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집단 불씨 <루프 코리안>
‘지붕 위 영웅’의 신화를 걷어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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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프 코리안>은 올봄 극단 미인의 클럽하우스(소셜 쌍방향 오디오 플랫폼) 낭독공연으로 이미 선보여진 바 있다. 오디오로만 공개됐던 작품이 신촌문화발전소 창작과정지원을 통해, 극장 공간 안에서 배우의 몸을 입게 되었다. 이야기의 배경은 1992년 4월 29일에 일어난 LA 폭동이다. ‘4·29 사태’ 25주년을 기념하는 한인회장의 연설로 극이 시작되었다가, 이내 소요가 일기 7일 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간다. 그에 앞서 객석과 마주한 벽면 프로젝션 영상은 1991년 흑인 남성 로드니 킹(Rodney King)이 경찰에게 구타당하는 장면을 비춘다. 이듬해 경찰은 백인 위주로 구성된 배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고, 이는 LA 폭동의 도화선이 되어 사상자 수천 명을 발생시켰다. <루프 코리안>은 30년 전 사태를 통해, 지금 우리의 공동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 연극이다. 한인 상점에 화염병이 투척되는 등 긴박한 사건이 전개되는 순간에는 포그 장치, 소리, 조명이 입체낭독극의 퍼포먼스성을 더한다. 배우들은 보면대 앞에 정지한 채로 있지 않고, 자리를 바꾸며 위급한 상황을 전달했다.
실제 4·29 사태에서 8,000건 이상의 방화가 일어났고 16,000개의 상점이 파괴되었으며, 미국 로스앤젤레스 사우스 센트럴에 위치한 코리아타운이 그중 30% 이상의 피해를 겪었다. 방화와 약탈로 인한 LA 지역 한국계 미국인의 경제력 손실은 80%에 달했다. 이때 체포된 피고 51%가 남미계였던 것을 감안하면, LA 사태는 단순히 흑백갈등이나 한흑갈등으로만 볼 수 없는 복잡한 층위의 문제였다. 인종 간 갈등에는 한정된 자원을 가지고 경쟁해야 하는 경제적 현실 등 여러 사회·문화적인 요인들이 있지만, <루프 코리안>은 권력관계가 모호한 소수민족들 사이에서 타 집단에 대한 스테레오 타입을 강화하는 한인들의 편견 어린 시선을 부각한다. 로스앤젤레스 한인타운에서 주류점, 슈퍼마켓, 총포상, 금은방 등을 운영하는 등장인물들은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건너간 1세대 이주민이다. 이들이 새로운 땅에 정착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동족과 유대를 쌓고, 집단 동질성을 형성하는 문화가 중요했다. 혼란한 커뮤니티 환경 속에서 생존해야 했던 이민자들은 내집단 밖의 타자를 일별하고 ‘까마귀, 짱깨, 깜둥이’ 등으로 단정 지음으로써, 주변을 적대적이고 피상적으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다.
용수, 미주, 문자, 대준, 수영, 철민 등 도심에서 소규모 사업체를 운영하던 미주 한인들은 흑인·히스패닉계 저소득층 고객들을 대상으로 장사를 했다. 한국인 유학생을 쓰면 제값을 줘야 하므로 동남아인을 구한다던 수영처럼, 저임금 노동자를 고용하거나 가족 경영 체제로 가게를 꾸렸다. 코리아타운 내 한인보다 훨씬 많은 수를 차지했던 라티노들은 이따금 한인 업주들에게 임금체불을 당하기도 했다. 경기 침체에 의한 실업과 빈곤으로 라티노들은 4·29 사태 당시 흑인에 비해서도 더 열악한 처지에 놓여있었다. 이처럼 정치적인 입지는 좁았지만 더 높은 경제력을 가진 한국인들이 중간자로 위치하며, 다른 인종 그룹과 복잡다단한 레이어를 구성했다. 문제는 다문화 지역 당국이 인종 간 갈등을 조정할 정치력과 공권력을 발휘하지 못한 채, 차별을 부추기고 방관해왔던 데 있다. 긴장을 제도적으로 해결하려는 노력이 부족했고, 그러한 비폭력 정치의 공백 상태에 폭력 시위가 비집고 들어와 도시를 분노로 불태웠다. 연극은 공권력의 방관을 짚는 동시에, 한인들이 결코 고래 싸움에 등 터진 새우만은 아니었음을 드러낸다. 그들은 타민족에 대해 잇따라 혐오의 말들을 쏟아낸다.
도시 여기저기서 총성이 울리고 여태 일궈온 가게가 잿더미가 되는 동안에도 한인들은 경찰력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다. 무법 상태에 빠진 아수라장에서 그들은 총을 들길 선택했고, 자경단을 조직해 무력으로 응수했다. ‘루프 코리안(Roof Korean)’은 LA 폭동 당시 총기로 무장하고 지붕 위에서 경계태세를 갖추고 있었던 한국인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인터넷 밈(meme)이 된 ‘루프 코리안’은 21세기에 새롭게 회자되었다. 한국에서는 ‘한인 예비군의 위엄’으로, 총기 옹호론자들을 비롯한 미국 우파 진영에서는 미국 사회의 보수적 가치를 수호하는 ‘모범적인 아시안’의 이미지로 소비되고 있다. 폭력 저항에 맞서 총기로 사유재산을 지키는 행위가 그들의 ‘미국적’ 가치에 부합하기 때문이다. 2014년 마이클 브라운과 2020년 조지 플로이드가 경찰에 의해 사망한 사건을 계기로 흑인들의 저항이 거세질 때마다 일각에서 이 밈이 유행했다. <루프 코리안>은 한인 자경단이 가진 영웅적 이미지를 강조한다거나, 그다지 멋있게 그려내지 않는다. 밈은 종종 절박했던 당시의 맥락이 소거된 채, 인종차별 반대 시위에 대한 혐오를 부추기기 위해 끌려 나온다. 무력을 동원해서라도 재산권을 지켜냄으로써 주류 사회 상층부로 올라서야 한다는 ‘루프 코리안’ 신화는 미국 사회의 흑인 차별을 또다시 한흑갈등의 문제로 축소하고, 인종 간 분열을 야기할 우려가 있다. 그러나 공연 속 ‘지붕 위 한국인’은 치안 시스템의 부재 속에서 삶의 터전에 발붙이지 못하고 지붕 위에 올라야 했던 한인 디아스포라의 위기 상태를 재현한다.
미국에서의 성공, 주류 사회로의 편입, 금의환향 등 인물들의 목표가 다른 만큼 폭동에 대처하는 자세도 각기 달랐다. 4·29 사태로부터 25년이 지났지만, 언젠간 한국으로 돌아가려 했던 우진은 여전히 미국에 남아 한인 커뮤니티의 리더가 되었다. 한때 청년 세대였던 그는 체류자이자 중간자로서, 주류 사회에 동화되기보다는 동족 집단 안에서의 연대를 중시했다. 그가 부모 세대와 갈등을 겪는 다른 교포 2세들과 다르게 한인 모임에 자주 참석했던 이유다. 인물들이 이루는 한인 커뮤니티는 가부장주의를 기반으로 한 확장된 가족 공동체와 같다. 극의 시작을 열었던 2017년 한인회의 모습은 다시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한인사회의 좋은 ‘아버지’이자 리더였던 용수가 소요로 희생된 후, 복구 과정에 놓인 한인 타운의 모습으로 끝이 난다. 인종갈등의 화염에서 벗어나 있던 은미가 마지막에 한인타운으로 돌아온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시민권을 가진 “진정한 아메리칸”이 되길 갈망했던 그의 귀환은 폐허에서 다시 ‘아메리칸 드림’의 희망을 지피는 불씨일까? 혹은 폐쇄적인 민족 공동체로부터 잠시나마 달아나 있던 그가 한인 커뮤니티의 빗장을 여는 변화의 매개자가 될까? 우진이 어떤 리더가 되었고, 한인 커뮤니티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또한 관객의 상상에 달려있다. 그리고 우리는 다시 질문하게 된다. 팬데믹이 불러온 사회·경제적 재난 속에서 증오와 혐오가 커져가는 이때에 지금 여기의 우리는 타자와 어떻게 공존할 수 있을까.
[사진제공: 신촌문화발전소]
- 일시
- 2021.10.15 ~ 2021.10.23
- 장소
- 신촌문화발전소
- 출연
- 곽지영, 권태건, 김기정, 김태우, 박신애, 이경우, 이은정, 장시현, 정나진, 하지웅
- 작·연출
- 김영락
- 사운드
- 베일리홍
- 조명
- 손민영
- 조연출
- 서진희
- 조명오퍼
- 김선경
- 그래픽디자인
- 보통현상
- 기획
- 이정은
- 주최
- 신촌문화발전소
- 주관
- 창작집단 불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