환, 신사랑
무대
강지혜
조명
김형연
의상
홍문기
분장
이지연
음향
목소
드라마터그
김나볏
영상기록
삼인칭시점
홍보
임서영
제작PD
이시은
상상만발극장
관련정보
http://ticket.interpark.com/Ticket/Goods/GoodsInfo.asp?GoodsCode=20005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