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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극단 청소년극ㅤ<더 나은 숲 Die besseren Wälder>

탕아를 만드는 울타리

영이
210호 2021.11.25
마틴 발트샤이트가 쓰고 토니 그래함이 연출한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더 나은 숲>은 부모를 잃고 양들의 손에 길러진 늑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이다.

마틴 발트샤이트가 쓰고 토니 그래함이 연출한 국립극단의 청소년극 <더 나은 숲>은 부모를 잃고 양들의 손에 길러진 늑대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방황하는 이야기이다.
단차를 두고 구성된 무대에는 커다란 울타리 창살이 세 세트 놓여 있다. 그 앞으로는 작은 의자 크기의 나무토막들이 몇몇 흩어진 채다. 창살은 가장 역동적으로 사용되는 설치물인데, 공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울타리 그 자체로도 존재하지만 때로는 한 창살만이 붉게 번쩍이며 총성을 나타내기도 하고 여러 창살들이 함께 빛나며 클럽의 조명 역할을 해주기도 한다. 심지어는 빨랫대의 역할까지 맡는다. 창살의 이미저리(imagery)는 그저 단단한 물질의 형태로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바닥에 깔리는 조명으로도 소환된다. 이때 조명은 쇠창살을 뚫고 나오는 햇빛을 그려 감옥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이 창살, 혹은 울타리는 양으로서 자란 늑대 ‘퍼디난드’에게 스스로의 정체성을 질문하게 만드는 기폭제가 된다. 퍼디난드는 결코 울타리를 넘어서는 안 된다는 양들의 규칙을 어김으로 인해 무리에서 쫓겨나기 때문이다. 퍼디난드가 쫓겨난 이후에도 울타리는 그 자리에 여전히 우뚝 서서 양이 사는 ‘더 나은 숲’과 그 바깥 세상을 단호하게 나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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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숲>은 울타리로 나누어지는 안쪽 세상과 바깥 세상을 오가며 둘 중 어느 세상에서도 융화하지 못하는 한 마리 늑대의 고민을 그린다. 퍼디난드는 안쪽 세상, ‘더 나은 숲’에서는 양이 아닌 늑대라는 이유로, 바깥 세상에서는 충분히 ‘늑대답지 않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그 세상에 속한 집단에서 튕겨 나오게 된다. 그러나 퍼디난드가 안과 밖, 그 어디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을 수 없게 만드는 것은 양도 늑대도 퍼디난드 자신도 아닌, 울타리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

울타리의 안과 밖 - 양과 늑대의 세계

관객들은 울타리 안 ‘더 나은 숲’에 사는 양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 하지만 이때, 퍼디난드와 퍼디난드를 주워 기른 가족들의 시선, 즉 그 안에 속한 양들의 시선을 경유하게 된다. 풀을 뜯고 노래를 부르는 양들에게는 언뜻 별다른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들은 그 대가로 자신의 털을 내어주어야 하며 무엇보다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한다. 이것이 관객들이 양의 눈으로 보는 ‘더 나은 숲’의 모습이다. 하지만 바깥 세상에 사는 늑대들의 눈에 ‘더 나은 숲’의 모습은 전혀 다르게 비추어진다. 늑대들에게 ‘더 나은 숲’은 아무런 경쟁자도 없이 자신의 먹잇감인 양들만 잔뜩 있는 낙원 같은 공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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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디난드가 양들의 손에 길러지게 된 것도 ‘더 나은 숲’으로 눈보라를 헤쳐 가려던 늑대 부모가 사냥꾼의 총에 맞아 쓰러져버렸기 때문이다. 또한 늑대들의 증언에 의하면 양들이 누리는 삶 역시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부족함 없이 주어지는 풍족한 생활이다. 늑대들은 자신들이 양들에게는 없는 자유를 가지고 있다는 자부심을 드러냄에도 불구하고 끝없는 배고픔과 생존을 위한 치열한 노동으로 인해 ‘더 나은 숲’을 향한 선망 또한 숨기지 못한다. 양과 늑대의 삶이 가지는 이러한 차이는 두 집단이 착용하는 의복에서도 명징하게 드러난다. <더 나은 숲>에서는 다섯 명의 배우가 여러 역할을 돌아가면서 연기하는데 배우들이 양 무리를 연기할 때는 대체로 밝은 색깔의 털 스웨터를 입는 반면 늑대 무리를 연기할 때는 검은색의 가죽 자켓으로 갈아입는다. 시점으로 넘어간다. 바깥 세상인 늑대 사회의 경우에는 양들의 눈에는 비추어지지 않고 늑대들의 눈, 그리고 안쪽 세상에서 건너온 퍼디난드의 눈을 경유해서 볼 수 있다. 늑대들의 삶은 그들 자신에게나 퍼디난드에게나 마찬가지로 빈곤하며 절박한, 하루하루 근근이 연명하는 모습으로 비추어진다. 그러나 두 관점에 차이가 생기는 지점은 바로 노동의 현장이다. 퍼디난드의 말에 따르면 양들의 사회에서는 모두가 일을 함께 도맡아서 해결한다지만, 퍼디난드가 마주한 늑대 가족은 빨래와 같은 가사 노동을 어느 한 명에게 전부 부담시키고 있었다. ‘더 나은 숲’을 가장 선망해서 퍼디난드에게 그곳으로 데려다 달라고 부탁한 늑대 또한 가사 노동을 맡았던 이 암컷 늑대였다.
암컷 늑대는 퍼디난드의 부탁에 대한 대가로 ‘더 나은 숲’을 제시한 것이었는데, 퍼디난드의 그 부탁은 바로 자신에게 늑대가 되는 법을 가르쳐달라는 것이었다. 늑대가 되는 법이 따로 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더 나은 숲>에서 울타리가 나눈 안과 밖의 두 세계에는 단지 환경적 차이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공간을 점유하는 존재들의 문화에도 차이가 있다. 퍼디난드를 기른 양들의 문화와 퍼디난드가 모르는 늑대의 문화는 각각 두 번, 서로 다른 두 인물의 입에서 내뱉어지는 하나의 같은 대사로 응축된다. ‘이건 전통이야. 문제가 없다면 바뀔 필요가 없는 것이지’. 이 대사가 처음 등장하는 순간은 양 할아버지가 퍼디난드에게 종 목걸이를 매어주는 장면이다. 계속해서 울타리 바깥을 건너고 싶어 하던 퍼디난드에게 양 할아버지는 그것이 자신들에게는 용납되지 않는 일이라며 퍼뜩 화를 낸다. 그리고서 양 할아버지는 마치 퍼디난드에게 그 속박을 물려주는 것처럼 자신이 매고 있던 종 목걸이를 선물인 양 건네주며 위의 대사를 읊는다. 이후에 대사는 양으로 길러져 고기를 먹지 못하고 살상을 하지 못하는 퍼디난드가 진정한 늑대가 아니라는 늑대 무리의 일갈로서 등장한다. 이렇게 충분히 늑대 같지 않다는 이유로 퍼디난드는 울타리 건너 늑대 무리에서도 홀로 버려지게 된다.

정상 사회의, 시스템의 안과 밖 - 그런데 어디로?

양과 늑대의 알레고리가 기독교적 정상 사회와 그 바깥을 은유한다는 것을 공연은 애써 숨기려고도 하지 않는다. 양들의 문화 중에서 ‘노래를 부르는 것’이 주를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라는 것은 퍼디난드의 양 어머니에 의해 직접적으로 제시되는 설정이다. 또한 퍼디난드가 가창 대회에 나가서 부르는 노래 또한 성모 마리아의 축복을 기리는 노래이다. 무엇보다 퍼디난드와 함께 울타리를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멜라니’는 신부에 의해 장례가 치러진다. 신부는 ‘양이 주님의 곁으로 돌아갔다’고 당연하다는 듯이 선언한다. 멜라니를 애도하던 신부는 어느 순간 ‘먹을 게 없어서 기도도 못 하는’ 늑대의 역할로 전환된다. 아직까지도 기독교적 가치가 지배하는 정상 사회의 시스템, 즉 먹을 것이 주어지지만 대신 일신의 자유를 속절없이 맡겨야만 하는 안쪽과, 기독교적 가치에 속박되지 않아 비교적 자유를 가지지만 그 대가로 매일매일의 생존을 위협받는 바깥이라는 구분이 그저 알레고리의 영역에만 남아있는 것은 아니리라. 특히 시스템 바깥의 존재들인 늑대들의 눈에는 양들의 삶이 비추어지는 반면, 시스템 안의 존재들인 양들의 눈에는 늑대의 삶이 비추어지지 않는다는 것은 현실의 섬뜩한 현현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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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에서 한 가지 의문이 생기는 지점은 막이 내리기 직전이었다. <더 나은 숲>은 늑대 무리에서 버려진 이후로 행방이 묘연해진 퍼디난드를 아직도 애타게 그리워하는 양 부모, 친구 ‘벡’, 그리고 죽은 멜라니를 마지막 순간에 등장시키는데, 이들은 퍼디난드가 사랑받고 있으며 자신들은 그가 늑대여도 괜찮다고 갑작스럽게 태세를 전환한다. 특히 벡은 난데없이 하얀 늑대로서 퍼디난드가 자신이 살고 싶은 대로 살아도 된다는 급진적 선언을 하는데, 벡은 그의 마지막 대사이자 이 공연의 마지막 대사로 관객들을 바라보며 당신들은 그렇게 (살고 싶은 대로) 살고 있냐는 질문을 던진다. 사뭇 자리에 앉은 관객들로 하여금 스스로가 사회의 울타리, 그리고 그 안과 밖의 관습에 속박되지 않고 진정 자신이 원하는 대로 살고 있는지를 질문하게 만드는 의미심장한 질문처럼 들린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퍼디난드의 부모를 포함한 양 무리가 공연이 진행되는 동안 관습에 저항하려는 시도를 그전까지 쉽사리 보여주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양 무리의 수동적 태도는 양들의 생활 묘사 중 털을 깎는 장면에서 부각된다. 이 장면에서 털을 깎는 인부의 역할을 맡은 배우는 입으로 윙 소리를 내며 손으로 보이지 않는 바리캉을 쥐고 양의 몸에 갖다 댄다. 그러면 양은 입고 있던 웃옷을 힘겹게 벗어 건네준다. 문제는 인부가 양들에게 수치심을 주는 행위를 일삼는다는 것이다. 특히 인부는 퍼디난드의 친구 벡의 털을 우악스럽게 깎아내고 나서도 벡의 국부를 위협하고 엉덩이를 때려 내쫓는 등 폭력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벡은 아무런 반항도 하지 않고 순순히 물러설 뿐이다. 무기력한 벡의 모습은 그 이후에 털을 깎이게 되는 퍼디난드의 모습과 대조되는데, 퍼디난드는 인부에게 직접적인 반항을 일삼지는 않지만, 최소한 자신이 벗어던진 털을 인부의 얼굴에 집어 던지는 소극적 형태의 저항이라도 보여준다.
물론 양들이 이처럼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그들에게 저항이나 탈출의 단서가 전혀 주어지지 않았거나 그들이 처한 시스템의 구속이 너무나도 혹독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하지만 퍼디난드와 함께 울타리를 넘었던 멜라니의 모습으로 인해 이러한 추리는 한풀 힘이 꺾인다. 애초에 퍼디난드가 울타리를 넘게 되었던 것 자체가 멜라니의 요구 때문이었고, 멜라니는 자신이 ‘더 나은 숲’과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고 싶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한다. 그런데 멜라니가 퍼디난드와 함께 울타리를 넘어가는 과정에서 딱히 이렇다 할 방해 요소가 등장하지 않는다. 후에 멜라니가 죽음을 맞게 되는 것은 울타리 바깥에서 암컷 늑대를 만났다가 도망치던 와중 개에게 물리게 되어서이지 그녀를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의 감시 체계 때문이 아니었다. 다시 말해 양들이 울타리를 넘지 못하는 것은 양들 스스로에게 내재되어 있는 문화적·전통적 구속에 의한 것이었다.
나아가 털을 깎이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억압적 시스템의 ‘희생양’으로 등장했던 벡이 생전의 멜라니에게 행했던 일련의 모욕적 언사들 또한 양 무리의 저의를 의심케 한다. 퍼디난드의 어린 시절 벡은 멜라니가 자신보다 상대적으로 비속어나 성에 무지하다는 이유로 그녀를 과격하게 희롱한다. 이러한 벡의 행동은 보다 못한 퍼디난드에 의해 부분적으로 저지되지만, 이후 퍼디난드가 성장해 멜라니와 재회했을 때에도 벡은 다시금 멜라니에게 성적 모독을 일삼는다. 즉, 관객들이 확인할 수 있는 내용 한에서 양 무리의 구성원들은 자신들을 가두는 울타리와 시스템을 향해 저항하기는커녕, 정작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고 싶다는 소망을 품은 다른 양을 향해 공격적이고 경멸적인 태도를 보였다. 무엇보다 공연의 마지막 장면에서 멜라니는 이미 죽은 양에 불과했고 정작 퍼디난드를 수용할 수 있는 양 무리의 구성원이 아니었다. 종극의 순간에 퍼디난드를 수용할 수 있는 양 무리의 구성원이, 그리고 공연이 관객을 향해 던지는 그 마지막 대사의 발화자가 바로 이 벡이었다는 점은, 양 무리를 넘어 <더 나은 숲>이라는 연극의 저의를 의문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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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제공: 국립극단]

국립극단 청소년극 <더 나은 숲 Die besseren Wälder>
일자
2021.10.29 ~ 2021.11.21

장소
백성희장민호극장

작
마틴 발트샤이트(Martin Baltscheit)

연출
토니 그래함(Tony Graham)
영어대본번역
박영훈
윤색
장영
독일어대본감수
서지영
무대
송성원
조명
김형연
의상·소품
이은경
작곡
장영규, 김선, 정중엽
음향
안세운
움직임
권영호
교육감독
이소선
출연
김민주, 김서연, 이동혁, 황규찬, 황순미
관련정보
http://www.ntck.or.kr/ko/performance/info/256999
독자의 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