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봄 작가, 겨울 무대 <어린잎은 나란히>
나란히 심겨 가까워지고 연결되는 생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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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의 제목을 가만히 들여다본다. ‘어린잎’이 주는 맑고 싱그러운 느낌, ‘나란히’가 주는 가지런하며 평등한 느낌, 종결된 문장이 아닌 채로 엮여있는 두 단어가 주는 아련한 느낌이 있다. 제목이 불러오는 정서대로, 연극 <어린잎은 나란히>는 반려식물과 위탁가정을 소재로 생명력과 연대에 관한 메시지를 보여주었다. 또한 끝난 듯 끝나지 않은 듯한 느낌으로 관객들로 하여금 연극이 끝난 후에도 질문을 품고 메시지를 다시금 곱씹어볼 수 있게 했다.
돌보는 사람, 그의 집에 방문해 일어난 일들
연극의 주된 무대가 되는 공간은 수평으로 긴 아파트 실내다. 벽은 베이지 벽지에 하얀색 몰딩으로 깔끔하게 마감되어 있고 바닥에는 밝은 갈색의 장판이 깔려있다. 패브릭 소파와 키 낮은 선반, 탁자와 의자 등 가구가 나란히 놓여있고 대부분의 가구가 밝은 회색이나 밝은 갈색, 하얀색으로 이루어져 있다. 집안의 전체적 색감이 조화롭고 아늑한 느낌을 주어 이 집을 돌보는 사람의 취향과 온화한 성격을 추측해볼 수 있다. 또한 집안 곳곳에 있는 장난감과 인형 집, 작은 목마, 선반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어린이 책들은 이 집이 아이를 키우는 집이며, 군데군데 놓인 다양한 종류의 식물 화분들로 집주인의 취미가 반려식물 돌보기임을 짐작하게 한다. 화분이 가장 많은 곳은 왼편의 탁자 뒤로 트인 베란다 공간이다. 크고 작은 화분들이 많은 이곳은 마치 작은 식물원 같다. 집주인의 식물 사랑이 남다르게 보인다.
흥미롭게도 연극에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이 집의 주인이 아니다. 첫 장면에 등장하는 인물은 초영으로,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 변화하게 된 유일한 인물이기도 하다. 더위에 기진맥진해진 것처럼 보이는 초영이 에어컨을 켜고 바람을 쐬며 시간을 보내는 사이에 방 안에서 진의가 나온다. 초영은 언니인 진의가 여행을 떠나는 동안 집을 맡아주기 위해 이 집에 왔고, 진의가 없을 것이라 생각했는데 아직 떠나지 않아 집에서 마주쳤다. 진의는 남편과 스무 살이 된 딸을 두고 있다. 연두라는 네 살 아이를 위탁해 열두 살이 될 때까지 키운 후 위탁기간이 종료되어 아이를 친엄마에게 보낸 지 6개월여의 시간이 흘렀다. 8년 만에 언니의 집에 온 초영은 언니가 아이에게 그만 미련을 버리기를 바란다. 연극은 집안과 식물, 아이에게 성심을 다하며 돌보는 진의, 그리고 진의를 오랜만에 만난 만큼 시간적, 심리적으로 거리가 있는 초영을 대치시킴으로써 이야기를 진행해나간다.
진의는 연두가 돌아간 이후에도 이따금씩 놀러오기 때문에 연두의 물건을 버리지 않을 만큼 애정을 가지고 있지만 초영은 그런 진의를 이해하지 못한다. 아이를 키우는 친구 경미를 집으로 불러 어린이 책 전집과 장난감을 장바구니에 가득 담아 나눠주어, 그 광경을 보는 진의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초영이 진의의 집에 드나들며 만나게 되는, 이해할 수 없는 또 한 명의 ‘돌보는 사람’은 옆집에 사는 금란 할머니이다. 처음 진의의 집에 올 때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친 할머니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 것을 초영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자신과 언니가 친자매여도 많이 닮지 않아 얼굴을 헷갈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해, 당황한 초영은 대꾸도 않고 집으로 올라왔다. 이렇듯 마음을 내어주는 것에 경직되어 있던 초영은 시간이 흐르면서 조금씩 변화한다.
살아있는 존재, 연두를 만난 후 생긴 변화들
자기 생각대로 아이의 흔적을 정리하려 할 만큼 진의에게 공감하지 못하던 초영은, 진의엄마가 보고 싶어서 찾아온 연두를 아파트 복도에서 마주치지만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한여름 날씨에 아이를 집안에 들여보내려 하기보다는 거리를 두고 언니에게 연락을 취해볼 뿐이다. 무대 위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대화한다. 그러다 연두가 먼저, “이모라고 불러도 돼요?” 물으며 초영에게로 한 걸음 옮긴다. 관계를 형성하려는 욕구를 먼저 내보이며 질문하는 연두는 그의 이름에서 연상되듯 어린잎의 현신이다. 땅을 비집고 올라오는 새싹만큼 싱싱한 기운이다. 뿐만 아니라 초영과 집에 들어온 연두는 진의엄마 집에서 나는 포근한 냄새를 좋아한다고 말하고, 자신의 물건들이 없어진 것을 보자 이모가 또 치울 것 같다며 남은 물건을 챙겨 가려 한다. 그만큼 연두는 모든 걸 생생히 느끼고 기억하는 존재이고, 상처받을 수 있으며 자기를 지키기 위해 행동할 줄 아는 인격체다. 초영은 연두의 살아있음을 여실히 느끼며 연두에게 조금씩 곁을 내준다.
함께 밥을 먹은 두 사람은 베란다의 식물을 바라보며 탁자에 나란히 앉아있다. 연두는 초영에게 8년 전에 봤던 진의엄마의 모습을 물어보고, 초영은 진의의 모습을 또렷이 기억해내 말해준다. 이로써 두 사람은 진의에 대한 애정과 기억으로 연결된다. 연극에서 진의의 집 탁자에 나란히 앉은 장면은 두 번 반복된다. 초반부에서 초영이 진의의 집에 방문해 진의와 나란히 앉은 장면, 그리고 후반부에서 진의가 없는 집에 방문한 연두와 초영이 나란히 앉은 장면이다. 이는 ‘돌보는 사람’인 진의가 타인이 누구이든 평등한 태도로 존중하며 정성을 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위탁되어 키워진 연두도 동생 초영도 진의를 그리워하는 것일 테다. 연두와 초영은 나란히 서서 금란 할머니에게서 받은 여러 종류의 씨앗을 화분에 함께 심는다. 할머니가 모두 섞어버려서, 오히려 어떤 꽃을 피울지 기대가 되는 씨앗들을 나란히 심는다. 연두는 초영에게 새싹이 나면 그 앞에서 같이 사진을 찍자며 또 한 번 싱그럽게 제안한다. 아파트 복도에서 멀리 거리를 두고 서 있었던 연두와 초영은 이제 어깨동무를 할 만큼 가까워져 함께 집을 나선다.
서로의 출신을 몰라도 나란할 수 있는
연극이 진행되는 동안 관객에게는 하나의 수수께끼가 생긴다. 초영이 진의의 집에서 만난 진의는 8년 전 모습을 하고 있으며 경미에게는 보이지 않았다. 연극은 후반부에 연두의 입을 빌려 ‘초영이 진의를 많이 보고 싶어 했던 것 같다’, ‘많이 보고 싶을 땐 꿈속에서 만나게 된다’며 해당 장면을 현실 논리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상태로 둔다. 이 아리송한 느낌은 단단한 현실의 논리에 이야기를 가두지 않고 이야기의 틈새를 넓힘으로써 인물들에 대한 질문을 품도록 만든다. 초영과 진의 사이에 8년간 왕래가 없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초영은 진의와 어린 시절 어떤 자매로 지내왔을까? 이외에도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많은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인물, 즉 타인에 대해 질문하고 대화하며 가까워지는 것은 연극이 담고 있는 메시지이기도 하다.
또한 금란 할머니와 초영이 만나는 장면에서는, 연극은 이러한 수수께끼를 굳이 풀지 않아도 된다고 말하는 것도 같다. 금란은 진의와 닮아 보이는 초영에게 엘리베이터에서도, 아파트 복도에서도 진의인 줄 알고 스스럼없이 말을 건다. 처음에 초영은 대꾸도 하지 않고 지나치지만, 두 번째에 만났을 때에는 굳이 오해를 바로잡으려 하지 않고 대답한다. 그런 초영에게 금란이 안겨준 것은 씨앗 무더기와 흙이 담긴 봉지다. 이 장면을 통해 연극은 어떤 씨앗이 어떤 꽃을 피우게 될는지 미리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씨앗들을 가꾸고 살피는 마음이고, 이웃에게 선물을 건네는 정다움이고, 격의 없이 먼저 말을 건네는 용기라고 말한다. 혈연관계가 어떻든 출신이 어떻든 다양한 가족 형태가 가능하며, 그 속에서 내 주변의 생명을 돌보고 서로 연대하는 힘이 더 중요하다고 말한다.
[사진제공: 한국문화예술위원회 / 촬영: 이미지 작업장_박태양]
- 일자
- 2021.11.26. ~ 2021.11.28.
- 장소
- 대학로예술극장 소극장
- 작
- 신윤주
- 연출
- 윤혜진
- 드라마투르그
- 신윤아
- 출연
- 김정민, 유풀잎, 윤현길, 이정미, 이지현, 이라임
- 무대
- 정영
- 조명
- 성미림
- 음악·음향
- 백인성
- 의상
- 안해은
- 분장
- 장경숙
- 조연출
- 박리안
- 무대감독
- 원소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