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젝트팀 물살 <플라스틱 러브>
지속 가능한(pLASTic) 사랑의 재정의를 향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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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데믹과 기후 위기 같은 인류 공동의 위기 속 예술, 특히 연극이 (도나 해러웨이가 강조한) 어떠한 ‘응답-능력’(response-ability)을 가질 수 있을지는, 작년 코로나바이러스가 출현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고민이었다. 공연의 주제가 생태 또는 환경 문제와 직접적인 연관이 없다 하더라도 인간 중심적인 시각을 경계하고 있는지, 인간과 함께 지구라는 집을 공유하는 ‘룸메이트’인 비인간 동물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을 거쳤는지, 공연 제작 차원에서 과도한 낭비를 지양하고 있는지와 같은 물음들은 이제 나에게만큼은 마땅히 고려해야 하는 기준으로 자리 잡았고, 이따금 이러한 노력이 느껴지는 작품을 만날 때면 더할 나위 없이 반가움을 느끼곤 한다.
그런 의미에서 SF코미디극 <플라스틱 러브>는 반가운 공연이었다. ‘전염병’이라는 함수가 추가된 지구 속에서 ‘지속 가능한’(pLASTic)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보겠다는 기획/연출 의도뿐만 아니라, ‘신(神)’ 이외에도 ‘야옹이’와 ‘물살이’로 불리는 비인간 동물의 등장이 공연 소개 글에서부터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SF코미디극을 표방하는 데서도 보이듯 신이라는 인물은 코딩(!)을 통해 플라스틱 수조에 우주를 창조하고, 미래를 계산하고, 이를 바탕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린다. 한편 (고양이의 태생적 습성처럼) 종종 신이 만든 수조에 훼방을 놓음으로써 우주에 ‘혼돈’을 초래하기도 하는 야옹이는, 신이 하는 일을 간간이 몰래 엿본 결과 간단한 코딩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후 신의 사랑 실험을 돕는 역할을 맡게 된다.
마지막으로 신의 피조물인 ‘물살이’들은 개인적으로 관극하기 전부터 가장 호기심을 유발했던 등장인물인데, 프로젝트의 이름(프로젝트 물살)에서도 그러하듯 바닷속 생명체를 물고기가 아닌 ‘물살이’1)
로 명시하고 있는 것이, 이 연극이 말하고자 하는 ―종종 공허한 단어처럼 느껴지곤 하는― ‘지속 가능한’ 사랑이라는 의미를 재고해보려는 시도와 관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물살이라는 이름은 신의 수조인 우주에서 유영하는 ‘인간’에 대한 메타포로 작동하고 있었지만, <플라스틱 러브>의 주된 서사는 바로 이 물살이들과 신 사이의 만남을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한 물살이에게 푹 빠진 신은 사랑에 성공하기 위해 자신의 시나리오대로 컴퓨터를 운용해줄 수 있는 야옹이의 도움을 받게 되고, 신과 물살이가 어떠한 모습으로 지상에서 만나게 될지를 정하는 이들의 토의가 끝난 후 신은 인간의 모습을 한 채로 지상으로 내려가 총 두 명의 물살이와 교류한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신과 물살이 모두 여자 고등학생의 모습으로 등장하며 이들은 서로를 좋아하는, 친구 이상의 관계인 것으로 보인다. 이들 뒤에는 둘을 지켜보는 야옹이가 있는데, 대화 중간중간 신이 적절치 않은 대답을 할 때면 야옹이는 키보드를 누름으로써 신이 알맞은 말을 할 수 있도록 한다. 하지만 신이 물살이를 향해 고백 아닌 고백을 한 직후, 그가 예전에 입력해둔 혐오 값이 하필 악성 코드로 변하는 바람에 물살이는 이에 거부감을 표출하며 자리를 뜨게 된다. 낙담한 신은 실험 자체를 그만두려고 하지만, 야옹이는 그를 타이른 후 보다 익숙하게 느낄 수 있는 설정값을 입력해 그를 두 번째 실험으로 이끈다.
두 번째 실험에서 신은 한 어머니(두 번째 물살이)의 딸로 등장한다. 이 가족은 10년 전 아들의 죽음과 어머니의 애인이 친 사기로 인해 뿔뿔이 흩어져 살고 있는데, 딸(신)이 피폐해진 상태로 홀로 지내는 어머니가 있는 집에 다시금 방문함으로써 둘은 10년 만에 재회한다. 그동안 쌓여 있던 오해와 앙금은 좀처럼 풀리지 않고 서로를 향한 모진 말들이 오가지만, 대화의 말미에 어머니가 딸에게 먼저 털어놓는 진심으로 인해 둘 사이 견고했던 벽은 차츰 허물어지고 화해의 단초가 제공된다.
두 실험을 하고 돌아온 신은, 사랑이 통제 불가능하다는 것은 물론 사랑은 자신이 꿈꿔왔던 특정한 형상이 아닌 하나로 정의할 수 없는 저마다의 모양, 크기, 농도, 깊이를 지닌 것임을 깨닫는다. 이어서 신은 야옹이에게 그 또한 누군가에게 마음을 전한 적이 있는지 묻는데, 이때 야옹이의 대답은 신으로 하여금 그가 두 실험을 하러 떠나기 전 이미 가까운 곳에서 사랑을 경험하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한다. 야옹이가 사랑한 대상은 자신의 반려인 신이었으며 야옹이는 ‘다음 생에도 나의 고양이로 태어나 달라’는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이번 생에도 그의 반려묘로 태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동한 신은 야옹이의 손을 꼬옥 잡고 고맙다는 말을 건네고, 연극은 마치 서로를 자유롭게 해주는 것이 어쩌면 가장 지속 가능한 사랑의 방법일지도 모른다는 듯, 이들이 ‘함께’가 아닌 ‘각자’ 자신의 우주를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여준다. 신은 퇴직을 선언한 후 첫 번째 실험에서 만난 물살이를 찾아 지상으로 내려가고, 뒤이어 야옹이도 남은 생은 ‘자신’만을 위한 삶을 살겠다고 말하며 수조 안으로 풍덩 몸을 던진다.
이처럼 <플라스틱 러브>는 아이러니하게도 가장 성숙하지 않은 인물처럼 보이는 ‘신’의 거듭되는 시행착오와 마지막 야옹이와의 대화를 통해 동성(同姓), 혈연관계, 그리고 인간-비인간의 경계를 넘어서는 복수(複數)의 사랑의 가능성을 탐구한다. 이 과정에서 연극은 시나리오대로 흘러갈 수 없는 사랑의 예측 불가능성을 통해 자아를 확장하고 달라지는 신의 모습을 그린다. 이를 통해 신은, 사랑이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플라스틱과 같이 좀처럼 변형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의 어원인 그리스어 플라스티코스(plastikos)처럼 변화하고자 하는 자신의 의지나 마음먹기에 따라 ‘원하는 모양으로 가공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배웠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처음부터 모든 게 매끄럽게 설명되고 이해된 것은 아니었다. 이 연극에서 제시한 세 사랑 이야기를 따라가면서 쉽게 떠나지 않는 물음이 있었다. 신이 일련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해가는 것은 사실이나, SF적 세계관을 구축하기 위한 몇몇 설정을 제외하고는 이 공연이 들려준 ‘세 사랑 이야기’가 각각의 이야기로서는 크게 낯설게 느껴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세 가지 이야기가 한데 모인 이 연극은 (특히 사랑에 관한 서사가 즐비한 오늘날) 관객에게 사랑에 관한 어떠한 ‘새로운’ 관점을 제공해줄 수 있을까, 라는 물음이었다. 청소년 퀴어, 모녀, 인간과 비인간의 관계를 각각의 이야기에서 다룬 것은 반가웠으나, 그리 길지 않은 60분이라는 러닝타임 동안 세 이야기를 짧게 다루다 보니 그 이야기들과 ‘지속 가능한 사랑’이라는 주제 사이의 연결성을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을뿐더러, 아무래도 한 이야기에 할당된 시간이 많지 않다 보니 다음 이야기로의 전환이 급작스럽다는 인상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60분 동안 보다 적은 수의 이야기에 더욱 집중했을 때, 조금은 불분명하게 다가왔던 ‘지속 가능한 사랑’이라는 주제가 SF라는 장르와 만들어낼 시너지 및 그에 따른 관객 몰입도의 차이가 궁금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럼에도 위와 같은 에피소드적 구성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있었다면, 이 연극의 기저에 흐르고 있는 (맨 앞에서 언급하였듯) 현재 인류가 공동으로 당면한 복합적인 문제에 대해 나름대로 ‘응답’하고자 하는 미세한 움직임 또는 찰나의 진심이 나에게 감지되고 와 닿았기 때문일 것이다. 예컨대 첫 번째 물살이의 “동물도 자기 하고 싶은 건 다 있다”라는 대사와 딸(신)이 어머니에게 “이젠 안 먹어, 해산물”이라고 단호하게 답하는 장면이 그런 것들이었다. 나아가 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의 고양이로 다시 태어났다는, 자칫하면 사뭇 감상적으로 들릴 수 있는 대사에서는 나도 모르게 때때론 인간보다 지혜롭고 인간이 주는 것 이상으로 기쁨과 사랑을 되돌려주는 수많은 (반려)동물들이 떠오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게는 지극히 사소할 부분일지라도 나에게는 이러한 대사와 마음 하나하나가 귀하게 느껴졌고 이것이 마치 본격적인 ‘응답’을 위한 첫걸음과 같이 느껴졌다. 이는 마치 같은 성별의 사람을 사랑하는 일, 애증으로 뒤엉킨 가족을 돌고 돌아 용서하는 일, 그리고 비인간 동물을 위하는 일이, 사실 깊이 들어가 보면 모두 같은 곳을 향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듯했다. 생각이 계속되다가, 어쩌면 이 연극이 ‘현재’ 관객들과 공유하고 싶었던 또 다른 형태의 응답은 ‘효율적’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모두에게 해가 되는 그런 종류의 플라스틱(plastic)이 아닌, 더디더라도 모두에게 이로울 수 있는 ‘플라스틱’(pLASTic), 즉 ‘지속 가능한 사랑’에 대한 ‘새로운’ 정의 혹은 지향점 설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렀다.
이 바통을 이어받을 수 있는 ‘응답-능력’에 대해 생각하던 중, 맨 처음 읽은 기획 의도 앞에서 다시 멈춰 섰다. “전염병이라는 함수가 추가된 지구 세계 속, 공연이라는 형태의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창작극 <플라스틱 러브>가 다시 활력을 불어넣는 작은 파도가 되기를 바란다.” ‘공연이라는 형태의 사랑’이라는 구절에 시선이 꽤나 오랫동안 머물렀다.
[사진제공: 프로젝트팀 물살]
- 일자
- 2021.9.28 ~ 9.29
- 장소
- 소극장 혜화당
- 기획
- 신지선
- 작·연출
- 이현서
- 음향
- 조연하
- 조명
- 신지수
- 무대
- 이현서
- 디자인
- 이충녕
- 출연
- 박정민, 박성범, 김지인
- 이전부터 동물권 활동가들 사이에서는 ‘물고기’라는 단어가 물에 사는 생명체를 오로지 식용의 대상으로 바라보게 한다는 문제 제기가 있었다. 이들은 물속 생명체 또한 엄연히 고통을 느끼며 살아가는 독립적인 존재임을 강조하고 언어 속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는 종차별주의를 타파하기 위해 물고기라는 단어를 ‘물에 사는 존재’를 뜻하는 순우리말 ‘물살이’로 대체할 것을 주장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