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래빗홀씨어터 <춤의 국가>

조용히 수치스러워할 수 있음에

손옥주_공연학자
192호 2020.12.03
공연장을 나서며 혜화동일번지의 문을 나서면서 문득 14살 나의 모습을 기억해보았다. 체내 세포 어딘가에 오랫동안 여울져있던 시간들이 저마다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내며 생각의 이곳저곳에 시각적으로 투영되는 듯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도 특정 장소와 그곳에 있던 나의 모습, 내가 맡은 냄새와 손길이 닿던 것들의 질감,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하던 생각들과 느끼던 감정들이 그 자체로 마치 앰비언트 사운드(ambient sound)처럼 나를 둘러싸고 도처에 흩어져있는 듯했다
공연장을 나서며
혜화동일번지의 문을 나서면서 문득 14살 나의 모습을 기억해보았다. 체내 세포 어딘가에 오랫동안 여울져있던 시간들이 저마다 하나의 사건을 만들어내며 생각의 이곳저곳에 시각적으로 투영되는 듯했다. 날짜는 기억나지 않아도 특정 장소와 그곳에 있던 나의 모습, 내가 맡은 냄새와 손길이 닿던 것들의 질감,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하던 생각들과 느끼던 감정들이 그 자체로 마치 앰비언트 사운드(ambient sound)처럼 나를 둘러싸고 도처에 흩어져있는 듯했다. 그곳에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자기 자신을 쉽게 비교 대상으로 전락시키곤 하는 ‘주주’가 있었고, 그곳에는 자신이 잘 할 수 있는 것에 대해 의외로 무덤덤하게 감각하는 ‘아미나’가 있었고, 그곳에는 여전히 앳된 외모와는 달리 괴팍하고 폭력적인 내면의 상태에 대해 종종 뿌듯해하기도 하는 ‘애슐리’가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다. 그곳에는 뜬구름 잡듯 평소 즐겨하던 공상을 마치 엄청난 비밀이라도 되는 것처럼 친구에게 조심스레 털어놓는 소심한 ‘마에브’가 있었고, 그곳에는 점점 변해가는 몸의 상태와 시작한 지 오래되지 않은 월경의 경험 앞에서 성에 대한 관심이 최고조에 이른 ‘소피아’가 있었고, 그곳에는 나의 욕망을 위해 관심에서 도외시해버린 친구에 대해 뒤늦게 미안함을 느끼는 ‘코니’가 있었다. 기억의 형태로 부지불식간에 출몰한 그날의 상황들은 극 중 코니의 말처럼, “조용히 수치스럽게” 오랜 시간 내 몸 어딘가에 저장되어있었음에 틀림없다. 래빗홀씨어터의 신작 <춤의 국가>는 이처럼 내 몸 곳곳에 흩어져있던 지극히 사적인 그날의 편린들을 ‘기억’이라는 자장 안으로 이끌어내는 마그넷이자, 무대 안과 밖 사이에서 무대 위의 이야기를 관객의 사적 경험으로 치환시킬 수 있도록 하는 서사적 미디엄과도 같았다.
극 속으로 들어가며
개인적으로 희곡을 기반으로 하는 정극, 특히 번역극은 참으로 오랜만에 관람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춤의 국가>는 역사적 사건이나 동시대 담론처럼 주제나 소재에서부터 끝 모를 중량감이 느껴지는 작품이 아니라는 점에서, 오히려 대다수의 틴에이저가 겪는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는 일상의 에피소드들과 그 일상의 근간에 흐르는 감정과 감각의 농도를 매우 세밀하게 다루는 작품이라는 점에서 오히려 새롭게 느껴졌다. 어느새 일상마저도 거대 담론 안에 포섭되어버린 오늘의 공연계에서 연극의 시작점이자 구심점으로서의 희곡이 지니는 의미에 대해 모처럼 사유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게다가 ‘잘 쓴 희곡(이와 관련해서는 번역의 역할도 간과할 수 없다)’에 스며들어있는 남다른 문학성을 만났을 때의 설렘 또한 오랜만에 느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도 이번 공연은 인상적이었다.

약 2시간 동안 이어지는 공연의 중심에는 지역 예선전을 거쳐 전국무용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7명의 14살 동갑내기 청소년들의 이야기가 놓여있다. 6명의 여학생들(주주, 아미나, 애슐리, 마에브, 소피아, 코니)에 남학생 루크를 더해 꾸린 무용단은 무용교사 패트가 이끌어가고 있다. 작품의 줄거리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작품을 연습하는 과정 중에 팀 내에서 가장 실력 있는 학생으로 꼽히던 아미나를 대신해서 실력은 좀 부족해도 늘 주인공을 꿈꿔왔던 주주가 주인공 역할을 맡게 되며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로 요약된다. 그러나 끝없이 반복되는 연습 속에서 턴을 돌고 돌고 또 돈다 할지라도, 결코 채워질 수 없는 역량의 부족함은 경우에 따라 실수로 진입하는 문을 만들어내곤 하지 않던가. 실제로 주주는 대회에서 그 문을 열게 된다. 결정적인 장면에서 큰 실수를 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절친한 친구 아미나가 다시 주목받게 되는 모습을 바라보며 주주는 무용을 그만두기로 결심한다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축이다.
<춤의 국가>는 이처럼 이야기의 흐름 인에서 자칫 쉽게 느껴질 수 있을법한 상투성을 ‘또래의 감정선을 매우 예민하게 드러내는 문장의 터치감’, 그리고 ‘인물들에 대한 고른 캐릭터라이징 전략’을 통해 상쇄해낸다. ‘주인공’으로 대변되는 욕망을 특정 주체 한 사람만의 감정으로 치환하는 대신에 전체 인물들에게 고르게 부여하는 것이다. (실제로 작품 속 모든 인물은 주인공이 되길 극도로 원하며, 그처럼 극대화된 욕망은 모두가 한데 엉킨 채 진행되는 군무 형식으로 표현되기도 했다.) 그런 점에서, 군무에 선 무리로부터 분리되어 센터에 서고자 하는 욕망과 그것에 대한 자기반성 혹은 회한은 개념적 대립이 아닌, 그저 서로 다른 몸과 마음의 상태가 되어 틴에이저들의 현재를 이룬다. 등장인물들은 저마다 개인으로서의 독자성을 보이는 동시에 ‘틴에이저’라는 공유된 정체성을 대표하기도 하는 것이다.
공연 언저리를 서성이며
이번 <춤의 국가>의 연출과 관련해 특히 인상 깊었던 부분 중 하나는 바로 30대부터 50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에 속한 배우들이 14살의 극중 배역을 소화해냈다는 점이다. 대사는 틴에이저가 쓸 법한 구어체 표현들이 주를 이루지만, 그와 같은 활자 상태의 대사가 연령도 공연 경험도 성량도 톤도 강약도 발음도 서로 다른 배우들의 신체가 이루는 현재 조건 안에서 필터링 될 때, 틴에이저라는 단일한 인물 설정은 서로 다른 단면들의 조합으로 제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밖에도, 극 중에서 가장 출중한 무용 실력을 지닌 인물로 설정된 아미나 역할을 청각장애인 무용가 안정우가 맡았다는 점 또한 인상적이었다. 몸에 저장되어있는 어떠한 특수한 (운동)물리적 환경이나 조건에 대해 ‘장애’라고 명명할 수 있다면, 청각장애라는 조건 안에서 구현되는 그녀의 대사와 발성은 그 자체로 틴에이저인 인물들을 다층적으로 조합해내는 또 하나의 단면, 또 하나의 요소가 되어주었다. 동시에 ‘무용대회’를 소재로 삼는 이번 작품에 출연 배우들 가운데 유일한 전문 무용가로 참여함으로써 자신만의 움직임 언어를 통해 10대에 겪게 되는 격렬한 감정의 마찰을 형상화하기도 했다.
틴에이저. 질투와 반성, 욕망과 포기, 이기(利己)와 이타(利他), 상처와 희망. 양극단의 상태를 기꺼이 모두 포용하기에, 대립도 모순도 없는 생의 시간을 보내며 마음껏 포효하고 마음껏 웃어댈 수 있는 무대 위의 인물들. 그런 그들을 향해, 온전히 ‘자기’일 수 있기에 괴로워도 마냥 괴롭지만은 않은 그들을 향해 던지던 패트 선생님의 외침으로 리뷰의 마지막을 갈음하고자 한다.

“세상의 모든 괴로워하는 사람들에 대해 생각해 봐. 그리고 저기 나가서 그 사람들을 위해 춤을 춰.” (<춤의 국가> 공연 팸플릿 중에서)

[사진 제공: 래빗홀씨어터 ⓒ박태양]

혜화동1번지 7기동인_가을페스티벌 [맞;춤] 춤의 국가
일자
2020.11.20 ~ 2020.11.29
장소
연극실험실 혜화동1번지
출연
이정미, 김정아, 허정도, 최설화, 김원정, 김정, 조의진, 강혜련, 안정우
작
클레어 배런 Clare Barron
번역
함유선
연출
윤혜숙
연출부
김태령
안무
허윤경
무대
유소양
조명
성미림
분장
장경숙
의상
김미나
자막·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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