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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정거장’ 호추니엔 <R for Resonance>

동남아시아란 무엇인가

손옥주
212호 2021.12.23
여러 멀티버스들을 잇는 장을 표방하는 전시회 ‘가상정거장’이 올해로 2회를 맞았다

“여러 멀티버스들을 잇는 장”1) 을 표방하는 전시회 ‘가상정거장’이 올해로 2회를 맞았다. 11월 23일부터 12월 5일까지 문화역서울284에서 개최된 이번 전시회에는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뉴미디어, 온라인 게임 등의 기술 메커니즘을 바탕으로 한 국내외 작가들의 인상적인 작품이 다수 소개되었는데, 호추니엔(Ho Tzu Nyen)의 작품 <R for Resonance> 또한 그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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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의 미디어 아티스트이자 동시대 예술계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는 작가 중 한 명이기도 한 호추니엔의 작품은 국내에서도 이미 여러 차례 소개된 바 있다. 필자 또한 지난 2018년 국립현대미술관 다원예술 프로그램 ‘아시아포커스’의 일환으로 초대되었던 작가의 또 다른 작품 <의문의 라이텍>을 관람하고는 매우 깊은 인상을 받기도 했었다. 이 작품에서 작가는 2차 세계대전 전후로 말레이 공산당 총서기를 지내는가 하면, 일생에 걸쳐 서로 다른 세 나라(프랑스, 영국, 일본)의 개입 속에서 자그마치 삼중 스파이로 활동했다는 전설적인 인물 라이텍을 둘러싼 미궁의 이야기들을 토대로 라이텍을 ‘의문의 인물’, 더 나아가 ‘의문을 통해 구성 또는 해체 가능한 인물’이라는 관점에서 재조명했다. 이 같은 작가의 관점이 특별히 인상 깊게 다가왔던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특정 인물의 개인사를 넘어선 거시적인 역사‘쓰기’의 문제와 결부되어있었기 때문이다. 작가의 작업에 있어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사유와 통찰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음은 잘 알려진 바이다. 그런데 여기서 특히 눈여겨볼 것은 바로 작가가 동남아시아를 동남아시아‘로서 발견해내도록 만드는’ 시차(視差)의 기원을 살핌으로써 그와 같은 기원을 창조하는 헤게모니 주체를 드러냄과 동시에, 그와는 무관하게 실존하는 지형으로서의 동남아시아를 창작의 출발점으로 삼는다는 점이다. 전자가 수렴과 소급의 이미지라면, 후자는 수렴 불가능한 상태로 늘어놓아지거나 중첩되어있는 상태에 가깝다. <의문의 라이텍>은 바로 그 후자와 같은 상태, 말하자면 알면 알수록 알기가 어려워지는 모순적인 바로 그 상태에 매료되고 설득되고 공감되도록 하는 작품이었는데, 이처럼 미묘하게 중첩된 느낌은 작품을 관람한 이후로도 오랜 시간 필자의 마음에 흔적을 남기기도 했다.

이번 ‘가상정거장’에서 발표된 <R for Resonance> 역시 동남아시아 지역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작가의 관심과 통찰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2019년에 처음 발표된 이 작품은 360도 VR 영상과 앰비소닉 사운드 등으로 구성되어있고 러닝타임은 15분 36초에 이르며 총 6명의 관객이 VR 고글과 헤드폰을 착용한 상태로 같은 공간에서 각자 관람하게 된다. 호추니엔은 2012년부터 현재까지 <동남아시아 비평사전(The Critical Dictionary of Southeast Asia)>이라는 제목의 영상 작업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번 <R for Resonance>도 이 비평사전의 일환으로 기획, 제작된 것이다. 비평사전 작업에 대해 간략히 소개하자면, 이 사전은 2차 세계대전 시기부터 서구인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개념화되기 시작한 ‘동남아시아’라는 균질적(homogenized) 용어에 대한 비판적 사유 실험이라 할 수 있다. 상상적 공동체를 구동시키는 ‘상상력’의 근원에 대한 질문이기도 한 이 작업에서 작가는 A부터 Z까지 총 26개의 알파벳으로부터 각각의 알파벳으로 시작되는 키워드를 추출해낸 뒤, 이를 자동편집 알고리즘의 도움을 받아 5천여 개에 달하는 동남아시아 관련 영상에 실시간 무작위로 연결 짓는다. 이 같은 실험은 마치 20세기 초 에이젠슈테인이 시도했던 어트랙션 몽타주 기법의 동시대적 변주처럼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를 통해 작가는 재료의 한계와 그 한계가 만들어내는 조합의 예측 불가능성 사이에서 비로소 ‘동남아시아란 무엇인가’라는 난제에 대한 답변의 가능성을 찾고 있는 듯하다. 실제 <동남아시아 비평사전> 홈페이지2)를 방문해서 알파벳 R을 클릭하면 ‘R for Resonance’라는 타이틀과 함께 한동안 이어지는 짧은 영상들을 시청할 수 있다. 각 알파벳을 대표하는 키워드는 곧 동남아시아를 바라보는 작가의 관점이자 작품의 주제라고 할 수 있겠는데, ‘R’의 경우 ‘Resonance’, 즉 ‘공명’이라는 의미를 대표하며 그에 따라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악기인 ‘징(Gong)’과 관련된 영상 편집본들이 빠르게 재생된다.

이번 ‘가상정거장’에서 발표된 VR 작업은 이 같은 웹 버전의 확장판이자 매체적 변이의 결과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제를 비롯한 사유의 흐름은 유지되는 한편, 영상 속 이미지들은 작가의 시각을 거쳐 추상적 혹은 구상적인 그래픽으로 재탄생해 VR에 프로그래밍 되었기 때문이다. VR 고글을 착용한 관객은 제 자리에 앉은 채로 헤드폰을 통해 사방에서 들려오는 듯한 앰비소닉 사운드를 들으며 360도로 구현된 VR 세계를 탐색한다. 드높은 푸른 산과 잔잔한 물결이 일렁이는 바다를 건너고, 나무가 우거진 밀림을 지나고, 고온의 불에 녹아내린 것 같은 무형의 금속 곁을 지난다. 공중에 둥둥 떠 있는 에어컨 실외기 사이를 지나고, 인간의 귀 고막을 빠져나오기도 하고, 거죽은 벗겨진 채 신경과 근육 다발만으로 구성된 인간의 형체에 다가가기도 한다. 얼핏 보자면 마치 거대한 검은 우주 공간에서 진행되는 한 편의 탐미적인 여정처럼 느껴지기도 하는 <R for Resonance>는 그러나 여러 층위에서 흥미로운 생각의 지점들을 던져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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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인 점을 두 가지 꼽자면 첫째, ‘공명’을 상징하는 기호로 징이 호출된다는 점, 그리고 둘째, VR 속 이미지들 가운데 대다수가 부드러움, 유연함, 흘러내림과 같은 ‘액체성(fluidity)’을 보인다는 점을 들 수 있을 것 같다. 작가는 이번 작품을 통해 예로부터 동남아시아 지역의 제의를 상징하는 악기였던 징을 적극적으로 이미지화・사운드화하는데, 관객은 VR을 통해 징의 모습뿐만 아니라 징을 만들어내는 원소로서의 금속과 불의 이미지도 접할 수 있고 이와 동시에 헤드폰에서 흘러나오는 징의 강한 울림도 들을 수 있다. 금속성의 타악기인 징은 그 특성상 일차적으로 연주자가 두드리는 힘과 만나 소리를 발생시키고, 이차적으로 그와 같은 외부의 힘이 제거된 상태에서 공기 중의 진동을 통해 소리를 유지시키며, 마지막으로는 들리는 소리가 사라진 상태에서 소리가 남긴 에너지만을 듣는 이의 감각 속에 흔적으로 새긴다. 그리하여 듣는 이로 하여금 울림을 기억하게 되는, 다시 말해 들리지 않아도 들을 수 있게 되는 상태에 놓이게끔 하는 것이다. 징의 소리는 이처럼 미묘하게 분리되는 상태들의 총합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어쩌면 호추니엔은 이처럼 징으로 실현되는 공명의 상태를 통해, 동남아시아를 ‘동남아시아’라는 특정 대명사 안에 용해시키려(dissolve) 했던 근대의 지역학적 세계관을 극복하고자 했던 것은 아닐까 싶다.

그 다음으로 이번 작품에서 특별히 인상 깊었던 점은 바로 VR 속에 가장 빈번히 등장했던 ‘액체성’의 이미지였다. 15분이 넘는 시간 동안 VR 속 세계를 유영하며 불과 물, 금속 등의 원소 이미지를 다수 접할 수 있었는데, 이 이미지들은 대개 흐르는 상태로 제시되어 있었다. 계속해서 흐르고 있거나, 흐르는 상태로 멈춰있는 이미지들이 다수였는데, 매끈한 표면의 광택 때문에 이들의 액체성은 시각적으로 극대화되어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그와 같은 액체성은 반짝이고 매끄러운 상태에 머물러있거나 그런 상태만을 끊임없이 지향하고 추동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언제나 구성과 구축, 구조의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마치 국가를 구획 짓는 국경이 임의적인 것처럼, 애당초 경계를 알 수 없는 흐물흐물한 액체 상태의 이미지는 온갖 구획의 잠재태로서 제시되는데, 이 때문에 각각의 액체 이미지 자체보다도 그 이미지들이 변형・변이・전환되는 양상이 보다 흥미롭게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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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호추니엔은 지난 2017년 한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자신의 <동남아시아 비평사전> 작업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언급한 바 있다: “26개 키워드 모두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들이지만 대체로 ‘Shape Shift’, 즉 자기 모습을 변화시키는 것들에 관한 얘기가 될 거다. 삼중 스파이, 유령작가처럼 자기 모습이 확실하지 않은 건데 그게 곧 동남아시아적인 게 아닐까.”3) 동일한 지형과 동일한 인물에 부여되는 담론 변화는 지형과 인물의 동일성 이전에 담론을 변화시키는 ‘힘의 궁극’에 대해 되묻게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의 변화된 매체 지형 안에서 그와 같은 되물음을 그치지 않는 호추니엔의 작업은 여전히 문제적이며 여전히 유효하다.

[사진제공: 옵/신 페스티벌]

‘가상정거장’ 호추니엔 <R for Resonance>
일자
2021.11.23 ~ 2021.12.5

장소
문화역서울 284 1층 귀빈예비실

관련정보
http://www.virtualstation2021.com/
  1. ‘가상정거장’ 공식 홈페이지 http://www.virtualstation2021.com/.
  2. https://cdosea.org
  3. 정지혜, 「[people]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전시 <불확정성의 원리> 참여하는 호추니엔 감독」, 『씨네21』, 201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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