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타비평] 연극평론가 백두산의 <명색이 아프레걸> 리뷰를 중심으로
비평가의 렌즈로 공연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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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촬영/편집 : 김지성, 녹음 : 윤비원, 음향 믹싱 : 임나윤)
그렇다면 영화사에서도, 여성사에서도 아직 낯선 이름인 박남옥과 한국전쟁 이후 등장한 새로운 여성상인 ‘아프레걸’은 무대 위에서 어떻게 만나는가. 이 어색하고도 낯선 만남이 어떠했는지, 연극평론가 백두산이 지난 3월 발간된 <연극평론>(100호)에 기고한 리뷰 ‘아프레, 창극, 경계의 불안’이 하나의 길잡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하여 이 글에서는 공연 관람의 주관적 경험 위에 연극평론가 백두산의 글을 겹쳐 읽으며 그가 제시한 주제어들을 따라가 보았다. 결과적으로 그 주제어들은 공연을 톺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렌즈 역할을 하였다.
박남옥과 아프레걸
당대 전형으로서의 ‘아프레걸’은 새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이해하였음에도 결국 전쟁에 억눌린 사회와 윤리 저 편의 ‘아프레’여서 불안을 느끼며, 해놓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사회로 돌아와 구명(救命)을 바라는 패잔병의 형상으로 그려진다. (중략) 작품은 박남옥이 ‘아프레걸’로서 겪는 갈등의 본령을 김신재(백나현 분)에 대한 동경으로부터 벗어나는 과정으로 집약한다. 김신재는 남편의 외도를 덮은 채 ‘밝은 미소’의 배우로 남았고, 전쟁으로 삶의 방향을 잃은 인물이다. 이 관계 속에서 전쟁과 가부장, 아프레걸을 둘러싼 갈등의 요소들은 작품에서 슬며시 치워지거나 그림자 정도로 처리된다. (중략) 흥미로운 것은 박남옥과 <미망인>에 출연하는 여성들이 보여주는 아프레의 자세, 고통 속에서도 ‘그거야 어떠랴’ 넘기는 삶의 방식이다. 나실인이 작곡한 작품의 밝고 경쾌한 테마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의 선율과도 같이, 작품에 등장하는 아프레걸은 고통과 실패보다는 전진과 성취에 걸맞은 인물로 그려진다. 그녀들은 극복했다기보다는 버텼다는 것이 온당할 존재들이다.
공교롭게도 작가 정비석이 《자유부인》을 <서울신문>에 연재하고 있던 시기에 박남옥은 <미망인>을 촬영하고 있었다. 박남옥이 영화감독으로 카메라 앞에 섰을 당시 영화 현장에서 감독으로 카메라의 시선을 장악하는 것은 주로 남성들에게만 허락되었고 여성은 어떤 캐릭터를 연기하느냐와 무관하게 카메라에 포착되는 수동적인 역할로만 존재했다. 연출가의 변에 따르면 김광보는 영화감독 박남옥을 이러한 시선의 권력에 대한 도전자로 그림으로써 ‘아프레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전복시키고자 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극이 전개되는 동안 ‘명색이 아프레걸이라면’이라는 넘버 외에는 작품 제목에 ‘아프레걸’이 나와야 할 정도로 아프레걸과 영화감독 박남옥이 등치되어야 할 이렇다 할 맥락이 잘 읽히지는 않는다. 박남옥은 극 내내 부족한 제작비를 조달하느라, 촬영에 필요한 장비를 수급하느라 동분서주하지만 촬영 현장에서 ‘여성’ 영화감독으로 부딪치는 난관이나 이혼으로 막을 내리게 되는 남편과의 갈등은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는다.
백두산 평론가는 극에서 표현된 박남옥의 인물상에 대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해내고 마는 공적인 여성의 삶, 박남옥의 영화제작 ‘일’의 성취에 집중하는 셈”이라고, “과거회상 역시 영화제작의 ‘성취’라는 공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다고 지적하며, “이 조리법이 과연 전후의 여성 예술가의 삶을 보여주는 효과적인 방식이었을까”라고 의구심을 표한다. “전쟁과 가부장, 아프레걸을 둘러싼 갈등의 요소들은 작품에서 슬며시 치워지거나 그림자 정도로 처리된다”라는 문장은 매우 완곡하지만, 아프레걸로서 박남옥의 삶이 재맥락화되는 데까지 이르지 못했다는 뼈아픈 비판이다.
음악극이라는 경계의 불안
<명색이 아프레걸>에서 일상의 대사와 연결되는 가창 장면은 매끄럽게 처리된 편인데, 방영자(조유아 분)의 가창으로 출발하여 합창으로 매조지되는 ‘명색이 아프레걸’과 같은 넘버는 관객들의 호응을 자아냈다. 다소 아쉬웠던 것은 인물의 정서와 감정을 담는 소리들이었다. 특히 박남옥과 김신재의 이중창은 비슷한 선율로 작곡된 데다가 가사 전달력이 약해, 극을 이끄는 갈등을 이해하기 위한 중요한 장면이었음에도 무대 좌우의 자막이 없었다면 내용을 파악할 수 없었을 뻔하였다. 한편으로 이 작품에서는 뮤지컬의 어법을 따르는 과정에서 여타 ‘현대 창극’을 표방하였던 여러 실험적 작품들에서도 대체로 흉내라도 내었던 판소리조와 소리의 여백에 대한 고려를 과감하게 없애, 고저장단의 변화는커녕 시김새를 넣을 여유도 주지 않았다.
박상봉이 디자인한 무대는 달오름극장의 무대를 상하로 나누어 위편은 배경을 영사하여 수시로 바뀌는 공간으로, 아래편은 <미망인>의 촬영공간으로 분할하였다. 동선은 다소 밋밋한 편이었고, ‘명색이 아프레걸’과 같은 테마나 김신재와 박남옥의 이중창 등 중요 가창장면이 도드라지도록 배려된 공간의 스펙터클은 찾기 힘들었다. 위편 무대는 주로 국립무용단의 무용을 위해 마련된 빈 공간처럼 보였는데, 무용의 움직임은 극의 내용을 설명하거나 강화하는 지시적인 기능에만 국한되어 흥미가 덜하였다.
국립무용단의 무용수들은 아래편 무대로 내려오는 일 없이 위편 무대에만 등장해 박남옥의 과거 회상을 돕는 역할을 한다. 백두산 평론가는 무용 장면에 대해 흥미가 덜하였다고 간략하게 적었지만 이는 공연 <명색이 아프레걸>에서만 드러나는 문제는 아니다. 극과 춤이 결합되는 공연에서 배우들이 중앙에서 연기를 하는 동안 무용수들에게 배경에서 춤을 추는 보조적인 역할을 맡기는 연출은 작품을 막론하고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춤을 춤 그 자체로 드라마에 녹여내는 방법을 찾지 못했거나 찾지 않는 연출가들이 많은 데다, 뮤지컬 등에서 배우가 춤과 연기를 함께 소화하는 데 비해 무용수가 춤 외에 다른 역할을 부여받는 경우는 흔치 않다. 음악과 대사가 맞물려 전개되는 극에서 춤의 역할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으니 사실상 ‘합동공연’이라는 표현이 무색해지는 현실이다. 단체 간 협업에서도 ‘경계의 불안’은 여지없이 드러난 셈이다.
비평의 태도와 흐려진 초점
‘비평의 몰락’이나 ‘비평 적대 시대’라는 표현이 낯설지 않은 시대에 비평은 더욱 조심스러운 작업이 되었다. 그렇기에 백두산 평론가가 “재료와 조리법 안에 내재된 경계의 불안”을 지적한 뒤, 미래에 재평가될 가능성으로 글을 마무리한 것 역시 그러한 조심스러움이 낳은 결과일지 모른다. 비평에 대한 비평이라는 메타비평의 태도 역시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글을 읽는 내내 작품을 톺아보게 해주었던 렌즈가 마지막의 희망 섞인 모호한 전망을 비추면서 초점도 덩달아 흐려지고 만 것은 사뭇 안타까운 일이다. 한 작품에 대한 반응이 기꺼운 찬사 일색일 수만은 없기에 비평문은 대개 온건한 비판과 에두른 아쉬움, 흐릿한 제언으로 마무리되기 십상이지만, 본문 속에 슬쩍슬쩍 비쳐진 아쉬움과 의구심이 차라리 뾰족한 문장으로 다듬어졌다면 제시된 주제어들에 더욱 힘을 실어주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