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으로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검색

검색영역

디오티(DOT) <환상의 모파상>

고전을 만나는 방식: 모파상에게 말 걸기

김상옥
196호 2021.03.11
무대 바닥에 체스판처럼 생긴 격자무늬가 비뚜름히 깔려있다. 깜빡이는 녹색 조명이 객석을 어지럽게 비추자, 뒤이어 의사 ‘무’와 수감환자 ‘눌’, ‘쎄로’, ‘제호’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격리시설을 상징하는 공간 속에서 환자들은 일률적인 체조 동작에 맞춰 춤을 춘다.
무대 바닥에 체스판처럼 생긴 격자무늬가 비뚜름히 깔려있다. 깜빡이는 녹색 조명이 객석을 어지럽게 비추자, 뒤이어 의사 ‘무’와 수감환자 ‘눌’, ‘쎄로’, ‘제호’가 무대에 모습을 드러낸다. 격리시설을 상징하는 공간 속에서 환자들은 일률적인 체조 동작에 맞춰 춤을 춘다. 이들을 체스판 위의 말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은 자유의지가 아닌 정신병원의 규율과 질서 체계다. <환상의 모파상>은 19세기 프랑스 작가 모파상이 집필한 네 편의 단편소설 「머리카락」, 「그 사람」, 「꿈」, 「화성인」을 바탕으로 장은실 연출가가 각색한 작품이다. 무, 눌, 쎄로, 제호가 한데 모인 공간에 작가 모파상이 호기심을 갖고 들어서면서 극이 시작된다. 모파상은 근대 합리주의 시대에 태어나, 신경증을 앓다가 정신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삶이 그러했듯, 혹은 체스판의 흑과 백이 그물처럼 얽혀있듯이 극 중 병원은 이성과 광기가 뒤엉키는 공간이 된다.
본문사진1
눌은 자신의 과학적 지식과 객관적 수치를 동원해 외계인의 존재를 추론하면서, ‘그들’과 만났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주장 때문에 그는 사람들로부터 ‘미쳤다’고 평가받을 것임을 예상하면서도, 잘 모르는 것은 사람들이지 자신은 미치지 않았다고 항변한다. 눌은 화성에 생명체가 존재한다는 근거로 운하의 흔적을 제시하는데, 그것은 20세기에 들어 ‘착시’로 판명 난 잘못된 정보다. 그는 자신이 사실에 입각해 사고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하지만 사고에는 착각이 포함될 수 있으며, 오류를 도출하기도 한다. 눌은 가시적 세계에서 오인의 가능성을 배제하고, 자신의 확실성을 정초하는 코기토적 주체다. 이는 19세기에 광학이 발달하면서 합리적인 시각체계로 대상 세계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던 근대의 이성과 맞닿아있다.
쎄로의 상태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조금은 다른 양상을 드러낸다. 바깥을 떠돌다 방에 돌아온 쎄로는 자신의 의자에 앉아있는 ‘그’를 본다. ‘그’는 잠시 쎄로의 망막에 맺혔다가, 더 이상 보이지 않게 된다. 쎄로는 이 해석할 수 없는 존재를 ‘환각’으로 규정하고, 자신이 이성을 잃을 수 있다는 사실에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 “정신 상태가 형편없다”고 몇 번이나 되뇌는 것은 자신이 경험한 일이 신비가 아닌 정신의학의 영역임을, 아직까진 스스로를 진단할 수 있고 완전히 광기의 단계로 넘어가지 않았음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이와 같이 눌과 쎄로는 ‘그들’과 ‘그’라고 부르는 타자를 ‘이성’적인 영역 안에서 이해하고 파악하려는 경향성을 보인다. ‘그’는 쎄로의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있던 내부의 타자다. 혼자 있고 싶지 않다는 쎄로의 강박적 메시지에는 자신이 현재 ‘혼자’이며, 방 안을 맴도는 ‘그’의 정체가 완전한 타자가 아닌 ‘분열된 나’라는 (무)의식이 전제되어 있다.
본문이미지2
제호 또한 파리 시내의 파사쥬를 거닐었던 근대적 주체(=보는 주체)다. 그가 욕망하는 대상은 새빨간 리본으로 장식한 금빛 머리카락 타래다. 제호는 고가구 서랍 속에서 발견한 머리카락을 ‘그녀’라 여기고 소유하려 든다. 골동품 가구와 오래된 시계 등은 시대를 초월해 존재해왔으며, 육체의 유한성과 대비된다. 제호는 이러한 물건들에 매력을 느낄 뿐만 아니라, 그것들이 매개하는 여인들까지 욕망한다. “멋진 물건”이 사람의 마음을 뒤흔든다고 말하는 제호에게 ‘그녀’는 물신화된 객체다. 머리카락은 곧잘 페티시의 대상이 되곤 하는데, 표피에 붙어있는 신체 부위이지만 잘라내도 인간이 통증을 느끼지 않고, 천천히 부패하는 속성을 지닌다. 원작 「머리카락」에서는 부분 대상에 대한 남성의 도착적 욕망이 훨씬 더 노골적으로 표면화된다. 그런데 제호의 행위는 언뜻 상실에 대한 애도나 그리움의 형태처럼 비치기도 한다.
무는 「꿈」에 등장하는 의사를 모티프로 만들어졌다. 원작의 의사는 현실과 동떨어지고 연결성이 없는 꿈은 거부하지만, ‘깨어있는 상태에서 꿈꾸기’를 원한다. 비이성, 몽상과 같은 것들이 아니라 사유에 의한 지혜와 새로운 시각, 판단력을 얻는 데서 즐거움을 만끽하는 것이다. 무 또한 혼돈을 좋아하지 않으며, 질서와 규칙을 중시한다. 그가 어질러진 블록들을 습관적으로 정리할 때, 이러한 성격적 특성이 나타난다. 병원에서는 무의 통제로 인해 환자들의 개별성이 인정되지 않고, 집단적인 동일성만이 강요된다. 무는 구성원들의 이름을 부르는 대신 호루라기로 그들을 소집한다.
본문이미지3
“비정상인”과 결코 대화하지 않으려는 무에게 모파상은 반기를 든다. 처음에는 자신도 환자들을 흥미로운 소재의 대상으로 바라봤지만, 대화를 통해 그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모파상은 병원을 맴돌면서, 자신이 수집한 인물들의 이야기를 종종 기록한다. 원작에서는 인물들이 일기(「머리카락」), 편지(「그 사람」), 대화(「화성인」)를 통해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는 방식을 취한다. 각각의 이야기에는 인물과 사건을 바라보는 의사, 수신인, 대화자 등의 외부자적 시선이 직간접적으로 등장한다. 인물들은 글과 말로써 ‘그녀’, ‘그들’, ‘그’의 존재를 진술하려 하지만, 진실이 온전히 전달되지 않고, 외부자적 시선으로 하여금 판단을 유보하게 만든다. 연극에서도 이 구조가 반복되는데, 이번엔 모파상이 프레임 안으로 들어가 캐릭터들과 상호작용하며 사건을 만든다. 독일어(null), 스페인어(cero), 프랑스어(zéro), 한자(無)로 각각 ‘0’을 뜻하는 이름을 가진 네 캐릭터는 이들이 만났던 ‘그녀’, ‘그들’, ‘그’와 같이 현실을 넘어선 (비)존재가 된다. 극은 「머리카락」의 서사구조처럼, 프레임 바깥에서 모파상을 관찰하고 진단하는 외부자의 목소리를 시작과 끝에 반복해서 배치한다.
변주와 반복의 장치는 또 있다. 첫 장면에 나온 집단 체조는 병원의 억압적인 획일성을 나타낸데 반해, 결말에 다다라 변주, 반복된 집단적 춤은 이성과 광기가 짝패를 이루는 공간성을 표상한다. 모파상은 환자들과 의사에게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지만, 그 또한 “비정상”으로 가득한 병원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겨냥한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잘 생각해봐. 내가 누군지.” 의사가 말하는 ‘나’는 그 자신,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며 캐릭터를 규정짓는 작가를 가리킨다. <환상의 모파상>은 작가 모파상에게 말을 건네는 방식으로 영리하게 마무리된다. 작품의 표층적 구조는 이성과 광기 혹은 현실과 환상이라는 테마를 제시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주목하고 싶은 것은 무의 마지막 대사다. 너는 누구인가, 그렇다면 나는 누구인가? 이는 작가, 예술가, 나아가 인간이 타자를 판단하기 이전에 ‘나’와 타자의 관계 속에서 끊임없이 제기해야 하는 질문이다. <환상의 모파상>은 독립적이지만 결이 비슷한 고전들을 선정하고 짜임새 있게 엮어내, 동시대적인 맥락을 구성해냈다.

[사진제공 : 극단/소극장 산울림]

디오티(DOT) <환상의 모파상>
일자
2021.03.03(수)-2021.03.14(일)

장소
소극장 산울림

원작
기 드 모파상 <화성인> <그 사람> <머리카락> <꿈>
작/연출
장은실
출연
김학준 허영손 김기태 신용빈 박상준 강동엽
무대
양이삭
조명
곽태준
음향
이예은
의상
김은지
음악
유승찬
안무
김경용
조연출
윤지원 최기욱
사진
엄선아
웹디자인
백경찬
주최
아트판 극단/소극장 산울림
주관
아트판
관련정보

https://tickets.interpark.com/goods/2100067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