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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승준 <어둠 속의 코끼리>

이야기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다시 이야기가 되는 세계

박다솔
197호 2021.03.25
이따금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우면, 짙은 어둠 속에서 현실 속 이미지 혹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 온다. 뒤척이다 간신히 잠에 들어서도 어떤 이미지들은 꿈속으로 스며들어와 나의 밤을 헤집는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밤새 나를 침입해온 장면들은 그 구체성을 잃고 아주 단편적인 심상이나 감각들로만 남곤 한다. 나는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업(業)이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파편적으로 남은 것들을
이따금 잠들지 못하는 밤이 있다. 방 안의 불을 끄고 침대 위에 누우면, 짙은 어둠 속에서 현실 속 이미지 혹은 현실보다 더 생생한 이미지들이 나를 덮쳐 온다. 뒤척이다 간신히 잠에 들어서도 어떤 이미지들은 꿈속으로 스며들어와 나의 밤을 헤집는다. 그리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 밤새 나를 침입해온 장면들은 그 구체성을 잃고 아주 단편적인 심상이나 감각들로만 남곤 한다. 나는 ‘작가’라 불리는 사람들의 업(業)이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파편적으로 남은 것들을 그러모아 자신의 언어로 새로 쓰고, 그 세계를 다시 조직해 내는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누군가의 환상이나 공상에서 시작된 것들이 글로써 이미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이루고 있다 하더라도, 어떤 사람들은 그 글 속에서 다시 태초의 심상과 이미지를 찾아내고 이를 새로 그리고 설계하여 무대 위에 세우는 업을 수행한다.
무대미술가 정승준이 참여 및 연출한 전시 <어둠속의 코끼리>는 연극 작업을 주로 하고 있는 수십 명의 무대미술가를 인터뷰한 내용을 다시 텍스트, 영상, 음성 등 다양한 방식으로 편집하여 이 업을 수행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전시가 이뤄진 장소인 을지로OF는 총 네 개의 방(유다미 <Fairy tale workshop>, 장주희 <현전의 고백>, 유태희 <Multibus>, 그리고 정승준의 <검은방>)으로 공간이 구획되어 있다. 이 네 개의 방은 무대미술가의 작업방식, 예술가로서의 여정, 갈등 혹은 고민 등을 주제화 하는 동시에, 작가에 따라 어떻게 각기 다른 결과물이 나올 수 있는지를 실험한다. 이들 모두 같은 방 안에서 같은 코끼리(혹은 실체를 알 수 없는 그 무엇)를 마주하고 있지만, 각자의 방 안에 풀어둔 코끼리는 각기 다른 모양새를 하고 있다.
전시의 제목인 <어둠 속의 코끼리>는 무언가의 실체를 완전히 보지 못한 자들이 자신이 감각한 부분만을 근거로 전부를 속단할 때 쓰는 말인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표현을 오히려 긍정적으로 비틀어 사용한다. 만약 그 어느 누구도 정확하고 분명하게 실체를 파악할 수 없는 복잡다단한 대상이 우리의 어둠 속에 놓여있는 코끼리라면, 과연 그 누가 서로의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겠냐고 묻고 있는 것이다. 이 전시는,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다만 모든 감각을 활용해 코끼리를 느껴야 하고, 이 코끼리를 자유롭게 상상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그려낼 수 있을 뿐이라고 말한다. 여기, 우리의 코끼리(혹은 그 무엇)가 모두의 해석이 존중받는 유토피아적 세계에, 칠흑 같은 어둠으로 둘러싸인 세계에 놓여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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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이미지가 되고, 이미지가 다시 이야기가 될 때

유다미의 <Fairy tale workshop>이 전시된 검은 방엔 인터뷰 영상을 상영하는 빔프로젝터의 불빛을 제외하고 다른 빛은 없다. 관람객은 손전등으로 그림과 텍스트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는 벽면을 부분적으로 비춰가며 전시를 관람해야 한다. 이 방의 벽에는 동화 워크숍에 참여했던 일곱 명의 공연 디자이너들의 워크숍 과정이 담긴 결과물들이 이미지와 텍스트로 걸려 있지만, 시야가 제한된 관람객들은 이들의 그림, 이미지, 이야기들을 부분적으로만 바라보게 된다. 내가 보고 있는 곳이 코끼리의 코인지 다리인지 한 번에 파악하지 못한 채, 관람객들은 이들이 그려낸 코끼리를 다시 더듬어가며 만나게 된다.
작가가 제목에서 사용하고 있기도 한 ‘동화 워크숍’은 무대디자이너 얀 스테파노(Jan Stepanek)의 작업을 참고한 것으로, 참가자는 그림형제의 동화들 중 각자 하나의 동화를 선택하고 해당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여러 방식으로 표현해본 뒤 이를 자기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쳤다. 유다미는 총 다섯 단계로 워크숍 과정이 진행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1.동화를 선택한 이유와 기억에 남는 장면 표현하기. 2.동화에서 느껴지는 감정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3.자신이 느낀 감정과 부합하는 다양한 이미지 찾기. 4.자신이 겪은 일들 중 동일한 감정을 유발했던 사건/상황 이야기하기. 5.4번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를 자신만의 동화로 창작하기. 명시된 워크숍의 각 단계는 무대미술가가 희곡의 이야기를 이미지화 하고 이를 다시 자신만의 창작물로 만들어내는 일련의 과정을 암시한다. 특히, 같은 동화를 선택한 두 사람(유다미, 송영재)을 인터뷰한 영상은 동일 텍스트가 해석의 태도나 감상에 따라 다른 이미지, 다른 이야기로 도출될 수 있다는 점을 분명한 태도로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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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일한 코끼리를 그리는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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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다미의 방이 무대미술가가 텍스트를 기반으로 이를 다시 이미지화하고 자기화하여 창작까지 이어지는 과정을 펼쳐 보이고 있다면, 다른 세 사람은 현장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무대미술가의 작업방식 뿐만 아니라 그들이 무대미술가로 살아온 여정, 현실적인 고민들에 집중한다.
첫 번째 방을 나와 다음 공간으로 들어가면, 방 안에 작은 방이 하나 더 붙어 있는 곳이 나온다. 흰 페인트 벽에 누군가의 목소리들이 활자로 인쇄되어 무작위하게 배치되어 있는 이곳은 유태희의 <Multibus>가 전시된 방이다. 방의 한 구석에는 인터뷰 영상이 재생되고 있다. 이 방을 채운 목소리들은 무대미술가가 되기까지의 삶, 연극 대본을 읽고 이를 디자인으로 발전시키는 방법, 연극에 대한 생각을 주로 말하고 있다. 인터뷰 내용 중 가장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은, 몇몇 무대미술가들이 스스로를 ‘난독증’, ‘ADHD' 등으로 진단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사람들에게는 텍스트를 손쉽게 읽어내는 능력이 없을지 몰라도, 이들은 이야기에서 떠오르는 이미지들로 씨줄과 날줄을 엮어 한 세계를 건축해내는 사람들이다. 이 인터뷰 영상을 통해 거듭 강조되는 사실은 모든 무대미술가들은 텍스트를 분석하고 이를 이미지화하는 자신만의 고유한 방법을 가지고 있고, 이 다양성이 결국 유일한 얼굴을 한 코끼리를 그려낸다는 점이다.

어둠 속에서 빛이 되어주는 것들

앞선 전시들이 무대미술가의 작업과 그 전문성을 주제화하고 있다면, 인터뷰 영상을 비디오 아트로 전시한 장주희의 <현전의 고백>이나, 인터뷰를 조각조각 이어 붙여 어둠 속에서 조명이 빛나고 있는 듯한 효과로 연출한 정승준의 <검은방>은 보다 더 사적인 시선으로 인터뷰에 접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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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주희는 인터뷰이를 질투하거나 자신과 그들의 교집합을 찾아내려는 등의 방어적인 행동을 보였던 자신을 마트료시카 인형에 비유하며, 인터뷰이를 정직하게 바라봄으로써 자기 자신도 자신의 겹을 이루고 있던 껍질을 벗어내게 되었음을 고백한다. 반면, 정승준은 인터뷰이가 내뱉는 사소한 말들이 이 막막했던 세계에서 어렴풋이 길을 가늠하게 만드는, 이를테면 동방박사의 별들과도 같은 것이라 밝힌다. ‘어둠 속의 코끼리’, 이 비유는 연극의 무대미술가가 희곡을 감각하고 표현해내는 다양한 방식을 대변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미래가 불분명한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무대예술가에게 건네지는 희망의 말이기도 하다. 때로는, 자신의 방 안에 코끼리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희망을 가지게 되기도 하니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코끼리에게 다가가 이것을 감각하고 표현해내는 일일테다. 이에 응답하듯, 정승준의 <검은방>에 놓여 있던 방명록에는 동료, 선후배 무대미술가가 남긴 메시지가 가득했다.
나는 글의 서두에서 작가의 업이 자기 내면에 떠다니는 것들을 작가만의 언어로 새로 쓰는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동시에 내게 반문해보았다. 무대미술가의 언어를 낱낱이 읽어본 일이 많은지, 그들이 직조한 세계에 얼만큼 오랫동안 눈길을 두었었는지. 그들이 감각한 코끼리를, 나는 잘 상상해내고 있었는지 말이다. 이 질문을 던진 것만으로도, 나는 어둠 속에서 나의 코끼리를 만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사진촬영 : 을지로OF]

정승준 <어둠속의 코끼리>
일자
2021. 3. 4(목) ~ 2021. 3. 14(일)

장소
을지로 오브OF

연출
정승준
영상
장주희
미술
유다미
촬영
유태희 김미루
포스터
한만오
기획
이우경 김서희 김민경
주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주관
한국예술창작 아카데미
관련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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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