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상집단 뚱딴지 스튜디오 프로젝트 <늑대가 부른다>
내 울음이 너무 커서 너의 울음을 아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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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기후위기 시대에 지구 멸망을 선행 학습하는 창작극이었다고 해도 될까. 가까운 미래, 생태계가 파괴된 지구의 마지막 대자연 ‘에덴’에 인류가 모여든다. 그러나 ‘에덴 관리국’은 에덴을 보호하겠다는 명목으로 소수만 누릴 수 있게 경계를 세운다. 이곳에 모녀가 숨어드는데, 생존을 위해 늑대 잡는 ‘사냥꾼’이 된 엄마와 그녀의 딸 ‘E’다. 엄마는 딸 E가 에덴에 머물며 안전하길 원하지만, E는 자기 존재의 의미를 찾아 에덴을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휴머노이드 로봇 ‘나랜’이 찾아와 사냥꾼이 잡은 동물을 수거해간다. 이 이야기는 ‘이야기꾼’들이 더해지면서 연극적인 흐름을 풍성하게 이끈다.
처음, 따가운 조명 아래 몸부림치는 어두운 옷의 배우들. 실제로 다가올지 모르는 멸망을 다루고 있는데 관람한 무대가 너무나 극장이고 배우들의 현장감이 컸기에 상상력에 동원되기 쉽지 않았다. SF적 상상력을 발휘해 무대를 2층까지 넓혀서 사용했다면 어땠을까. 무대는 천장에서 떨어뜨린 반투명 막들로 공간을 구분하고, 뒤에 서서 악의 소리를 전하고, 방망이로 두드리며 폭력을 표현했다. 철재에 부딪히며 얻어맞는 등 배우의 몸으로부터 재생되는 소리 효과도 어우러졌다. 조명은 대체로 뿌옇고 차가운 느낌이었다. 의상은 한번도 인간을 만난 적 없는 E의 특성을 가벼운 슬리퍼 하나로 표현해 정글북 소년과 같은 느낌을 주었다. 가까운 객석 너머 담담한 무대 위에서 가시 박힌 말들이 오고 갔다. 이야기꾼들은 종종 마이크로 각색한 소설의 문장을 E의 속마음처럼 뱉어낸다. 세 명이 E를 따라다니며 한 명이 마이크를 들고 말한다. 배우들은 자주 눈을 반짝이며 객석과 마주 본다. 그 방향성은 이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기보다 어떤 세계에 대한 목적의식을 향해 있으며, 자신의 내면을 마주하고, 극의 화자로서 이야기한다고 느껴지게 했다. <늑대가 부른다>는 『야성의 부름』이라는 소설을 원작으로 한 창작극이다. 흡연 장면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에 대한 묘사가 발화될 때, 소설의 문장과 연극의 대사가 절묘하게 만나는 순간이 있었다.
현실성 있는 SF의 상상력은 그렇게 재미있게 마주할 수만은 없었다. 에덴은 수직적인 세계의 질서가 잡힌 곳으로, 그곳에서는 동물 사냥과 동물 비하, 혐오가 난무했다. 그리고 재난 상황에서 사회의 가장 연약한 곳부터 타격을 받고, 가진 자부터 위기를 모면하듯이, 에덴은 이미 권력자들이 지배하고 있는 세계였다. 그래서 누군가에겐 빌붙어 살아가야 하는 척박한 곳이었다. 공동체 의식은 상실되었고, 이기주의와 인간중심의 세계관이 악화해가고 있었다. 오직 로봇만이 파멸과 역행해 수평적인 태도와 인간성을 유지하며, 숨을 쉬고 있었다.
불타버린 지구의 끝자락, 마지막 삶의 기회인 에덴. 왜 마지막 하나 남은 대자연의 이름이 종교적 의미를 지닌 에덴일까. 그곳이 정말 태초의 자연, 에덴이라면, 누군가가 독점하거나 탐욕을 부리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하느님은 금기를 만들었고, 결국 아담과 이브는 선악과를 먹고 추방당했다. 그런데 이런 신을 거부하기라도 하듯 연극 <늑대가 부른다>에서 E는 에덴 관리국의 금기를 깨고, 경계를 허무는 시도를 한다. 신이 있다면 이런 대재앙이 일어나진 않았을 것이므로, 작품에서 에덴은 권력자가 침탈한 곳으로 그려진다. 신과 인간은 서로를 부정하고 있는 듯 보인다. 개선될 여지는 없는 걸까. 바깥 세계의 인간을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E. 호기심을 가진 순수하고 정의로운 E는 결국 다치고 만다. 금기를 깨고 에덴 밖에 다녀온 E는 얻어맞아 얼굴이 빨갛게 피로 물들지만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E에게서 대자연을 모두에게 개방할 씨앗이 발아하고 있다. 아무리 로봇 나랜이 인간보다 더 인간 같더라도, 행동하고 변화를 이끌 수 있는 것은 결국 인간이다.
희망은 E처럼 아주 작고 어린 것에서부터 피어난다. 착한 사람이 얼마나 강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처럼 식상해도 여전히 그렇다. 사냥꾼인 엄마가 재앙 속에서도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있다면, 그게 뭘까 궁금했다. 분명하지 않았지만, 그녀가 하는 선택들로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었다. 기꺼이 개가 되어 맹목적으로 복종하면서까지 지키려고 하는 게 뭔지 알 것 같았다. 엄마로서 딸을 보호하고 살아남기 위해 필사적으로 자연을 찾아 들어온 게 아닐까. 혼자 감당해야 하는 삶의 무게가 느껴졌다. 엄마는 앞선 세월의 경험으로 보다 현실적이 된 것일 뿐 저항 의지가 없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희망을 품은 비참함과 슬픔의 곡조로서 늑대의 울음이 되어 넓게 퍼진다.
늑대는 하나의 의미망에 머물지 않는다. 늑대는 우리를 위협하는 에덴의 권력자였다가, 같은 인간을 사냥하고 물어뜯는 사냥꾼 엄마가 됐다가, 누군가의 생존을 위해 제물로 바쳐지는 소모적인 동물이 됐다가, 에덴 밖에서 공존을 부르짖는 인류가 되고, 늑대가 될지 개가 될지 사람이 될지 알 수 없는 가능성을 품은 딸 E가 되고, 시키는 대로 동물을 수거해가는 로봇이 된다. 작품의 제목이 <늑대가 부른다>이니 만큼 극 중에서 그 소리를 들었을 때 보다 내밀한 것을 느끼고 싶었다. 그러나 늑대 울음소리는 음향효과로 사방에서 평범하게 들렸다. 늑대 음향과 함께 등장해 있던 배우가 그 의미를 나타낸 듯하지만 집중해서 느끼지 못했다. 작품에서 좀 더 정확한 의미가 늑대 울음 안에 녹아들었다면 보다 소름 끼쳤을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세상에서 모두는 날카로운 이빨을 가진 늑대가 되지만, 작품에서 진짜 늑대는 에덴 밖 인간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나의 생존을 방해하는, 총격 대상. 그러나 총구의 방향을 틀어 내가 발을 핥던 주인에게 돌리면 우리의 공존을 방해하는 공동의 적이 만들어진다. 그 순간 나는 개도 늑대도 아닌, 인간의 편에 선 인간이 된다. 그것이 에덴의 확장 가능성이다. 그러므로 E가 늑대의 울음을 듣고 그것에 가닿고자 하는 노력에서, 늑대의 울음은 위협이 아니라 늑대가 나(E)를 찾아 부르는 것으로 연결된다. 늑대가 ‘너희를 위협하려는 게 아니라 함께 살고 싶다고’ 부른다. 비로소 늑대와 함께 춤추는 걸 상상하며, 에덴에서 우리가 함께 회복시킬 지구를 기대하게 되는 것이다.
작품은 이렇게 남의 울음소리를 외면하고, 남의 위기를 기회 삼아 나만 살아남으려는 이기주의와 폭력성, 인간의 그릇된 생존본능과 함께 공존의 가능성에 대한 질문을 안겨줬다. 그러니까 늑대도 사실은 ‘나를 죽이지 말라고, 나도 죽을 것같이 힘들다고, 함께 살자고’ 부르짖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다만 내 울음도 결코 그보다 작지 않아서, 내 울음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알아듣는 데 시간이 걸린 것이겠지만.
이토록 풍성한 의미를 품고 있는 이 극은 현장에서 즉각적으로 체득하는 데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다. 다만 창작자들이 정성스럽게 만든 질문을 얻어와 나름대로 해석해보았다. 다소 교훈적인 면도 없지 않아 있었다. 극장만이 가진 지역적 특색, 이야기, 형식 면에서 더 새롭길 바랐다. 지구 멸망을 상상하며, 그것에도 내가 기대하는 게 있다는 걸 알게 됐다. 그리고 그것은 기대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 모녀처럼 살아남은 자라면,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 가까스로 남은 조그만 자연을 두고 폐허가 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면? 우리는 천천히 멸망으로 가고 있다. 지구가 우리의 최선이고 마지막 세계다. 지구를 떠나 다른 곳에 갈 수 없다. 이대로 지구를 버릴 생각이 아니라면 기후위기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E가 보여준 희망을 기억할 것이다.
[사진제공: 공상집단 뚱딴지(사진-황호규)]
- 일자
- 2021.10.7 ~ 2021.10.10
- 장소
- 성미산마을극장
- 작·연출
- 여온
- 출연
- 라희선, 이의령, 박영민, 박지은, 이훈희, 오윤정
- 조명
- 김용호
- 음악
- 류승현(RAINBOW99)
- 의상
- 남기욱
- 촬영
- 김창엽
- 사진
- 황호규
- 오퍼레이터
- 심태영, 이인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