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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집단 세사람 <산악기상관측>

예측을 빗나가는, 산과 삶의 날씨에 대하여

장영
194호 2021.01.21
연극 <산악기상관측>을 만나러 극장에 간 날은, 2020년의 크리스마스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오래 고립되었던 한 해. 유난한 한 해가 마침내 끝나가는 날들은 종종 외롭고 허망하기도 했다.
연극 <산악기상관측>을 만나러 극장에 간 날은, 2020년의 크리스마스였다. 너무 많은 사람들이 아팠고, 오래 고립되었던 한 해. 유난한 한 해가 마침내 끝나가는 날들은 종종 외롭고 허망하기도 했다. 다른 사람만이 아는 다른 삶의 비밀과 성찰이 내 굳은 마음의 습관들을 가볍게 허물어뜨릴 한순간을 기다렸고, 그때 이 연극을 만나게 되었다.
산과 삶
01

이 연극은 산에 들어간 사람들의 이야기라 소개되어 있었다. <코>, <산악기상관측>, <과거를 묻는 방법>까지 세 개의 단막극이 이어져 공연된다고 했다. 무엇보다 연극에 산이라는 공간을 들여오는 것에 관한 기대가 컸고, 산이라는 공간에서 발화되는 말들이 궁금했다. 극장에 들어서니 파스텔톤의 벽에 흰 구름무늬가 그려져 있었고, 소파와 원형 러그가 놓여있었다. 밝은 분위기의 소아과 병원이나 편안한 거실을 연상케 하는 일상적인 무대 공간이었다. 무대에 놓인 화분은 알록달록한 전구로 장식되어 있어, 크리스마스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세 개의 이야기를 하나씩 따라가다 보니, 산은 인물들이 억누른 갈망과 비밀이 예측 불가능하게 터져 나오는 비일상적 공간처럼 느껴졌다. 철학자 나카무라 유지로는 산꼭대기나 숲속이 세속적인 공간과 구별되는, 성스러운 거점1)으로서의 상징공간이라고 적고 있는데, 이 연극에서 배경이 되는 산 역시 상징공간으로서 종교적이고 신화적인 공간처럼 느껴졌다. 산의 풍경과 날씨가 주는 비일상적 에너지에 묘하게 홀려있는 것 같은 인물들의 대화가 진행될수록, 덩달아 산의 에너지에 홀리고 있는 기분을 느낄 수 있었다.
이 연극은 음향과 조명만으로 극 중 산의 날씨와 풍경의 변화를 보여준다. 또한 소파와 러그가 있는 실내공간을, 산을 비롯한 다양한 공간으로 변환해 자유자재로 활용하는 배우들의 연기를 보며 즐거움을 느낄 수 있었다.
텍스트
무대화된 세 편의 희곡에는 종종 하나의 대사와 바로 다음 대사 사이, 크게 급변하는 감정들이 함축적으로 담겨있었다. 인물의 감정은 급격히 전환되나, 대사는 관객이 그 급격한 감정 전환을 의문 없이 납득할 만큼 자연스럽다는 점이 흥미로웠다. 비일상적인 감정 전환과 인물의 무의식적인 발화들은, 일상적 대화 안에 함축적이고 시적인 언어로 출몰한다. 풍부한 상징들이 적확하게 쓰인 텍스트의 힘이 기저에 작동하고 있어, 길거나 설명적인 대사가 없음에도 작품 속 공간의 분위기나 인물들의 감정을 보다 풍부하게 건네받을 수 있었다. 평소라면 하지 않았을 말들, 아무리 가까운 이에게도 드러내지 않았을 어두운 비밀들이 산이라는 특수한 공간 안에서 유령처럼 재빠르게 출몰하고 여기저기서 바스락대는 듯했다.
02
단막극 <코>는 홀린 듯 산에 들어갔다가 코가 도망가 버린 남자가 병원에 찾아오며 시작된다. 이어 귀가 도망간 여자가 병원에 나타나 보급형 코와 귀로 갈아 끼우는 수술을 받는다. 코와 귀는 처음 맡아보는 냄새, 처음 들어보는 새소리에 이끌려 이들을 떠났다고 한다. 코와 귀가 도망간 남자와 여자는, 사람들의 도망간 눈과 코와 귀가 산을 이루어 움직이는 압도적인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눈과 코와 귀는 산이라는 공간에서 새로운 냄새와 소리를 만나고, 새로운 것으로서 살고 싶었던 욕망이 깨어나 인물들을 떠나게 된 것 같았다.
<산악기상관측>은 산악기상관측연구원인 주한과 경원의 이야기다. 주한은 과학고 재학시절 친구의 연구 성과를 훔쳤다가 교생 선생님에게 공개적으로 혼이 난 적이 있다. 주한은 <산악기상관측>에서 선배 연구원 경원을 납치하게 되는데, 관객들은 정황상 고등학생 주한을 혼낸 그 교생 선생님이 바로 경원이라 추정하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정황에도 불구하고 경원은 주한에게 자신이 결코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데, 이때 주한은 ‘다들 아니라고 하던데, 이번에는 확실해’ 라며, 이미 더 많은 사람들을 해쳐왔을지 모른다는 암시를 한다. 경원 자신이 먼저 공유한 교생 실습 때의 경험이 주한의 고교 시절 경험과 일치함에도, 자신은 끝까지 ‘그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는 경원. 텍스트 차원에서부터 끝내 단정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다는 점이, 예측 불가능한 산의 속성과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단막극에서 경원과 주한은 오프로드를 차로 달리며 대화한다. 소파를 자동차로 활용하여 연기한 장면에서 그 인물은 계속 산악기상의 예측 불가능성을 이야기하며, 예측 불가능한 순간에 공격성과 폭력적인 성향을 드러낸다. 가을의 산에서 주한이 음악을 틀고 두 사람이 마치 낭만적인 공간에 있는 것처럼 연출된 장면의 다음 순간, 주한은 경원에게 예측 못 할 폭력성을 드러낸다. 이런 장면들은 주한이 자신의 대사에서 ‘산’을 ‘우리를 배신하는 곳’이라고 말했던 것과 공명하며 깊은 인상을 준다.
034
마지막 단막극이었던 <과거를 묻는 방법>은 20대부터 친구였던 39살 주한, 정인, 경원이 12월 31일 산에 올라 ‘과거를 묻는’ 자신들만의 의식을 치른다는 내용이다. ‘편지’를 묻을 돌을 찾기 위해 어둠 속을 헤매고, 과거를 묻으려고 판 구덩이에 빠져서 발목을 다치고, 산속의 매서운 추위를 견디는 연기가 일관되게 실감난다. 극의 마지막에, 인물들은 정작 과거를-황정은 작가의 표현처럼-‘일종의 무덤’에 묻는 일에 실패하며, 다만 스스로가 자신이 파놓은 구덩이에 빠져 살아왔음을 깨닫는다. 숨겨온 상처와 비밀들이 환히 드러난 상태로, 이들은 1월 1일을 맞이한다. 과거를 파묻으러 산에 온 세 사람은, 서로의 과거에 대해 재질문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이해한다. 세 친구는 겨울의 산에서 등을 맞대고 앉아, 새해 카운트다운 불꽃놀이를 바라보며 나란히 마흔 살이 된다.
산과 환幻
세 명의 배우들은 각각의 단막에서 유기적으로 연결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각각 내용이 다른 단막 희곡을 모두 같은 배우들이 연기하였고, 특히 ‘주한’이라는 남자 캐릭터의 이름은 두 편의 단막에서 반복되었다. 각 단막극 속 인물의 기억과 발화들이 같은 배우들의 몸에서 중첩될 때, 세 사람의 관계성이 묘하게 쌓이고 뒤틀리는 과정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지막 단막극을 보며 사실 이 세 개의 이야기들은, 주한 경원 정인 세 사람이 이미 산속을 헤매며 보고 있는 환(幻)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과거를 묻는 방법>에서 정인의 편지를 언 땅에 묻는 일종의 제의를 위해 주한이 돌을 구하러 갔던 장면에서, 돌을 구하러 간 주한이 너무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감각이 매우 불안하게 느껴졌다. 그 순간 산이라는 공간이 만들어내는 불안, 즉 산에서의 실종이나 매장의 가능성이 만들어내는 불안이 이 연극 전체를 관통하고 있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러한 불안이 이 연극 전체의 환상성을 극대화하고 기묘한 시간 감각까지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05
세 개의 극이 진행되며 이 일상적 무대 디자인이, 예측을 빗나가는 산의 이야기를 일상으로 끌어들이고 비일상적 공간과 일상 공간의 경계를 뒤섞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무대에 화분들을 배치하고, 관객의 의자에도 작은 식물 소품들을 배치하여, 관객석까지 산의 공간성을 연장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었다. 산에 묻고 돌아와야 하는 복잡한 비밀들은, 사실 우리가 통제 가능하다고 믿는 우리의 일상에서 유령처럼 출몰하고 탄생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산과 삶은 닮았다. 인간의 예측을 빗나가는 산의 날씨처럼, 인간의 삶 역시 인과를 완전히 예측할 수 없기에 쉽게 단정하고 정죄할 수 없는 것이다. 산과 삶은 이 연극의 환(幻)안에서 충실히 공명하고 있었다. 산도 삶도 언제나 ‘나’보다 더 크다.
  1. 『토포스―장소의 철학』, 나카무라 유지로 지음, 박철은 옮김, (주)그린비출판사, 2011, 91쪽.

[사진제공 : 프로젝트집단 세사람 ⓒ 보통 사진 관_김솔]

산악기상관측
일시
2020.12.24.(목)~2020.12.27.(일)
장소
연우소극장
작
황정은
공동연출/출연
선명균 윤현길 최희진
무대디자인
박상봉
조명디자인
김성구
켓매니저
우주현
티켓업무지원
공기
프로듀서
김민솔
관련정보
https://www.playticket.co.kr/nav/detail.html?idx=1311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