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한 <괴담 모란등롱>
멈춤의 시대 그리고 움직이지 않는 연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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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우리 삶은 잔뜩 성난 붉은 돌기로 무장한 낯선 바이러스의 모습으로 매우 분명히 현시(顯示)된다. COVID-19라는 이름에 담긴 한시적(限時的) 바람은 불행히도 여태껏 실현되지 않고 있다. 함께 모일 때 생동하고 빛나는 것들이 존재 자체를 끊임없이 위협받는 지금, 가장 타격을 입은 예술 장르는 누가 뭐래도 연극이다. 거리두기와 멈춤의 가치가 삶을 통제해버린 상황 속에서, 직접적이고 순간적이며 현재적인 연극은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빼앗겼고 예의 본연의 힘을 잃어버렸다.
가혹한 멈춤의 시대에 연극은 대체 어떠한 모습으로 존재할 수 있을까. 누군가의 말처럼, 연극의 미래는 온라인 영상의 라이브니스로 대체될 수 있을까. 연극계 안팎에서 울림 없는 대안들이 선언처럼 나부끼며, 연극을 지키겠다는 예술적 모색이 도리어 연극의 참 가치를 근원부터 흔들어 놓는다. 2021년 연극은 불안과 공포의 얼굴을 하고 우리 앞에 있다.
1인극 프로젝트 ‘불가 버티고 Vulgar Vertigo’를 이끌고 있는 김은한이 바라보는 연극의 현재 역시 그러하다. 그는 ‘기이한 복수와 기괴한 사랑 이야기’인 <괴담 모란등롱>을 새로운 프로젝트의 첫 작품으로 선택하여, 신촌 뒷골목 어두컴컴한 상자 무대 위에 스스로를 결박시켰다.
극장이 있을 거라고 전혀 예상할 수 없는 좁은 골목 어귀에서부터 관극에 대한 불안은 고조된다.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남루한 빌라들이 계속 이어지는 음침한 골목을 걷다가 발걸음을 돌이킬까 고민할 때쯤, 거짓말처럼 ‘신촌극장’ 입간판이 나타난다. 누가 보아도 멀쩡한 주거공간인 어느 빌라 옥탑에 또아리를 틀고 있는 신촌극장은, 배배 꼬인 현실의 실타래에 꽁꽁 묶인 예술가의 모습과 닮아있다. 이 요상한 극장 한가운데 무심히 놓여 있는 책상과 의자. 그 작은 의자 위에 거대한 인어 김은한(그는 자신을 ‘매머드머메이드’라고 칭한다)이 고요히 앉아 있다. 중간 쉬는 시간을 포함한 90분의 공연 동안, 움직임이라고는 몇 번의 손짓과 음향효과를 대신하기 위한 책상 두드림, 그리고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장면에서 최소한으로 시도되는 발 구르기 정도이다. 1인극의 특성상 관극의 초점은 무대 위 현존하는 한 배우에게로만 모아지는데, 움직임을 최소화한 공연에서 관객들이 기댈 수 있는 건 배우의 작은 몸짓과 발화뿐이다.
파자마 같은 면 소재 실내복 위에 긴 로브를 무심히 걸치고, 이 극의 유일한 배우 김은한이 등장한다. 책상 앞 의자에 앉는 지극히 일상적인 움직임과 극에 대한 가벼운 소개 인사가 객석으로 직접 전해진 후, 비로소 극이 시작된다. 매머드한 체구와 달리, 김은한의 음성은 생각보다 얇고 가늘었다. 그러나 은근히 심지가 있는 목소리여서, 대사 전달과정에서의 답답함은 그다지 없었다. 배우의 목소리가 중요하지 않은 연극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괴담 모란등롱>의 경우에는 공연의 성패를 좌우할 만큼 핵심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이 공연은 다소 낯선 공연 양식인 ‘화술 예능’을 표방하는데, 김은한에 따르면 이는 일본 전통예술연희 중 하나인 ‘라쿠고(落語, らくご)’에서 아이디어를 따온 것이라고 한다. 라쿠고는 일본의 근세기에 생겨나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전통적인 화술 기반의 예술 중 하나이다. 일반적으로 음악 및 의상 등의 도구 대신에, '라쿠고카'(落語家)라 불리는 사람이 부채를 들고 고좌(高座)라고 하는 무대 위에 앉아, 청중을 대상으로 이야기를 풀어가는 형식의 예술인데, 이때 라쿠고카는 목소리의 크기 및 높낮이, 추임새, 몸짓만으로 여러 캐릭터를 혼자서 표현한다. 때문에 라쿠고카의 연희 재능과 기술은 공연 성공에 있어서 필수 요건이다. 라쿠고카가 되기 위한 수련 과정이 혹독하고 길기로 정평이 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괴담 모란등롱> 역시 라쿠고의 화술 예능에 뿌리를 두고 있는 바, 이 공연 또한 화자이자 배우이자 연출가인 김은한의 연기에 오롯이 좌우된다고 볼 수 있다.
김은한은 19세기 일본 라쿠고가인 산유테이 엔초가 창작한 <모란등롱> 괴담을 최선을 다해 실연했는데, 괴담 특유의 서스펜스와 스릴을 음성으로만 전달하기에는 화술적으로 무리가 있었다. 일인다역을 변화무쌍하게 표현할 수 있는 연기력이 부족했다기보다는, 일본인이 한국말을 하는 식의 어색한 어조가 극의 몰입을 방해하였다. 라쿠고에 뿌리를 둔 새로운 공연방식을 설득하기 위한 의도된 연출이라고 이해하기에는 지속성이 떨어졌고, 정제되지 않은 화술로 인해 리허설과 같은 미완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혼자서 1시간 30분의 공연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몇 년 동안 연행기술을 연마하는 라쿠고카 수련 과정에 버금가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할 것이다. 수십 명의 캐릭터를 구축하면서 서사 기저에 흐르는 희로애락의 감정까지 표현하기 위해서는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또한 움직임을 최소화하는 대신에, 배우의 입담과 표정 그리고 작은 추임새 정도에 다양한 인생 경험을 농축시켜서 객석으로 전달해야 한다.
연기와 화술에 대한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김은한의 <괴담 모란등롱>은 1인극의 특장점을 화술 예능이라는 공연 양식으로 살려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공연이었다. 2015년 서울프린지페스티벌을 통해 데뷔한 이래 동료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동력 삼아 꾸준히 연극을 만들었던 김은한에게, 모든 것이 멈춰버린 현실은 무력감을 안겨주었다고 한다. 멈춤의 시대를 뚫고 나가기 위해 그는 ‘품을 적게 들이는’ 공연을 고민했고, 장소에 대한 제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움직이지 않는 연극’을 실험하게 된 것이다. 그에게 여전히 일본에서 공연되는 라쿠고의 생명력은 하나의 희망이었다. ‘움직이지 않는 연극’도 관객들에게 즐거운 관극 경험을 선사할 수 있으리라는 확신을 주었다.
함께 모여 연습하는 것을 두려워하게 된 요즘, 골방에 틀어박혀 관객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어주는 세상의 괴담들을 읽고 외우며 다음 공연을 준비하는 김은한의 예술적 모색을 기대해본다. 머지않아 일인다역을 능숙하게 연기하며 객석을 쥐락펴락하는 숙련된 매머드머메이드의 공연을 볼 수 있기를. 어쩌면 그의 다음 공연에서 멈춤의 시대에 존재 가능한 연극의 모습을 기적처럼 확인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진제공: 김은한]
- 일자
- 2021.9.15 ~ 9.18
- 장소
- 신촌극장
- 출연
- 김은한
- 제작
- 불가 버티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