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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젝트 이어ㅤ< 아웃 오브 러브 >

형언될 수 없는 관계의 지독함

정다현
195호 2021.02.18
연초부터 가장 친한 친구A와 싸웠다. 그간 잡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터졌었나 보다. 우리는 모진 생각을 압축하여, 그래도 개중에 조금은 정제된 말들을 메신저 앱을 통해 주고 받았다. 나는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잘 알았다. 그도 매한가지였을 것
연초부터 가장 친한 친구A와 싸웠다. 그간 잡음을 만들지 않기 위해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터졌었나 보다. 우리는 모진 생각을 압축하여, 그래도 개중에 조금은 정제된 말들을 메신저 앱을 통해 주고 받았다. 나는 그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잘 알았다. 그도 매한가지였을 것이다. 상황은 몇 시간 동안 지속됐고 잠에 들기 전까지 두 볼은 내내 뜨거웠다. ‘너 말고도 친구 많아’라고 말하며 연락하지 말자고 선언하고 싶은 맘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우리는 다음 날 화해했다. 화해 후 각자 상대가 본인을 얼마나 화나게 했는지 웃으며 연신 털어놓았다. 나는 그가 왜 이렇게 얄밉고 싫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왜 또다시 친구가 되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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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아웃 오브 러브>에도 나와 그처럼 “지독”한 관계의 로나(김신록 분)와 그레이스(성수연 분)가 등장한다. 둘은 옆집에 살고, 같은 학교에 다니며 함께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 서로 어떤 취향을 가졌는지, 어떤 남자를 만나는지, 가족사가 어떠한지 등 서로에 대한 모든 것을 꿰뚫고 있다. 그레이스와 로나는 여느 사춘기 여자아이들처럼 가족, 친구, 이성으로 갈등을 겪으며 함께 성장했다. 하지만 우정의 요소엔 애틋하고 아름다운 것만 있진 않다. 이성과 성에 대한 호기심을 경유하여, 로나와 그레이스는 갖가지 이유로 시기, 질투, 집착하기도 한다. 우정, 사랑, 의지, 유대, 애증, 집착 등의 단어로 다양하게 번역될 수 있는 풍경을 <아웃 오브 러브>는 로나와 그레이스를 통해 그려냈다.
이 작품은 에피소드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30여 년 동안의 이야기는 일률적으로 전개되지 않고 다양한 시간대가 얽히고설킨다. 극적 공간이 집, 버스정류장, 클럽, 거리 등으로 리드미컬하게 변하며, 수십 년의 시공간은 무대 위에서 뒤엉키고 맞물리고 겹쳐진다. 이러한 파편적인 장면 구성은 극이 전개될수록 다른 장면에 대한 정보를 전달하고 뒷받침하였다.
가령 극 초반에 로나가 고향을 떠나 대도시에서 보조 에디터로 일하기 위해 면접을 보는 장면에서, 로나는 자기 말을 하고 싶은 여성들을 위해 녹음기를 들고 집을 찾아다니며 그들의 말을 담았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후에 나오는 장면을 통해 녹음기를 들고 말을 모았던 사람은 로나가 아닌 그레이스였음을 알 수 있다. 로나는 그레이스에게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 따라서 관객은 퍼즐을 맞출 때처럼 극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형식은 우리의 내면세계가 연대기적인 시간의 법칙대로 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우리 내면의 시간은 각자의 방식으로 과거, 현재, 미래를 넘나들며 유영하게 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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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들은 물 흘러가듯 자유자재로 바뀌는 장면들에 적응했다. 목재로 된 미니멀한 무대 세트에 조명, 음향을 활용하며 일종의 극적 약속을 만들고, 장면 전환에 맞춰 빠르게 캐릭터를 변화시켰다. 어떠한 시간대의 로나와 그레이스의 모습인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연령대를 바로 짐작할 수 있도록 변모했다. 그 외에도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 인물들은 로나와 그레이스를 스쳐 간, 내지는 그들의 관계를 부각시키기 위한 보조적인 역할로서 등장한다. 예를 들어 댄스파티에 가기 위해 옷을 갈아입는 걸 감시하며 그레이스와 놀지 말라고 말하는 로나의 새아빠 크리스토퍼, 매일 사과하는 로나의 친아빠, 면접관, 버스정류장에서 만난 사립학교에 다니는 남자아이, 그레이스의 할아버지, 오빠 등 모두 그레이스와 로나의 주변부에 있는 남자들이다. 이러한 인물들을 한 명의 배우(정대진 분)이 일인다역을 통해, 능청스럽고 유동적으로 극을 이끌었다.
허나 시간이 지날수록 로나와 그레이스는 자연스럽게 멀어진다. 둘은 너무도 다른 환경에서 자랐고, 다른 성향을 지녔으며 그러기에 각자의 다른 선택을 하게 되었다. 로나는 대도시 런던으로 가게 되고, 그레이스는 딸 마사를 낳아 고향에 남아 있게 된다. 그레이스와 로나가 먼 훗날 마주했을 때 로나는 그레이스에게 “머문 사람이 나였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다 로나와 그레이스가 마주 보는데, 이 장면에서 조명이 무대 하수에서부터 중앙, 상수까지 차례대로 바뀐다. 그 순간 그동안의 둘의 서사가, 시간이, 감정이 가시적으로 현현되는 것 같았다. 형언될 수 없는 무언가가 공기 중에서 일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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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 그레이스는 “옳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을 지닌 인물이고, 로나는 그런 대담하고, 똑똑하고, 용감한 그레이스를 부러워해 왔다. 그레이스는 탄광이 망하고, 남성성이 무너지는 사회에서 아빠부터 오빠까지 자신이 책임져야 한다고 느꼈다. 그레이스는 집을 떠나기 위해 공장에서 일하며 900파운드를 모으고, 로나에게 “내가 혼자 포기하게 두지” 말라고 말한다. 로나의 면접 장면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레이스는 아마 “그 안에 갇히고 싶지 않았”던 것이리라.
로나에게 그레이스는 “집 같은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로나의 엄마 아빠가 싸울 때 그레이스는 로나를 자신의 방으로 몰래 들어오게 해주었다. 서로가 서로의 집이었다. 이렇듯 이 서사의 모든 것은 로나와 그레이스의 관계성을 비추고 있다. 나는 극장을 나와서 세상 어디나 여성들의 우정, 그리고 욕망과 선택은 비슷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극의 후반부에 갈수록, 시간이 지나도 각자의 방식으로 얼마나 서로를 생각하고 있는지, 그들은 어떠한 보이지 않는 관계망으로 얽혀있는 것인지를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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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순간부터 객석에서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조각난 감정과 시간의 파편들을 좇다 보니 어느새 나는 친구A를 떠올리고 있었다. A부터 과거에 스쳐 간 친구들까지 많은 친구들을 떠올렸다. 우리는 서로 너무 많은 영향을 주고받았고 늘 함께여서 반짝반짝한 시간을 만들 수 있었다. 그들은 지금의 나를 구성할 수 있게 해주었다. 사이가 멀어진 지금은, 나름 각자의 속도대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들이 로나의 대사처럼 “절벽”으로 떨어지질 않길 바라고, 체화된 죄책감을 버리길 바란다. 이건 너무나도 평범하지만 특별한 이야기. 그 어떤 언어로도 수렴되지 않는 로나와 그레이스 사이의 지독한 무언가는 형언될 수 없다. 그럼에도 제목도 ‘out of love’처럼 나는 그 지독한 무언가를 설명하기에 가장 가까운 단어는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제공 : 프로젝트 이어 ⓒ이지수]

프로젝트 이어 <아웃 오브 러브>
일자
2021.01.22(금) ~ 2021.01.31(일)

장소
선돌극장

작
Elinor Cook
번역
함유선
연출
진해정
출연
김신록 성수연 정대진
무대·소품디자인
송성원
조명디자인
윤혜인
의상디자인
김미나
분장디자인
백지영
사운드디자인
목소
무대감독
이지혜
조연출
김현지
그래픽디자인
정김소리
프로듀서
김민솔
라이선스
인피니스 Theater Right Joseph Cho
제작
프로젝트 이어
후원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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