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극장 개관5주년 기념공연 <바다쓰기>
정답과 오답으로 나뉜 세계에 대한 재기발랄한 일침
박재연
201호
2021.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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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를 지키자는 환경 연극인거 같은데요?” “한글을 잘 사용하자 뭐 그런 이야기 아닐까요?”
“바다를 지키자는 환경 연극인거 같은데요?”
“한글을 잘 사용하자 뭐 그런 이야기 아닐까요?”
“한글을 잘 사용하자 뭐 그런 이야기 아닐까요?”
<바다쓰기>를 보러 가는 길, 무슨 내용인지 묻는 아이들의 질문에 동행한 아이 친구 엄마와 나눈 대화다. ‘종로 아이들극장에서 한다니 좋은 연극이겠지’하며 별다른 사전 정보(나 대단한 기대) 없이 선택한 작품이었다고, 리뷰를 시작하기 전 솔직히 고백해 본다. 물론 ‘배우들과 매쓰 게임이라도 하는 양 구호를 주고받거나 아이 하나를 무대로 올라오게 하여 이름과 나이를 물은 뒤, 간단한 손조작 마술을 시연하면서 체험형 콘텐츠를 표방하곤 하는 아동극’은 아닐 것이라는 최소한의 확신은 있었다는 사실도 살짝 덧붙인다.
받아쓰기가 너무 어렵고 싫지만 새로운 스마트폰을 갖기 위해 꼭 백점을 맞아야 하는 딜레마에 빠진 열 살 서우. 극이 시작되자마자 관객들은 곧바로 서우가 된다. 예나 지금이나 ‘받아쓰기’는 누구나 맞닥뜨리는 경험이기 때문이다. 무대에 등장한 선생님께서 받아쓰기 시험 문제를 불러주시면, 많은 어린이 관객들은 약속이나 한 듯 처음 한두 문제는 그래도 집중해서 받아 적고, 그 다음 한두 문제는 그냥 들리는 대로 받아 적고, 그 다음 한두 문제는 딴생각을 하다 놓치고, 마지막 한두 문제는 너무 길어서 귀찮은 나머지 안 써버린다. ‘휴, 역시 받아쓰기는 태도의 문제야, 들리는 대로 쓸 게 아니라 맞춤법을 잘 외워서 써야지!’ 옆에 앉은 엄마는 선생님 역을 맡은 배우의 능청스러운 연기에 깔깔대면서도 아이들의 답안지에 자못 신경이 쓰인다.
사람이 안다는 것에서 지적인 부분은 3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지적인 판단이 ‘앎’의 전체인 것처럼 여긴다. <바다쓰기>는 언어에 대한 지적인 훈련이 강요하는 어떤 것, 즉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장 익숙하고 기초적인 사회적 규범과 장치가 우리 개개인의 삶에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다들 경험해봤겠지만, 받아쓰기에 나오는 문장은 전후 맥락은 상관없이 중간만 뚝 잘라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전체적으로 뚜렷한 서사 구조로 연결 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이러한 무맥락성은 받아쓰기를 더 어렵다고 여기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바다쓰기>의 구성 역시 다소 산발적이고 무맥락적, 탈맥락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서우가 만나는 한글과 관련된 세 명의 인물들 – 엄마의 지나친 간섭과 학업스트레스로 교우관계와 자존감에 문제를 겪고 있는 친구 솔지,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해야하는 ‘석사학위소지 외노자 필리핀 아저씨’ 크리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신다운 삶을 살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 – 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자의 서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각각의 사연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행동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곧 공감을 하게 된다. 글자에(혹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의(혹은 교감의) 필요성이나 즐거움을 알아 가는 과정, 공부를(혹은 인생을) 어려워하지만 잘하려 애쓰는 이들의 절실함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안다는 것에서 지적인 부분은 30퍼센트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지적인 판단이 ‘앎’의 전체인 것처럼 여긴다. <바다쓰기>는 언어에 대한 지적인 훈련이 강요하는 어떤 것, 즉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가장 익숙하고 기초적인 사회적 규범과 장치가 우리 개개인의 삶에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이야기다. 다들 경험해봤겠지만, 받아쓰기에 나오는 문장은 전후 맥락은 상관없이 중간만 뚝 잘라놓은 것들이 대부분이라, 전체적으로 뚜렷한 서사 구조로 연결 되지 않는다. 사실 많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에게 이러한 무맥락성은 받아쓰기를 더 어렵다고 여기게 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이러한 점에서 <바다쓰기>의 구성 역시 다소 산발적이고 무맥락적, 탈맥락적으로 보인다는 점은 매우 흥미롭다. 서우가 만나는 한글과 관련된 세 명의 인물들 – 엄마의 지나친 간섭과 학업스트레스로 교우관계와 자존감에 문제를 겪고 있는 친구 솔지, 불합리하고 비인간적인 대우를 감내해야하는 ‘석사학위소지 외노자 필리핀 아저씨’ 크리스, 경제적이고 사회적인 이유로 한글 교육을 받지 못하고 자신다운 삶을 살 기회가 없었던 할머니 – 은 각기 다른 목소리로 각자의 서사를 말한다. 그런데 이야기가 전개될수록 관객들은 각각의 사연을 지닌 등장인물들의 마음과 행동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곧 공감을 하게 된다. 글자에(혹은 세상에) 대한 호기심과 배움의(혹은 교감의) 필요성이나 즐거움을 알아 가는 과정, 공부를(혹은 인생을) 어려워하지만 잘하려 애쓰는 이들의 절실함이 서로 닮아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극으로서 <바다쓰기>의 연출이 지닌 미덕 중 하나는 ‘치고 빠지는’ 리듬을 굉장히 현명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온라인 검색을 통해 언어 대신 시각적 이미지로 지식을 습득하는 영상 언어 세대의 특징이라든가, 틱톡과 같이 짧고 감각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는 휘발적인 소통의 양상에 대해 감각적인 방식으로 짚어 나가며 동시대 어린이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낸다. 서우의 할머니가 어렵사리 한글을 배워 마음을 담아 편지를 띄우고자 하는 대상이 자신의 엄마 혹은 남편이 아닌 (임)영웅님이라는 점 역시 뻔하고 신파적인 감동을 선사하는 도구로서의 연출용 언어가 아닌, 개인적 표현 자체로서의 언어의 가치를 자연스럽게 전달한다.
세대 갈등, 계급 갈등 등 소외와 배척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다쓰기>는 작금의 세태와 현 세대에 대한 날렵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사회극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크리스 아저씨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되는데, 정당한 권리로서의 노동의 가치를 폄훼당하며 돈을 ‘받아 써야’ 하는 이들이 느껴야 하는 수치심과 비굴함을 다소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면면들을 까발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하는 법(들)은 너무나 쉽게 어기고 무시하면서, 겹받침입네 이중자음입네 하는 맞춤법은 무조건 외워서 따라 써야 한다고 하는 사회. 크리스 아저씨가 터뜨린 분통어린 울음은 이러한 것들이 약속이고 코드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누구를 위해 어떠한 내용을 담은 약속이고 누가 결정한 코드인지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단순한 외노자에 대한 차별에서 나아가, 크리스 아저씨의 서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타자의 언어로 강요된 ‘받아쓰기’에 맞서는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지닌 혼종성의 가치1)이자 단일 민족의 신화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의 프레임에 갇힌 우리 안의 옹졸함이다.
세대 갈등, 계급 갈등 등 소외와 배척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바다쓰기>는 작금의 세태와 현 세대에 대한 날렵한 현실 인식을 보여주고 있는 사회극이다. 이러한 주제의식은 크리스 아저씨를 통해 가장 직접적으로 구현되는데, 정당한 권리로서의 노동의 가치를 폄훼당하며 돈을 ‘받아 써야’ 하는 이들이 느껴야 하는 수치심과 비굴함을 다소 적나라하게 드러냄으로써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면면들을 까발린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지켜야하는 법(들)은 너무나 쉽게 어기고 무시하면서, 겹받침입네 이중자음입네 하는 맞춤법은 무조건 외워서 따라 써야 한다고 하는 사회. 크리스 아저씨가 터뜨린 분통어린 울음은 이러한 것들이 약속이고 코드라고 이야기하기 전에 누구를 위해 어떠한 내용을 담은 약속이고 누가 결정한 코드인지 생각해보기를 권한다. 단순한 외노자에 대한 차별에서 나아가, 크리스 아저씨의 서사가 보여주고 있는 것은 타자의 언어로 강요된 ‘받아쓰기’에 맞서는 다양한 말하기 방식이 지닌 혼종성의 가치1)이자 단일 민족의 신화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의 프레임에 갇힌 우리 안의 옹졸함이다.
무엇보다 <바다쓰기>의 가장 큰 매력은 영웅이나 악당이 등장하는 판타지 소재가 아니라, 진짜 우리아이들의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는 점이다. ‘어린이극’ <바다쓰기>는 아이들(과 그들의 양육자들)의 비위를 맞추고 환심을 사기 위한 형형색색의 알록달록한 무대와 요란한 음향, 양육자들을 안심을 시키기 위해 ‘착한’어른의 일방적인 마음으로 범벅이 된 채 단순한 교훈을 반복적으로 주입시키는 어린이극에 지친 관객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던진다. 특히 강한 비트의 음악과 어두운 조명으로 휩싸인 극의 클라이막스 장면에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획일화시키는 우리 사회의 모습을 고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칠게 책을 던지고 밟아대는 배우들의 행위를 통해 어른과 어린이 관객 모두에게 가슴 철렁한 통쾌함을 선사한다. 너무나 익숙해서 인지하지 못했던 일상의 사소한 장치에서 시작된 작은 질문들을 심어주며 자신도 모르게 사회의 기준에 맞추어 규격화되어가는 어린이들에게 소소한 해방을 던져주는 것이다.
<바다쓰기>는 맞고 틀리다 만으로 결정된 세계, 정답 혹은 오답으로 나뉜 세계가 아닌, 그 사이의 느슨한 경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틈새를 누비는 상상력을 답보해주는 작품이다. 맞고 틀린 것, 좋고 나쁜 것으로 교육받아온 수많은 사회적 규칙들은 실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비록 정답은 아니라도 내게 그렇게 들렸으면 그렇게 들린 대로, 어리둥절하면 어리둥절한 대로 갸우뚱할 수 있는 자유. 이처럼 <바다쓰기>는 오늘 여기 우리의 처지에서 비판적으로 어린이극을 경험해 보는 것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좋은 어린이극이란,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마비된 시선을 인식하게 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은 질문을 심어주는 극이리라.
열 살 남자아이를 둔 엄마로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서우 역을 맡은 배우의 표정과 말투, 눈빛과 발짓이 정확하게 매치되지 않고 어긋나던 순간들이었다. 그 미묘한 불일치의 순간들은 모든 마음과 감정을 명확하게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 뼘씩 자라나고 있는 마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그 마음을 스스로 받아쓰려고 해보는 것. 모두에게 그런 ‘바다쓰기’가 가능한 세상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바다쓰기>는 맞고 틀리다 만으로 결정된 세계, 정답 혹은 오답으로 나뉜 세계가 아닌, 그 사이의 느슨한 경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틈새를 누비는 상상력을 답보해주는 작품이다. 맞고 틀린 것, 좋고 나쁜 것으로 교육받아온 수많은 사회적 규칙들은 실은 누군가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시스템일지도 모른다. 비록 정답은 아니라도 내게 그렇게 들렸으면 그렇게 들린 대로, 어리둥절하면 어리둥절한 대로 갸우뚱할 수 있는 자유. 이처럼 <바다쓰기>는 오늘 여기 우리의 처지에서 비판적으로 어린이극을 경험해 보는 것의 가능성과 필요성에 대해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결국 좋은 어린이극이란, 아이들로 하여금 어른들에 의해 무비판적으로 수용되는 마비된 시선을 인식하게 하고 각자의 방식으로 그 과정을 추적하는 작은 질문을 심어주는 극이리라.
열 살 남자아이를 둔 엄마로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서우 역을 맡은 배우의 표정과 말투, 눈빛과 발짓이 정확하게 매치되지 않고 어긋나던 순간들이었다. 그 미묘한 불일치의 순간들은 모든 마음과 감정을 명확하게 언어로 설명해야 하는 것은 아니며, 그럴 수도 없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다. 불러주는 대로 받아 적는 것이 아니라 자신도 모르는 새에 한 뼘씩 자라나고 있는 마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그 마음을 스스로 받아쓰려고 해보는 것. 모두에게 그런 ‘바다쓰기’가 가능한 세상을 꿈꾸며, 글을 마친다.
[사진제공 : 종로문화재단]
아이들극장 개관5주년 기념공연 <바다쓰기>
- 일자
- 2021.04.23.~2021.05.08.
- 장소
- 아이들극장
- 작/연출
- 강훈구
- 출연
- 우요한 이재희 김보경 김솔지 Lagahit Christian
- 조명디자인
- 이경은
- 기획
- 고소미
- 음악감독
- 이재
- 무대감독
- 이지혜
- 의상디자인
- 온달
- 조연출
- 이경은
- 무대디자인
- 김혜림
- 영상촬영
- 권순현
- 예술감독
- 김숙희
- 기술자문
- 장주희
- 탈식민주의적 글쓰기에서 받아쓰기는 식민주의에 대한 저항으로서 이루어지는 되받아쓰기 혹은 다시 쓰기(Writing Back)의 반대항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