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당모의 <누룩의 시간>
세상 모든 누룩들을 위한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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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램이 술 맨글간? 술이 사램 맨그는겨.”
머리가 땅에 닿을 듯 잔뜩 허리가 굽은 늙은 춘남이 연신 코를 킁킁대며 여기저기 냄새를 맡는다. “남은 쎄면”으로 꼼꼼히 막아달라고 그토록 부탁했건만, 오래전 그때처럼 여전히 망할 놈의 “탄개스”가 스멀스멀 새어 들어오고 있다. 춘남은 세상 믿을 놈 없다며 어딘가를 향해 냅다 고함을 세게 질러대고는, 시루의 틈새를 막을 생각으로 진즉 빚어놓았던 시루번을 가져와 탄개스가 나오는 구멍을 꼼꼼히 막고 또 막는다. 그리고 확인하듯 다시 코를 킁킁대며 무대 한 켠에 놓여 있는 항아리들에게로 다가간다.
한때 술이 담겨져 있던 큰 항아리 두 개는 이제 비어있고, 작은 항아리 안에서는 누룩이 한창 술이 되고 있는 중이다. 쪼그려 앉은 춘남은 빈 항아리를 열어 한때 그 안을 무던하게, 속 깊게 채웠을 누룩의 결과 향을 느낀다. 그리고 작은 항아리 안을 열어 그 안의 누룩 역시 아직은 독기를 품고 있을지언정, 언젠가는 자기만의 향과 빛깔로 온전히 자리 잡아갈 것이라 믿는다.
“간 밤 꿈이 고은이가 비대. 안 봤시야 나슬랑가? 암만 불르야 본 축을 히야 말이지. 오돌오돌 떨믄서 질 잃은 눈만 꿈뻑이대. 아모리 손짓 발짓을 히싸도 내 짝이 보이가니? 아모리 손짓 발짓을 해 싸도 내짝이 보이가니? 날러는 그 짝을 봐도 그 짝이 날 못 보는 게 천 길 꿈 속 아녀? 허기사 그 짝이 나를 아모리 불러도 나 역시 아모 답을 모더는지도 모를 일이지만서도. 이짝이랑 저짝이 우덜 눈이로는 안봬는 비니루가 쳐진 모양이지?“
누룩 향에 실린 고은의 이름과 함께 이제 춘남은 사라진, 혹은 이러저런 맛으로 익어가는 항아리 속 술 냄새를 타고 ‘이 짝’의 시간과 공간을 넘어 ‘저 짝’으로 가닿는다. 이후 무대는 춘남의 지난 시간들과 그 시간에 깊이 배인 누룩의 냄새로 채워진다.
먼 옛날, 시할미는 갓 시집온 춘남을 보고 “오종종하고 빙충맞게 생긴 게 손이 구하겄다”며, “승질머리 죽일라믄” 소곡주 담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했다. 술을 담그면서 춘남은 사람 사는 것도 결국 술 익는 것과 매한가지라는 걸 알게 되었다. 누룩과 밥의 밀고 당기는 힘이 끝내 하나로 모아져 저마다의 빛깔과 맛으로 익어가듯, 사람 역시 연신 새어 들어오는 탄개스 속에서도 온갖 부침을 겪으며 자기만의 존재로 익어가는 술이라는 것을 말이다. 솔내, 더덕내, 소곡주 향... 그에게 항아리나 세상 모두 저마다의 맛과 색을 가진 술로 익어가는 누룩들의 파동으로 가득했다. 누룩만큼 사람들의 숨 하나, 결 하나가 소중하게 다가왔다.
사람 누룩들을 품은 항아리, 춘남
그러는 사이 시할미도, 남편도, 아들도 죽어 “누룩꽃”이 되었다. 하얗게 눈보라가 몰아치던 어느 날, 춘남이 어린 고은을 안고 마실에 다녀온 사이, 곤하게 잠자던 며늘아이 마저 구들에서 올라온 ‘탄개스’에 중독되어 피지 못한 누룩꽃이 되어 사라졌다. 꿈에 나타난 시할배는 곁의 사람들을 먼저 떠나보낸 춘남이 못미덥다며 고은이마저 데려가려 했지만, 그럴수록 춘남은 고은을 어느 때보다 꼭, 깊이 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고은이만큼은 스멀스멀 새어오는 ‘탄개스’로부터 확실하게 지켜주고 싶었다. 고은이가 자기만의 색과 맛으로 익어갈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고은의 항아리가 되었고, 그 항아리 안에서 고은은 탁구선수가 되었다. 사방에서 오는 탁구공을 이리저리, 위아래로 되받아치는 고은은 정말이지 세상천지 “봄밤 배꽃 터지디끼 히연” 누룩과 꼭 닮았다. 그랬다. 춘남은 고은이가 솔내처럼 배짱이 두둑하고, 더덕내처럼 도량이 넓고, 소곡주처럼 곱게 자기만의 삶으로 익어가기를 바라고 바랬다.
그러나 어느 날 이쪽, 저쪽, 위와 아래, 안과 바깥, 어떤 경계 없이 자기만의 색과 향으로 익어가고자 했던 고은의 숨이 멎었다. 고은이 그의 방식으로, 속도로 익어가게 내버려 두지 않는 세상, 뭐라도 하나 건져 이득 볼 게 있으면 무턱대고 다그치고 몰아세우는 망할 놈의 세상, 그 세상 ‘탄개스’ 때문이다. 사방으로 튀던 고은의 탁구공은 더 이상 튀어 오르지 않았다. 춘남이 자기의 항아리 속에 고이 품었던 고은이란 누룩의 시간도 멎었다.
그리고 다시 시간이 흘렀다. 여전히 탄개스가 “생지럴루다가니 올라오”는 세상이다. 하지만 춘남이란 항아리는 채 익지 못한 고은이란 누룩과 함께 그의 곁을 스쳐 간 여러 누룩들을 여전히 품고 있다. 시할매부터 남편, 아들, 며느리, 그리고 고은까지 녹록치 않은 세상을 나름 열심히 땀 흘리며 여기저기 두드리며 뛰어다니다 사라진 존재들, "존 디루 가덜 못허구 애간장만 태우는" 모든 누룩들의 맛과 냄새가 여전히 배어 있다. 세상 모든 누룩들이 뛰는 소리, “논두렁이 개구락지 뛰댕기는 소리, 양철지붕 우로 우박 떨어지는 소리, 아궁이 군불 때는 소리, 철퍽철퍽 소 똥 싸는 소리.” 그렇게 사라진, 혹은 아직 익어가고 있는 세상 모든 누룩들을 따스하게 품어 그 깊은 향을 들이마신 춘남은, 이제 거기에 자기라는 누룩의 시간을 함께 섞는다.
김풍년과 작당모의, 또 하나의 항아리
작가이자 연출인 김풍년은 자신이 만든 예술의 지도 위에서 배우를 절대 하나의 기호로 이미지로 세워 소비하지 않는다. 자신의 언어는 기본 바탕으로 깔되 나머지는 온전히 배우에게 맡기는 그는 실로 춘남의 항아리 같은 작가이자 연출이 아닌가 싶다. 그 항아리 안에서 배우는 마치 누룩처럼 사방으로 자신을 발효시켜 가장 최적의 향과 맛을 위해 스스로를 발효시킨다. 안무를 맡은 금배섭, 음악을 맡은 옴브레가 그 발효의 전 과정을 함께 돕는다.
이번 공연에서 김풍년과 작당모의는 그들의 ‘항아리’ 안에 박은경이라는 누룩을 넣어두었다. 늙은 춘남의 몸에 축적된 시간의 결을 하나하나 펴서 그 안에 눌려있던 여러 춘남들과 그의 감정을 소환하는가 하면, 춘남이 품었던 고은이라는 누룩의 냄새와 맛, 그리고 그가 가닿고자 했지만 닿을 수 없었던 냄새와 맛을 체현한다. 춘남의 항아리 안의 그 수많은 누룩들처럼, 박은경 배우는 그의 말, 그의 움직임 하나하나를 분절해서 조합하고 다시 해체했다 통합한다. 그런 발효와 숙성의 과정을 스스로 수행하면서, 그는 무대 안을 채운 다양한 조각들을 잇고 덧댄다. 탁구공은 탁구공이면서 누룩이 되고, 기다란 하얀 천은 밀가루 반죽으로 만든 시루번이 되었다가 어느 순간엔 고은을 품어 업는 포대기가 된다. 춘남과 고은의 삶의 부분들을 이루는 다양한 조각들은 그의 움직임에 기대어 하나하나 이어지더니 결국 그 모두를 품어 안은 무대 뒤 커다란 항아리 그림판으로 완성된다.
물론 그는 절대 슬픔과 한(恨)의 정서를 전면화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게 아닌 듯, 혹은 무심한 듯 툭툭 딴청 피우듯 던지듯 말하고 움직이면서, 정작 자신은 뒤로 슬쩍 물러나 관객에게 무대를 채운 그 많은 누룩의 냄새를 맡아보게 한다. 덕분에 관객은 그 냄새에 기대어 이 세상을 저마다의 색과 향으로 채우며 고은의 탁구공처럼 튀어 오르고자 했던, 아니 튀어 오르고 있는 세상 무수한 누룩들을 더불어 기억한다.
[사진제공 : 작당모의 Ⓒ박태준]
- 일자
- 2021.07.01. ~ 2021.07.11.
- 장소
- 스튜디오 SK
- 작·연출
- 김풍년
- 출연
- 박은경
- 영상
- 박태준 박효진
- 분장
- 장경숙
- 의상
- 김지연
- 안무
- 금배섭
- 음악
- 옴브레
- 조명
- 정유석
- 무대
- Gold Biskuit
- 무대제작
- 내디내만
- 진행
- 김수진 김용희
- 공간
- 야무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