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 907 <홍평국전>
경계를 파괴하고 존재를 발견한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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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웅은 난세여야 나타난다. 그러니 영웅은 존재 근원부터가 이중적이다. 세상의 혼돈을 잠재운 후 영웅은 스스로가 혼돈이 되는데, 보편과 특수가 혼재된 존재로서 어디에도 온전히 속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이디푸스는 길을 떠났고, 어떤 것으로도 의미화 될 수 없는 존재로 남았다. 여성이 영웅으로 등장하는 서사 또한 이 같은 영웅 신화의 원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다만, 남성 영웅 서사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지점이 덧붙는데, 젠더 정체성에 대한 부분이 그러하다. 남성중심적인 사회 체제 속에서 여성 인물이 활약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남성성이라는 사회적 정체성이 동반되어야만 한다. 이 지점은 생물학적 여성으로서의 여성성을 요구하는 사회와 인물 스스로 구축해온 남성성 간의 괴리를 경험하게 만드는데, 그 과정에서 여성 영웅은 필수적으로 젠더 정체성에 대한 혼돈을 겪게 된다.
연극 <홍평국전>은 이 같은 화두를 재치 있고 영리하게 담아낸 작품이다. 소설 「홍계월전」을 연극으로 각색한 <홍평국전>은 변경된 제목에서부터 작품의 방점이 어디에 있는지 짐작하게끔 한다. 포스터에 기재된 제목에서 글자 각각의 글꼴이 다른 점 또한 흥미롭다. 글자마다 홍평국의 서로 다른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처럼 이해되기 때문이다. 난세와 다름없는 작금의 시대에 혜성처럼 등장한 <홍평국전>이 던지고 있는 화두는 무엇일까 궁금해진다.
존재의 발견과 영웅의 이중성
「홍계월전」은 조선 후기의 고전소설로서, 명나라를 배경으로 하여 홍계월의 일대기를 묘사한 작품이다. 조실부모한 홍계월은 스스로 평안할 평(平)자와 나라 국(國)자를 조합하여, 홍평국이란 남성으로서 살아갈 것을 ‘선택’한다. 그 후 비범한 능력으로 격난에 빠진 나라를 수차례 구해내며 독보적인 활약을 펼치고, 잃었던 부모를 상봉하며 천자로부터 인정받아 높은 관직을 하사 받는다. 「홍계월전」은 다양한 이본(異本)이 있는데, 그만큼 결말 또한 다양하다. 한국학중앙연구원 45장본 『홍계월전』에서는 홍계월이 여보국과 자손을 낳고 그 자손들이 각각 ‘여’와 ‘홍’의 성씨를 물려받아 오나라와 초나라의 태자가 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홍평국전> 또한 대체로 원작 서사와 유사하게 진행되는데, 제목이 ‘홍계월전’이 아닌 ‘홍평국전’으로 명시된 지점이 인상적이다. <홍평국전>에서 홍평국은 ‘계월’이라는 생물학적 정체성보다 ‘대원수’라는 사회적 정체성과 더 밀접하게 연관된 인물이다. 모든 남성을 월등히 뛰어넘는 전력과 전술은 홍평국을 남성 사회 속 수직적 신분 관계에서 극 상층에 자리 잡게끔 한다. 홍평국이 신체적으로 여성임이 드러난 이후에도 홍평국의 신분에는 큰 변화가 없다.
다만, 오롯이 홍계월/홍평국/홍원수로 남고자 했던 홍평국에게 아내로서의 역할이 강요됨으로써, 홍평국은 자신이 부리던 대상을 남편으로 섬겨야 하는, 사회에서의 신분 관계가 가정에서 전복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홍평국은 자신이 구축해온 사회적 정체성에 대해 번민하게 된다. 관객은 홍평국의 번민을 통해 동시대적 문제의식을 발견하게 되는데, 가부장적인 사회 질서가 개인의, 특히 여성의 자아 정체성 형성에 영향을 미침을 확인하게 된다. 또, 사회적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서는 남성중심적으로 구축된 사회 질서 속에서 남성에게 인정받는 과정이 필수로 요구되며, 성공적인 영입을 위해서 여성은 남성성을 보유해야 함을 발견하게 된다.
예컨대 <홍평국전>에서 천자가 홍평국을 혼인시켰던 것은 결혼이라는 제도권 속으로 강제 편입시켜 홍평국/여성의 영웅적인 면모를 제어하려는 뜻이 있었고, 기생 영춘은 남성중심적 사회에서 인정받는 홍평국이 특수한 경우임을 확인하게끔 하여 본유한 여성성을 드러내지 않는 방식이어야 여성이 사회적으로 무탈하게 인정받을 수 있음을 확인하게끔 한다. 홍평국 또한 “홍계월, 홍평국, 홍원수”로써 자신을 반복적으로 일컫는데, 여러 수식어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탐구하고 정립하고자 하는 태도로 읽힌다. 이 지점은 제목이 ‘홍평국전’인 것과도 맥락이 닿는다. 홍평국은 스스로를 생물학적 여성인 ‘계월’로 혹은 사회적 신분인 ‘대원수’로 정의하는 것을 거부하고 오롯이 ‘홍평국’으로 남는데, ‘홍평국’에는 양성성의 의미 외에 인간 ‘존재’에 대한 상징을 함의하고 있다.
요컨대 초월적 존재들이 홍평국에게 이르는 “너는 그저 두려운 마음을 조심하라.”는 대사가 ‘존재’에 대한 의미와 영웅이 지닌 ‘이중성’을 사유케 하는 것이다. 홍평국에게 드는 ‘두려운 마음’은 스스로에 대한 불안함에서 비롯되곤 한다. 그것은 정체성에 대한 문제기도 하고 자신의 능력을 불신하는 문제기도 하다. 두려운 마음은 홍평국을 영웅인 동시에 폭력적인 학살자로도 만드는데, 이 이중성을 통해 존재는 이해의 영역이 아닌 충돌과 받아들임의 영역임을 발견하게끔 한다.
존재는 의미화 할 수 없는 성질이기에, 양성성 사이에서 내적분열을 안고 있는 홍평국이 이미 그 자체로서 완성된 존재임을 역설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 구원자였던 홍평국은 언제든 파괴자가 될 가능성을 지닌다. “두려운 마음을 조심”해야 하는 이유는 그 때문이기도 하다. 세상의 혼돈이 사라지니 홍평국은 그동안 다른 위치에서 폭력을 자행했던 스스로가 혼돈이었음을 깨닫고, 자신을 수식하는 신분을 내려놓으며 한 사람으로서 남는다. 자신에게서 도적 장맹길의 모습을 발견하며 최선의 윤리적인 행위를 행한 것이다. 이처럼 작품의 서사를 쫓다 보면, 사회와 정체성에 대한 화두로 시작하여 ‘인간존재’에 대한 의미로 사유가 확장됨을 경험하게 된다.
<홍평국전>이 「홍계월전」의 한계를 넘어서는 지점은, 극의 말미에서 홍평국을 규방의 아녀자로 남겨두지 않고 다른 여성들과 함께 세상을 누비는 인물로 변경한 것이다. 양부인, 양윤, 춘랑 또한 거처를 떠나 여정을 함께 하는 인물로 각색하여 홍평국 외의 여성들에게도 주체성을 부여한 점도 눈에 띈다. 이들은 모두 “여인 셋”이라는 이름 하에 어떠한 이해관계 없이 사람들과 연대하며 사람을 구하러 다닌다. 이들의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행위가 남기는 여운은 <홍평국전>을 여타 고전의 영웅 서사와는 다른 결로 감각하게끔 한다.
텅 빔의 역설과 영웅물의 전형을 초월한 공연
특히, 신동선 조명 디자이너만의 신비로운 분위기의 조명은 극단 907을 상징할 정도로 늘 인상적이다. 이번 <홍평국전>은 창문 사이로 햇살이 침범하는 오후 시간에 공연되었는데, 조명은 객석과 무대를 구분하지 않는 자연광 사이를 가르며 마치 안개가 부유하듯 흩뿌려져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작품의 신화적 분위기를 자아내기에는 충분했다. 조선 후기 고전소설과 전혀 맥락이 닿을 것 같지 않은 하와이안 셔츠와 해외 록 밴드의 음악은, 남성중심적 사회를 도발하는 서사 및 인물의 성격과 절묘하게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정형화된 언어로 설명될 수 없는 극단 907의 성격은 극단을 구성하는 각 분야의 자유분방함에서 비롯되고 있었다.
모든 배우가 다역을 맡는 와중에 황순미 배우는 오롯이 홍평국 만을 연기했는데, 다른 인물들은 생물학적 성과 사회·문화적 성이 일치하는 반면, 홍평국은 끊임없이 양성성의 충돌과 혼란으로 인해 내적 분열을 지속하는 인물이다. 그러한 차이가 일인 다역과 아님을 결정짓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관객으로 하여금 다른 인물들을 통해서는 외재적 차이의 연기를 경험하게 한다면, 홍평국은 내적 분열과 혼란을 오롯이 담아내도록 한 연출이 인상적이다. 이외에도 ‘텅 빔’의 역설을 완벽하게 연출해낸 지점에서도 연출의 역량을 확인할 수 있었다. 설유진 연출의 작품들은 대부분 빈 공간으로 구성되며, 비어 있음을 통해 가득 채워져 있음을 경험하게 만들곤 했다. <홍평국전> 또한 텅 비어 있는 사방의 공간을 몇 가지 소품들로만 구성하여 때때로 재치 있는 장면을 연출해냈는데, 놀이와 이야기로 가득한 공간을 만들어 관객에게 연극성을 체험하게끔 했다. 공연 장소였던 폐건물이 된 교회는 역설적으로 구원의 장소가 된 셈이다. 어떠한 의미도 부여하지 않고 텅 빈 존재로 돌아간 홍평국과 그 홍평국을 통해 구원을 목격하고 경험하게끔 한 지점에서, 작품의 서사와 형식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장소였다. 밝은 오후의 햇살과 시야에 들어오는 창문 너머의 세상을 통해 실제 현실과 가상의 세계 사이의 경계를 허무는 지점 또한 세계의 경계를 허무는 홍평국이라는 점을 형식적으로 구현해낸 것과 같아, <홍평국전>은 의미와 형식이 이상적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이었다.
고백하자면, 사실 웬만한 영웅물을 잘 관람하지 못하는 편이다. 소위 말하는 오글거림의 역치가 굉장히 낮기 때문인데 특히, 영웅이 영웅스러운 목소리로 영웅 같은 대사를 영웅처럼 읊는 지점에서 굉장히 힘듦을 느낀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홍평국전>에서는 전혀 위화감 없이 자연스럽게 작품에 동화되었다. 돌이켜보건대 작품의 감각적인 연출방식과 동시대적 화두를 담은 서사의 영향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각 배우들의 영웅서사 고유의 전형성에서 탈피한 연기 덕분이 아닐까 짐작된다.
[사진제공 : Ⓒ박태준]
- 일자
- 2021.06.16.(수) ~ 2021.06.20.(일)
- 장소
- This is Not a Church (구 명성교회)
- 재창작 및 연출
- 설유진
- 출연
- 황순미 김보은 송하늘 최정현 신윤지 라소영
- 음향
- 목소
- 안무
- 하영미
- 무대
- 신승렬
- 조명
- 신동선
- 무대감독
- 박진아
- 기획
- 이시은
- 제작
- 907
- 후원
- 서울특별시 서울문화재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